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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기억은 어디로 갔을까 - 알츠하이머병 엄마와 함께한 딸의 기록
낸시 에이버리 데포 지음, 이현주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7년 7월
평점 :
절판
나는 서서히 마음의 준비를 한다. 아니 하려고 할 때마다 눈물이 난다.
나의 엄마는 깔끔하고 남에게 폐 끼치는 것을 누구보다 싫어하며, 자신의 이야기가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싫어 힘들어도 참고, 싫어도 참으며 포기하며 한 평생을 살아오셨다. 지금또한 그 삶의 방식을 놓치지 못하시고 4남매 밥상 위에 반찬 하나 더 올려놓으시기에 힘도 없는 다리를 끌고 시장에 가시고, 젊은 장정도 힘들다 할 만큼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오신다. 우리에게는 청소도 대충하면서 쉬엄쉬엄 살라하시면서 엄마 집에 화초들의 잎사귀는 반짝반짝 눈이 부신다. 언젠가 깔끔하고 속에 담아두고 참기만 하는 사람은 노후에 알츠하이머병에 많이 노출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였을까. 고치지 못하는 엄마의 속앓이와 깔끔한 모습을 볼 때마다 윽박도 질러보고, 너무 힘들고 지쳐서 화를 낼 때는 그 모습이 어찌나 안쓰럽고 애잔한지 모르겠다.
알츠하이머병의 발병은 특정 성별에 국한해서 나타나지 않고, 남자나 여자나 똑같이 개인 소지품을 숨기기도 한다. 그들은 삶의 오랜 파편들로 여행 가방을 한가득 싸서 결코 돌아오지 못할 기이한 목적지로 여행을 떠난다. 156쪽.
현대 과학이 발달되었다고, 암도 고치는 세상이라고 말하는 요즘이지만, 아직 알츠하이머병을 이겨내는 약은 발표되지 않았고, 우리가 주위에서 듣는 경우보다 더 많은 수의 가족들이 환자를 돌보며 고통받는다고 한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 그리 중요하지 않은 기억들은 우리들도 잊고 살고 있다 생각하면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주위 환경에 대한 지각조차도 인지하지 못하고, 어느 한 시점에 멈춰버린 사고로 살아간다는 것은 가족 뿐 아니라 주변 인물들에게 쉬이 용납되지 않는 소통의 막힘이 된다.
알츠하이머병은 그 병을 앓는 사람에게서 기억을 훔쳐갈 뿐 아니라, 환자 가족들이 알츠하이머 환자 때문에 생긴,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들을 상기시킬 때 그들의 기억에도 왜곡을일으키는것 같다는 사실이다. 25쪽
『엄마의 기억은 어디로 갔을까』는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엄마를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딸이 쓴기록이다. 엄마의 이상 행동을 무한정 받아주었던 아빠의 지나친 보호 속에 감춰져 있어서 너무나 늦게 눈에 띄었다는 후회부터 본인도 뇌졸중으로 힘든 상황에서 아내를 스스로 지켜내겠다는 아빠의 의지와 희생 그리고 갑작스럽게 찾아온 죽음까지 딸의 입장에서 담담하게 담아내었다.
엄마의 모습이 낯설고 이해하지 못해 소리지르는 딸의 모습에서 "왜 그렇게까지 소리를 지르지?" "그냥 그렇다고 거짓으로라도 받아주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지만, 딸에게 엄마는 항상 어른이고, 나보다는 월등하게 우수한 존재이다. 그 존재가 한순간 내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볼 때 그것은 슬픔을 넘어 현실을 인정할 수 없는 분노로 표현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우리는누군가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리면 받아들여야 한다. 정말이지 다른 선택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그 병을 최후의 결과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과정으로 생각해야 한다.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 병에 걸린 사람들을 도와주기를 기대하고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해달라고 요구하려면, 그 병의 존재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 아직 알츠하이머병 '치료제'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병이 지나가는 과정을 자존감과 존경심이 넘치는 과정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9쪽.
어제로 막을 내린 TV드라마 "죽어도 사는 남자"의 최민수가 35년에 딸과 재회하지만 알츠하이머병을 진단받는다. 의사를 만나고 나온 딸이 위로하는 남편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왜 하필 알츠하이머냐고? 내가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잖아. 간이나 신장이라면 떼어줄 수 있을텐데 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알츠하이머냐고."
이 말을 듣는데, 그렇게 눈물이 났다. 정말 알츠하이머라는 병은 그 곁을 지켜며 말도 안 되는 행동일지라도 받아주고, 억지스런 말이라도 들어주고 무조건 "응"으로 반응해주고,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문단속을 철저히 하거나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는 일 밖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정말 가족이라는 이름의 힘이 너무나 나약해지는 순간이 아닌가 싶다.
