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 듯 저물지 않는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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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년 전, 그러니까 결혼하기 전, 오빠가 놀러온 친구가 다 읽었다고 두고 간 책이라고 읽으려면 읽으라고 건네 준 책이 에쿠니 가오리가 쓴 <냉정과 열정사이>였다. 매스컴에서 책에 대한 이야기가 막 나오고 있던 시점이라 횡재구나 싶어 얼른 손 내밀어 받았다. 두 남녀의 이야기를 담아낸 책, 그 동안 읽었던 로맨스와는 너무나 다른 느낌이기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잊고 있었던 에쿠니 가오리의 『저물 듯 저물지 않는』을 만나게 되었다.

무미건조한 삶의 일상 속에서 자신을 지켜내며 살아가는 미노루, 그는 활자 중독이라고 할 만큼 책 속에 빠져살며,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현실과 다르지 않다, 다르다는 것에 끊임없는 물음을 갖는다. 미노루가 빠져있는 소설을 우리가 함께 읽어간다. 그가 읽는 구절을 함께 읽으면 조바심 날 때 현실속의 초인종이 울리고, 벨이 울리고, 친구가 찾아오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소설은 끝이 나고, 현실로 돌아와 미노루와 관계한 이들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미노루와 나기사 그리고 하토, 그들은 한 때 가족이란 한 울타리에서 살았으나 지금은 미노루의 친구와 함께 가정을 이루며 또 다른 가족의 형태로 분리되어 살아간다. 미노루는 아내와 딸을 친구에게 빼앗겼지만, 그것에 절망하거나 미움을 키우지 않는다. 겉에서 바라본 미노루는 아무 감정도 없게 모든 것에 대해 씻은 듯 정리된 모습으로 보이지만, 그는 잃은 자기 자리에 대한 아쉬움과 불안감 그리고 걱정이 감싸고 있음을 시간이 지나면서 느껴간다. 다만 전전긍긍하며 자신을 봐달라고 기대지 못할 뿐이다.

 

아마 '공유'의 문제이리라. 텔레비전을 보는 남편은 지금 여기 있다고 느낄 수 있지만, 책만 읽는 미노루는 옆에 있어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기사를 혼자 내버려두고 늘 저 혼자만 다른 장소로 가버린다고밖에. 112쪽

나기사는 책에 빠져 사는 미노루로 인해 외로움을 느꼈다. 나와는 다른 세상에 빠진 듯한 남편을 바라보는 부인, 참으로 힘들고 조용히 지쳐갔을 것이다. 미노루는 나기사의 외로움을 알았을까, 나기사를 책으로부터 소외시키고 있었음을 한번쯤 느꼈을까, 알았다면 그들은 지금 어땠을까? 누군가 한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내려놓고 살았다면 어땠을까? 어떤 경우에도 그들에게 행복한 삶은 장담하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두 사람이 중심을 이루는 가정에서 어느 한 사람의 포기는 배려이고 존중으로 비칠 수는 있지만, 결코 두 사람의 영혼이 따듯해질 수는 없을 테니까.

 

어느 쪽도 책에서 얼굴을 들지 않는다. 미노루는 자기만 책 밖에 있다는 것이 부당하게 - 또는 거의 소외당한 것처럼 외롭게 - 느껴져, 더는 버티지 못하고 침대의자로 - 그리고 모나와 안나가 있는 오슬로로 - 돌아간다.  211쪽

미노루는 나기사가 느끼는 외로움과 소외감을 시간이 한참 흐른 뒤, 누나 스즈메와 아들 하토로 인해 처음 가져본다. 나기사 앞에서는 외로움을 주는 입장이었다면, 누나와 딸에게서는 외로움을 받는 입장으로 전환되었다. 다시 책 속의 세상으로 서둘러 가고 싶은 그 마음은 바로 외로움에 대한 낯섬과 불안감이다. 미노루가 나기사의 그 마음을 조금 빨리 눈치챘더라면, 책에서 멀어질 수 있었을까?

