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수 클리볼드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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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오버워치하고 한시인가 두시인가 집에 들어와서 잠들어서 잠을 설쳤다. 잠을 푹 자지 못할 거라는 생각으로 너무 피곤한데 늦잠 자지 않을까? 했고 실제로 알람을 세 번인가 끄고 나니까 아홉시 오십분이었다. 딱히 오늘 회사 가지 않아도 될 것 같고 봐야 하는 원고도 어제 가방에 챙겨와서 단톡방에 오늘 하루 쉬겠다고 톡을 남겼는데 열시에 미팅이 잡혀 있었다. 담당자가 도착해서 기다린다고 하길래 과장님께 전화해서 대신 나가서 얘기 듣고 오시라고 했고. 그때부터 집에서 볼끼랑 놀다가... 가스점검도 받았다. 점검 받을 때 집이 너무 지저분해서 검침원분이 가신 뒤에 이불 개고 방 쓸고 청소기를 돌리고 바닥을 다시 쓸었다. 하는 김에 청소기도 분해해서 씻어서 말리고 세면대랑 욕실 벽, 바닥 수세미로 닦고 하수구 거름판도 다 들어내서 뒤집어 칫솔로 안과 밖, 옆을 다 닦았다. 변기도 물 떠먹어도 될 정도로 깨끗하게 치워놓고 더러워진 몸을 씻었다. 아침은 안 먹었고 점심으로는 피자 시켜먹을까 하다가 저번주에 많이 먹고 가서 고생한 생각나서 꾹 참고 시리얼에 우유 먹고 옷이랑 챙겨서 서울로 나갔다. 종각 공차에 들어가 원고 보고 있었는데 실내가 정말 추워서 감기 걸릴 것 같았고, 그래도 자리가 1인석이고 콘센트도 있고 괜찮아서 참고 있다가 여섯시쯤에 못 참겠어서 이동했다. 종삼 포차거리 근처에 있는 다리치 카페에 갔고 지하, 일층, 이층 다 둘러봤는데 이층이 괜찮았다. 사람도 없었고 음악 볼륨이 크지 않았는데 거슬리지 않아서 이어폰 끼지 않고 있었다. 운동은 두번째였는데 저번에 물을 중간에 많이 먹었다가 고생한 생각나서 물을 일부러 안 마시고 참았다. 다 끝나면 왕창 마셔야지 하면서. 하체였는데 스트레칭을 한 뒤에 스쿼트를 보통, 넓게, 좁게 했고 그다음에는 뛰어오르면서 하는 거. 그다음엔 팔벌려뛰기를 했고 그다음에는 런지를 했고, 다음에는 조를 나눠서 사이드 스텝/스쿼트(일반, 점프)를 했다. 그다음엔 런지 동작에서 다리를 가슴 쪽으로 끌어당기는 동작을 일반 45도 90도 이렇게 했나? 그다음에는 플랭크 자세에서 다리와 팔을 배-가슴 쪽으로 끌어당기며 마는 동작, 그리고 플랭크, 이후로는 슈퍼맨 동작을 상하체/상체/하체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다시 런지 자세에서 두 팔을 다리 옆에 대고 엉덩이를 내렸다 올렸다 했는데 나는 거의 동작을 못 따라갔다. 도중에는 허리가 너무 아파서 이렇게 아프면 안 되는 거 아닐까? 나는 예전에 허리가 아파서 잠을 못 자고 그랬으니까 이렇게 운동하면 안 되는 거 아닐까? 하는 잔꾀부리는 생각이 잠시 들었고... 허리를 똑바로 펴야 아프지 않다고 하는데 몸에 힘이 안 들어가니 자꾸 자세는 굽었고... 하지만 코치님이 보여준 모범적인 동작은 마음속에 넣어둠. 언젠가는 따라할 수 있겠죠. 정말 필요한 건 기초 체력을 키우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얼마전 나는 보건소에서 한다는 순환운동교실(야간이며 월, 수에 함)을 신청했는데 안내문에는 만30세~65세 남성이 지원하라고 되어 있어서 전화했더니 담당자가 너무 젊으셔서 강도가 약할 수 있는데 괜찮겠냐고 물었다. 저는 신체 나이가 오십대만도 못한 거 같아서 괜찮을 거 같아요, 라고 했다. 근데 통화 끝나고 순환운동교실 검색해보니 '어르신'들이 다치지 않도록 운동을 알려주는 보람찬 시간이었다는 체대생의 일기부터 우리 엄마나 할머니 또래의 여사님들이 소중되게 모여가지고 찍은 사진 같은 것이 보였다... 근데 정말 나에게 꼭 필요한 과정 아닐까? 싶었음.. 운동 끝나고 뒤풀이까지 가는 체력은 언제쯤? 마련될까 싶을 정도로 힘이 빠져서 계단 내려올 때는 손잡이를 잡았는데도 휘청휘청했다. 그래도 저번주보다는 살 만해서 택시 대신 버스 타고 파주까지 왔다. 아낀 택시비로 홈플러스 가서 마감 세일하는 수박 반통 백합조개 모시조개 양송이버섯 숙주나물 사고 갈비살이랑 부채살도 사서 들고 집까지 왔다. 조개들은 물에 씻어서 냄비에 물 붓고 끓였고 거품 걷어내는 동안 집에 있는 통마늘 까서 편으로 썰어서 몇 개 넣었다. 소금으로 간하고 맛이 밍밍하길래 이전에 소중친구가 사다놓은 국물 맛 내는 조미료가 있어서 그거 하나 뜯어 넣고 간이 얼추 맞길래 숙주나물 물에 헹궈서 다 쏟아붓고 뚜껑 닫고 숨죽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동안 부채살 뜯어서 반은 갈비살이랑 같이 얼려놓고 절반은 후라이팬에 올리브유 두르고 통마늘이랑 구웠다. 내일 먹으려고 한 건데 오늘 밤에 쓰레기 버리려고 하는 김에 다 정리했다. 그냥 운동하면서 느낀 거. 내가 지금 못하는데 이거를 누가 나한테 화를 내거나 뭐라고 다그친다고 해서 이게 갑자기 될까? 그냥 평상시에도 꾸준히 운동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 방법이고 못하더라도 힘들더라도 규칙적으로 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일 거였다. 그러다보니 갑자기 며칠 전 내가 너무 화가 났을 때가 생각났다. 화를 낼 수 있는 것처럼 보일 때 가장 조심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엄청나게 나쁜 짓을 그가 저지른 것이 아니라면요...) 나는 타인에게 화를 낼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누가 못하면 그것을 어떻게 하면 앞으로는 잘할 수 있을지 알려주고 그 과정에서 나는 도움을 주려는 사람이다라는 신뢰를 얻는 게 먼저라는 생각을 했다. 동시에 이 일을 잘해야 하는 이유와 필요를 그가 자기 삶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가 스스로 발전시켜나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먼저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오만한 생각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나에게 하는 말이니까, 하고 변명하고. 운동이 얼마나 힘들었냐면 하면서 나는 정말 편하게 일하고 있구나, 회사를 그만둔다거나 하는 것은 진짜 배부른 소리구나 내 몸도 어쩌구도 이렇게 엉망인데...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음.

