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짐승아시아하기 문지 에크리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가장 신비한 거울아! 거울아 거울아 동굴처럼 어두운 거울아! 혹은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거울아! 부르는 너는, 그 거울에 비친 너를 하나도 남김없이 다 견뎌낼 수 있는가. 너는 너를 얼마나 잘 가꾸었기에 온전히 ‘나’인가.

 


어차피 그들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 그것은 커다란 치즈 덩어리에서 단지 한 조각을 떼 내어 냄새를 맡아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가 아니다. 그들은 무한겹겹, 여럿이다. 그들의 신은 하나가 아니다. 3억의 신이 그들 곁에 있다. 그러나 이도 다가 아니다. 신들은 늘 분열한다. 신들은 무한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화신을 시시때때 무한수로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어느 신의 이름은 1천8백 개다. 그는 하늘과 땅, 바다에 걸쳐 골고루 자신의 형상들을 뿌려놓다 못해, 반수獸반인, 반어魚반인, 반사蛇반인까지 만들어놓는다. 심지어는 자신을 넘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의 분신의 형상으로 환생하기도 한다. 남의 자궁으로 들어가 다시 태어나기는 예사다.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 미래, 현재를 동시에 산다. 필요할 때마다 분열, 증식한다. 그들처럼 나는 하나가 아니다. 나는 여럿이다. 나는 무수하다. 나는 수시로 환생하고, 수시로 죽으며, 살아서 죽고, 죽어서 산다. 심지어 어떤 나는 너에게 속해 있다. 나는 우주에 미만하다. 아 놀라워라, 이 땅엔 우주의 지존의 육화된 화신들이 득실득실하다. 나는 지금 이 순간 그들 중 하나다. 하나인 그것들이다. 나는 나의 실체를 모르지만, 나의 전부를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 여럿이다. 나인 그것들이 뒤엉켜 서로 사랑하고 자식을 낳고, 자식이 또 자식을 낳는다. 당신은 그 모두를, 그 모든 형상을 구분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그들 중 누구를 사랑하는가. 사랑한다고 말하는가. 누구든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은 쥐 두 마리가 생산한 세상의 모든 쥐 중에서, 몇 마리를 실험실에 가두어놓고, 그 쥐에 대해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모든 쥐 중 한 마리가 태어나서 죽고, 다시 태어나서 죽기를 거듭하다가 오늘 자동차에 치인 한 순간, 존재의 덮개를 벗는다. 언제나 세상을 들쑤셔 도려낸, 그 상처로 만들어진 길은 많고도 많지만, 세상의 모든 쥐 중 한 마리는 저에게 정해진 그 길로만 다니다가 어느 순간 존재의 모자를 벗어던진다. 나도 그 쥐 새끼 한 마리처럼 세상의 상처인 길 위를 떠돌다가 좀더 멀리 나가본다.

 


김혜순_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