나의 부모에게도 닥칠 수 있는, 피할 수 있다면 꼭 피하고 싶은 장애물이지만, 그건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가족이 일원으로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부모를 보살피는 자식의 입장은 어떨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금해서 읽기 시작한 책인데, 읽는 내내 가슴이 답답해져오고, 부모에게 위기가 닥치기 전에 내가 먼저 마음을 내려놓고 사랑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억지스런 말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때 담담하게 그 자리를 버텨낼 수 있는 힘.
나에게 폭행을 저질러도 그 다음 순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의연한 눈빛.
힘들고 지치는 순간, 사춘기 시절 나를 견뎌내준 그 순간을생각할 수 있는 심장.
몰래 집을 나가 몇 시간만에 경찰서의 연락을 받고 뛰어가 따스하게 잡아줄 수 있는 손.
내가 먼저 준비한 다음까지 우리 부모님이 기다려만 준다면 이 또한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텐데.
내가 엄마를 진심으로 용서했을 때는 엄마가 알츠하이머병 말기 상태라 심하게 아팠기 때문에 내가 엄마를 용서했다는 사실을 엄마는 알지 못했다. 나는 유진 오닐의 비극에 나오는 한 장면 같은, 내 삶이 아니 다른 사람의 삶처럼 느껴진 그날 오후를 가끔 떠올린다. 엄마가 얼마나 오래도록 당신의 증상을 감춰야 했는지, 그 기간 동안 얼마나 두려웠을지 생각하면 정말 울고 만 싶다. 아빠의 뇌졸중은 엄마가 당신 병을 감추는 데 쓰고 있던 남은 힘을 모조리 가져가버렸다. 111쪽.
알츠하이머병은, 아주 잔잔하게 찾아와 일상을 송두리째 휘두르는 강력한 힘을 가졌다. 환자의 삶을 너무나 무기력하게 만들면서 주위를 조금씩 조금씩 잠식시키는 숨막히는 장기전을 시작한다고 선포한다. 진단을 받은 초기의 환자는 자신이 기억이 점점 잊혀진다는 것을 느끼면서 암울하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도가 무너지고, 그로 인해 위축감이 들면서 주변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그것은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환자 본인의 자존감을 한순간을 앗아가며 상실감을 맛보게 한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단순하게 기억 안나는 것이 아닌, 한 사람의 충실했던 삶이 차츰 지워지고 또 다른 삶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또한 기억하지 못하며, 이는 남은 이들에게 아픔으로 기억되어 좋은 추억마저도 아픔으로 전환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내가 엄마의 은밀한 개인 위생과 관련하여 신경을 쓰는 것은 사랑을 되돌려주는 가장 강력한 행위처럼 느껴졌다. 이러한 행동들을 통해 과거의 상처는 모두 아물었고, 덩굴처럼 자란 사랑이 되돌아왔다.
나는 이렇게 직접적인 방식으로 엄마를 돌보는 과정에서 내가 정말로 엄마와 내 자신을 용서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엄마가 힘겹게 싸우고 있던 시기에 아무것도 모르고 맞붙어 싸운 나와 엄마를 용서할수 있었던 것이다. 엄마를 위해 모든 일을 잘 처리해 놓았다는 사실에 점점 자부심을 느꼈다. 198쪽.
사랑하는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든든하고 의지되었던 부모가 알츠하이머병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자식의 마음은 당사자가 아니고는 그 아픔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다만 그들의 아픔을 듣고 읽으면서 이런 일이 현실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이며, 나에게 닥친다면 나 또한 그들의 감정선대로 믿지 못하고 의심하며 분노하고 그 뒤에 찾아오는 좌절감과 씨름하면서 어느 순간 현실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점점 부모에게 받은 사랑을 온전히 돌려드릴 수 있는 시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건강한 부모에게 온전히 닿았다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할 일이지만, 그렇게라도 할 수 있는 자식의 입장에선 그마저도 감사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 슬픔이고 사랑의 되돌림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알츠하이머는 고칠 수 없는 병이다.
우리는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부모를 보살펴야하는 자식이고, 아이들의 부모이다.
『엄마의 기억은 어디로 갔을까』를 읽으면서 다가오지 않을 순간을, 언젠가는 닥칠 지 모르는 그 순간을 위해 나를 다스리는 시간이라 생각할 수 있고, 지금 이 순간 무너지는 부모의 모습에서 좌절을 느끼는 가족에게는 지나가는 이 순간을 받은 사랑을 돌려주는 사랑의 순간이라는 깊이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는 시간이 되어주길 간절히 소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