-
-
말하기를 말하기 - 제대로 목소리를 내기 위하여
김하나 지음 / 콜라주 / 2020년 6월
평점 :
품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우 공부를 하면서 배운 것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포즈pause’ 즉 ‘잠깐 멈춤’의 중요성이었다. 말의 매력과 집중도를 높이는 것은 이 ‘잠깐 멈춤’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이것은 너무도 중요한 기술이라 이 책을 읽는 여러분도 그에 대해 생각을 해보셨으면 좋겠다. 말을 매력적으로, 힘있게 하는 사람들이 어디서 말을 끊고 다시 이어가는지를 관찰해보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특히 법정 드라마의 변론 등을 유심히 들어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최근에 나는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수상 소감을 말할 때 샤론 최의 동시통역과 함께 두 언어의 호흡을 어떻게 끊고 이어가는지를 관찰하며 또 많이 배웠다.
중요한 것은 상대에게 마음을 열려는 태도다. 미리 재단하려는 마음 없이. 여기서 세계를 파악하는 두 태도의 차이를 읽을 수 있다. 즉 세계를 화분들의 집합으로 파악하느냐, 아니면 하나의 거대한 숲으로 이해하느냐. 좁은 화분을 벗어나 울창한 숲속으로 나아가려면 우선 내 마음이라는 화분부터 깨버려야 할 것이다. 먼저 말을 거는 사람이 된다는 건 내게 그런 의미였다.
여러 번 경험을 쌓으니 조금씩 노하우가 늘었다. 가장 큰 깨달음은 ‘말하기’는 너무 빽빽해선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글이야 읽는 사람이 충분히 시간을 들여서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은 몇 번씩 다시 읽기도 하고, 내려놓고 조금 쉬다가 다시 읽을 수도 있지만, 말하기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되었다. (-) 빽빽함에 비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과감하게 덜어낼수록 강연은 더 좋아졌다.
그러기 위해 가장 집중하는 부분은 ‘듣기’다. 사람들은 내가 팟캐스트를 진행한다고 하면 ‘말하기’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말하기 전에 우선 들어야 한다. 대화에서는 듣기가 80이고 말하기가 20이다. 잘 들어야만 잘 말할 수 있다.
“어디, 자네도 얘기 한번 해보게” 한다고 해서 소통이 일어나는 게 결코 아니다. 빛과 온도와 습도가 잘 맞으면 흙속의 씨앗들이 너도나도 싹트듯이, 편안하고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지면 이야기꽃이 피어나는 것이다. ‘이야기꽃’이라는 표현이 괜히 있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오늘 저녁에 뭐해?”
“왜?”
한국에서는 자연스러운 대화다. 오늘 저녁에 뭐하냐는 물음에 나의 일정을 말하는 걸로 대답하지 않고 상대의 의도가 있으리라 넘겨짚어 되묻는다. 상대가 말을 해도 곧이곧대로 듣지 않고 그 이면에 깔린 의중을 미루어 짐작하는 것. 이것이 한국식 대화에서 눈치의 핵심이다. 나 또한 한국에서 나고 자랐으므로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눈치라는 기술을 많이 발전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기술이 때로 너무나 피곤하다.
“그래,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는 사람마다 다른 것 같아. 그게 꼭 책일 필요는 없지.”
〈책읽아웃〉 ‘어떤 책임’ 코너에서 캘리님이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라는 책을 소개했을 때 나는 좀 놀랐다. 사람들이 자주 쓰는 표현들이 질병을 앓는 이들을 소외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흔히 “건강하세요”라는 말을 많이 한다. 상대가 건강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하는 것은 나쁘지 않겠으나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 거야”처럼 건강지상주의로 흐르는 말들은 질병을 앓는 사람들을 패배자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도 사랑을 하고 즐거움을 느끼고 노력하고 성취도 이룬다. 따라서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 거야’라는 말은 그들의 삶과 이야기를 송두리째 납작하게 만들어버리는 표현이다.
TV뿐만 아니라 어디에든 남성들을 위한 마이크는 차고 넘친다. 다시 말해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여전히 큰 마이크를 쥘 기회가 많다. ‘기브 미 더 마이크’를 외치지 않아도, 굳이 읽고 쓰고 듣지 않아도 말할 기회가 넘치는 사람들. 그러나 요즘은 작은 마이크들이 무수히 많아진 시대이기도 하다. 세상이 내게 마이크를 주지 않아도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을 수 있는 시대다. TV라는 큰 마이크보다 작은 마이크들의 세상이 내겐 훨씬 더 깊이 있고 진실되고 재미있다. 그러니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았으면 좋겠다.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줬으면 좋겠다.
나는 마이크 앞에 선 여자가 더 많이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약자, 소수자, 장애인, 청소년, 질병을 앓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 많이 들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게 주어진 마이크들을 더 잘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이 읽고 쓰고 들어야겠지. 내게 마이크가 있는 한, 아니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더 많이 말하고 더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싶다. 지금껏 들리지 않았던 수많은 목소리들에게 마이크를 건네고 싶다. 한없이 내성적이었던 나에게 용기를 주셨던 분들처럼, 나도 편견 앞에 주눅든 많은 사람들에게 목소리 낼 용기를 주는 말을 건네고 싶다.
기억해, 너는 말하는 사람이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