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 - 박연준 산문집
박연준 지음 / 난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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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알코올중독자들이 있는 폐쇄병동으로 아버지를 면회 갔을 때 말이야. 휴게실에서 아버지를 만났는데, 아버지의 등 뒤편에서 맨발로 탁구를 치다 나를 보려고 뛰어나오던 아저씨들을 봤어. 아버지는 웃으며 ‘내 똘마니’들이라고 장난스럽게 소개했어. 난 한심하단 눈빛을 담아 그들을 쳐다봤지. 그런데 그중 한 사람이 해사한 표정으로 말하더라. “형님이 딸 시집을 보여주면서 자랑 많이 하세요.”


얼굴이 확 달아오르면서, 네, 하고 얼른 고개를 숙였는데 마음이 이상하더라. 나는 매번 아버지를 구박하기만 했는데. 아버지는 이곳에서 맨발로 뛰어다니는 저 바보 이반들 하고 우르르 몰려가 담배를 피우고, 우르르 몰려가 종이학을 접으며, 갇혀서, 갇혀서, 갇혀 있으면서까지 날 자랑했다니. 내가 뭐라고. _98~99쪽



할머니는 삶은 밤을 숟가락으로 파내 밥그릇에 모아놓고 설탕을 뿌린 뒤 내게 주었다. 숟가락을 입속에 넣었다 빼면 밤 부스러기가 침과 섞여 숟가락에 축축하게 달라붙었다. 숟가락에 붙은 부스러기를 떼어 먹고 있으면 할머니의 손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할머니는 삶은 옥수수도 한 알 한 알 떼어내 밥그릇에 담아놓았다가 내가 오면 주었다. 옥수수는 입속에서 몽글몽글 굴러다니다 터졌다._190~191쪽



염을 할 때 아버지의 손과 발, 내가 사랑하던 얼굴을 오래 만졌다.


지금도 만져보고 싶다.


가끔 만질 수 없다는 게 의아하게 여겨질 때가 있다. _202쪽



살아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해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이다. 새삼 이 사실이 놀랍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어떻게 멈추지 않고, 지금까지 온 걸까? 내 몸속을 흐르는 피는 어떻게 한순간도 흐름을 멈추지 않고 지금껏 움직여 왔을까? 새들과 한철 피고 지는 꽃들과 난쟁이 같은 버섯들, 크고 작은 동물들에 비해 사람은 태어나 죽기까지의 주기가 길다. 창문 앞에 흐드러진 목련은 나를 한 철 보겠지만, 나는 저 목련이 죽고 나서도 내년에 다른 얼굴로 오는 목련들을 ‘또’ 볼 수 있다. _202~203쪽



나는 잘 지내고 있어. 위에서 내려다본 ‘마을의 작은 지붕들’처럼. 근사하지? 내가 이곳에서 얼마나 따뜻하게 잘 사는지 알면 질투 날 텐데. 내 지붕 아래로 가끔 칠이 벗겨진 기차가 지나다니고, 세숫대야에 쏙 들어가는 작은 바다도 넘실대고, 이름 모를 나무들이 조용히 늙어가기도 해. 물론 옛날 음악이 흐르는 주크박스와 한 소쿠리 귤, 숨겨둔 꿀단지도 있어. 난 요새 부자야. 이렇게 살고 있다고.


물론 생각이 날 때가 있지. 아주 가끔. <걸어도 걸어도>란 일본 영화를 보고 난 직후라든가, 피곤한 일을 처리하고 돌아와 힘없이 단추를 풀 때. 혹은 치약을 짜다가 별안간. 청국장을 끓이다가 문득. 마치 먼 옛날 애인처럼 떠오르지. 내게 그런 애인이 정말 있었나, 싶은. _216~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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