그리고 오늘은 이동진분이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이야기를 방송에서 했는데 매체 특성을 고려해서인지 분량상 언급할 겨를이 없었는지 자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 책을 읽으며 인상깊었던 부분은 콜럼바인총격사건을 벌인 소년 중 한 사람은 자살하는 방법으로 이를 택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소년의 엄마인 수 역시 자신의 아들이 왜 이렇게 사람을 죽였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아들이 왜 이런 방식으로 죽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는지 탐구를 해야 했다. 생각난 김에 전에 접어둔 부분을 다시 읽었는데 겨자씨 이야기가 이 책에도 나왔다. 너무 예쁘고 소중한 아기를 잃은 여자가 아이를 살려달라고 여기저기 약을 구하러 다니지만 사람들은 도와줄 수 없어 그 여자를 부처님에게 데려간다. 부처님은 이 예쁜 아기를 살릴 방법을 알려주는데 그것은 마을에 내려가 겨자씨 한 알을 얻어오는 것이다. 다만 아무도 죽거나 고통을 겪지 않은 집에서. 여자는 마을에 내려가 이집 저집 돌아다닌다. 다들 겨자씨는 있는데 마찬가지로 고통을 겪지 않은 집도 없었기에 여자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인데. 이야기는 어디에서 끊어야 할까? 나는 처음에는 다 같이 고통을 겪었다는 것에서 안도했던 것 같다. 아픈 건 나만이 아니야. 모든 사람이 고통을 겪는다. 그것은 억울함과 분노? 그런 것을 다스리는 데 일시적인 도움을 준다. 그런데 다시 생각했을 때는 뭘 봤을까. 이 사람들이 그 고통을 겪고 상실을 겪고 살아 있다는 거? 어떤 순간은 끝난다는 거? 하지만 당장 불속에 들어간 듯 너무나 괴로운 여자에게는 그러한 평온함이 허락되지 않았을 것 같다. 수는 책에서 에드 코피가 만든 ‘완벽한 우울증 관리’라는 프로그램을 언급하는데 이 프로그램은 속한 사람들의 자살률을 0으로 유지하는 게 목표라고 한다. 하지만 자살하는 사람을 0으로 줄이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사람들은 회의적이다. 에드 코피는 반문한다. "그럼 목표를 몇으로 잡을까요? 여덟 명?” 연숙이는 일기에 며칠 전 생일에 누가 부채살 스테이크를 선물해줘서 집에서 스테이크를 구웠는데 나이프가 없어서 자해할 때 쓰는 메스를 가지고 고기를 썰었다, 하는 내용을 적었다. 그전에는 전시에 관한 이진실분의 글을 읽었다. '아직 자살하지 않은 사람'. 자살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너는 죽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명령과의 싸움. 매일 그 싸움에서 이겼기 때문에 아직 살아 있지만 내일도 그럴지는 알지 못한다. 살아보려고 노력했더라도 실패할 수도 있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럼에도 그것이 가져올 고통은 너무나 크기 때문에 표현하는 것도 제한되어야 한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당신은 죽어도 된다'고 허락하는 일이기 때문에, 라고 믿는 사람. 이들이 세상에 함께 있다. 스스로 선택한 죽음을 뇌의 오류로 벌어진 안타깝고 막을 수 있었던 사건으로 보든 아니든, 누군가는 불속에 있고 이 고통이 멎을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가 아닌가는 사후적인 판단에 불과하다. 나는 자살자의 죽음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들이 자살자가 겪어야 하는 고통을 조금도 덜어주지 못했으리라는 데 손목을 거는 사람이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숨긴다. 그것은 남을 사람에 대한 죽은 사람의 배려나 자존심처럼 보이기도 한다. 조금도 빚지지 않겠다, 같은. 다만 계속 고민하는 것은 말하는 사람의 윤리적 책임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아기를 잃은 엄마가 아닌 해탈한 사람의 몫이어야 할 것이다. 그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윤리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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