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속의 구조대 민음의 시 258
장정일 지음 / 민음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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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탄 집을 교대로 지킨다




장정일




집 앞의 버스 정류소에 내리면

불 냄새가 난다

너와 나는 그만 헤어져야 해


내 발걸음을 이끄는 건

들리지 않는 소방차 소리

골목에서는 언제나 환영을 보았지

어지러운 소방 호스와

나를 손가락질하는 낯선 이웃들

까맣게 타 버린 창에 늘어진 혀처럼 보이는 것은 그냥 커튼일 테지


누구도 알지 못할 우리 집 비밀번호

너는 문 열리는 소리를 듣고

나와 똑같은 꿈을 꾸다가 일어났어

서로 겸연쩍은 얼굴을 교환하고

물 잔을 앞에 놓고 식탁에 마주 앉았어

이미 불탄 집인데


이튿날 아침엔 네가 먼저 사라졌어

동물원에 가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알바일 테지

나는 가스레인지를 껐다, 켰다, 껐다, 켰다

하지만 이 집은 우리 게 아니야


저녁에 너는 불 냄새를 맡으러 돌아올 테지

물에 젖은 커튼을 보며 잠시 미소를 지을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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