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사람이냐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지음, 이현주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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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의 선이 한 사람의 선보다 더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인류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구체적인 개인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그가 인종(人種)에 속해 있기 때문에 가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인종이 가치 있다면 그것은 인간들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숨을 쉬는 공기와 떨어질 수 없듯이 사회와 떨어질 수 없고, 우리의 행동을 방향짓는 제반 관계들의 체제를 이루는 것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개인으로서 욕망을 품고 두려워하고 희망하고 도전받고 의지력을 발휘하고 그리고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사람을 필요로 하는가? 자연? 산맥들은 우리의 시(詩)가 필요해서 거기 뻗어 있는가? 천문학자들이 없어지면 별들은 사라질 것인가? 지구는 인류의 도움 없이도 제대로 궤도를 돌 수 있다. 자연은 우리의 모든 욕구를 채워 줄 만한 실력을 지니고 있지만, 인간을 필요로 해달라는 인간의 욕구 하나만은 채워 주지 못한다. 자연의 거역 못할 침묵 속에서 인간은 앞뒤 없는 문장의 가운데 부분과도 같고, 그의 모든 이론들은 자기 자신 안에서 외톨이가 된 자신을 가리키는 작은 부호들과도 같다.
다른 모든 욕구들과는 달리, 필요한 존재가 되겠다는 욕구는 바깥으로부터 만족을 얻고자 하는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내어주고자 하는 무엇이다. 그것은 초월적인 욕망을 만족시켜 주려는 욕망이요 동경(憧憬)을 만족시켜 주려는 동경이다.
모든 욕구는 일방적이다. 배가 고플 때 우리는 음식을 원한다. 그러나 음식은 먹히기를 원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물건을 보면 우리는 그것을 가졌으면 한다. 그러나 물건은 우리에게 자신을 가져주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들 삶의 대부분은 그런 일방성 안에 갇혀 있다. 우둔한 사람일수록, 자세히 보면, 그의 마음이 자기 멋대로 현실을 재단하려는 노력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보게 된다. 그에게는 마치 이 세상이 자기의 쾌락을 만족시켜 주기 위하여 존재하고 있는 것만 같다. 우리들 모두, 사람들보다는 사물과의 관계를 더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들을 대할 때조차 그들을 우리의 이기적인 목적에 이용할 만한 사물이나 수단으로 여기고 상대한다. 우리가 사람을 사람으로 마주 대하는 일이 얼마나 드문 일인가! 우리는 모두 사용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오직 자유로운 사람만이 실존의 참된 의미가 자신을 남에게 내어 줌에 있고, 사람을 사람으로 마주 대함에 있어, 보다 높은 욕구들을 충족시키는 데 있음을 안다.
우리의 모든 경험은 욕구들인데 그 욕구들은 충족될 때 사라진다. 그러나 우리의 실존 또한 틀림없는 하나의 욕구이다. 우리는 그런 욕구들이 만들어 내는 하잘것없는 존재이다. 우리의 짧은 생애는 하나의 의지에 감싸여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영속하는 것은 정열도, 기쁨도, 즐거움도, 고통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욕구에 대한 응답이다. 우리 속에 영속하는 것은 스스로 살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가 아니다. 우리의 삶을 원하는 하나의 욕구가 있고, 우리는 살아감으로써 그것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끝까지 영속하는 것은 우리의 욕망이 아니라 그 욕구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요 충동이 아니라 동의(同意)다. 우리의 욕구들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우리가 필요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구는 영속적이다.
사람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모든 현상들 중에서 가장 쉽게 소멸되는 것은 욕망들이다. 수초처럼 그것들은 망각의 물 속에서 자라다가 금방금방 시들어 버린다. 욕망은 어서 소멸되기를 스스로 바라고 있다. 그것은 가라앉기 위하여 존재하고, 충족되는 순간 스스로 장송곡을 부르면서 사라져 간다.
그런 자멸하려는 성향은 인간의 모든 행위 속에 들어 있는 게 아니다. 사상, 이념, 법률, 이론 따위는 오래 지속되려는 성향을 지니고 태어난다. (-)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내면을 대충 훑어보아 한때는 불꽃처럼 타오르던 욕구와 욕망들이 황량한 무덤이 된 것을 발견할 때, 우리의 실존이 덧없음을 피부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
그는 삶이란 따지고 보면 제 위로 스쳐 지나가는 온갖 그림자를 이럭저럭 견디는 해시계의 얼굴 같은 게 아닐까 하고 의심한다. 삶이란 서로 아무 관련도 없는 사건들의 뭉치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환상으로 위장된 혼돈이 아닐까?
이 지구 위에는, 비록 막연하게라도, 인간의 삶이 영속하는 무엇에 비쳐볼 때까지는 우울하고 음산한 것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없다. 우리는 모두 살아가느라고 애쓸 가치가 있다는 확신을 찾아 헤매고 있다. 인생과 노력과 고뇌를 견디게 하는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하는 마음을 지니지 않은 사람은 없다.
짙은 안개 속에서 가냘픈 몇 자루의 촛불을 들고 인간은 그의 모든 동경(憧憬)에 대하여 속수무책이다. 그의 영혼이 입은 상처와 그의 두려움과 좌절을 착해지려는 그의 의지가 고쳐 줄 것인가? 그의 의지가 스스로 분열된 집으로 통하는 문임은 분명하다. 즉, 그의 착한 뜻들이 잠시 동안의 인내 끝에 허무의 진창에 닿게 되리라는 것은 그의 인생의 지평선 끝이 언젠가는 무덤에 닿게 되리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분명하다는 말이다. 우리의 착한 의지들의 지평선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_아브라함 요수아 헤셸_누가 사람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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