에쿠니 가오리의 『저물 듯 저물지 않는』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갖는 만남과 이별 그리고 또 다른 시작이 끊임없이 전개되어진다. 어느 관계도 끝이 없으며, 시작도 없고, 끝이 보이지만 결코 끝낼 수 없는, 또 다른 시작을 기다린다. 정리될 듯 하지만 작은 끈 하나로 연결되어지고, 끊어질 듯 하지만 또 다른 관계로 또 다시 시작되어지고,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써내린 글을 읽으면서 많은 이들을 한꺼번에 만난 낯선 환경에 놓인 나를 만나게 되었고, 그들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에쿠니 가오리의 담담하게 써 내려가는 문체가 주는 힘이 아닐까 싶었다.

 

부부란 것은 참 그로테스크하다. 결혼한 후로 몇번이나 했던 생각을 나기사는 지금 또 한다.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몰라도, 아니 상대가 귀찮게 여겨질 때조차, 밤이 되면 같이 자고, 아침이 밝으면 같은 식탁에 앉는다. 조금만 불코ㅐ함도 말의 어긋남도, 무엇 하나 해결되지 않은 채로 일상 속에 묻히고, 밤과 낮이 되풀이되고, 부부가 아니면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무엇이 되고 만다. 세상에서는 그런 걸 인연이라고 하리라. 그러니 인연이라는 것은 나날의 조그만 불쾌함의 축적이다.   268쪽

 

부부는 정말 모를 관계이다. 나도 한 남자의 아내이고, 한 남자를 남편으로 맞아 살아가고 있지만, '부부'라는 관계는 누구보다 다정했다가 어느 순간은 누구보다 낯설기도 한 그 정체가 무엇인지 참 궁금한 관계이다. 한없이 멀게 느껴지다가도, 나를 가장 잘 아는 단 한 사람이 되기도 하는 부부.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이 때로는 적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불편함이 서로를 한없이 바라보게 하는 측은지심의 마음이 되기도 하며, 다정함이 깃드는 그 순간 부부의 연을 맺은 걸 참 다행이라 여기게 되는 관계. 우리는 그들을 부부라 이름하나보다.

잃을 여자가 없으니 속 편하다. 오타케의 말이 가슴에 가시처럼 꽂혀 있었지만,

"덕분에"

하고 지금에야 혼자 말하는 것으로 매듭을 짓고, 활자를 더듬는다. 매일 밤 잠옷을 입을 때마다 의식 멀리에서 나기사를 생각한다는 것도, 두 벌 있는 잠옷이 너덜너덜해져 다시 사야 할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라는 두려움도, 라이루에게는 양육비를 줄 수 있는데 하토에게는 줄 수 없는 불합리함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287쪽

미노루는 아프다. 외로워서 아프고 불안해서 아프고, 자신이 느끼는 이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없어 아프다. 미로루가 책에 빠지는 건 어찌 보면 자신의 감정이나 행동을 숨기기 위한 안전한 도피처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가 읽어가는 소설 속의 관계 또한 얽히고 설켜 있어 실타래를 풀어가듯 조심하지 않으면 누군가는 피해를 입어야하고, 누군가는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 미노루는 그들처럼 살고 싶지 않다. 나 하나만 외로우면, 나 하나만 참으면 된다는 그 마음으로 소설과 현실을 왕래하며 그 속에 자신만을 위한 작은 공간을 만들어가는 건 아닌가 싶어 마음이 애잔해진다. 

하루 하루 살아가는 삶의 일상이 무미건조한 미노루는, 오늘도 참 많이 고달프다. 조금 안정되었나 싶은 날, 나기사가 전화해 하토의 양육비를 더이상 내지 말 것을 권유하고, 하토의 운동회에 참석하지 말라는 전화를 걸어오며, 한없이 자유분방한 누나의 여행기와 연락을 수시로 받아주어야 한다. 이혼을 앞둔 친구의 고민을 들어줘야 하고, 이미 이혼하고 혼자인 미노루에게 이혼할 대상이 없음을 '속편하다'로 단정짓는 친구의 푸념을 들어줘야 한다. 책에 열중하는 그에게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치카와 사야카, 그들은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 것처럼 잔잔한 일상의 미노루가 멈춘 듯, 어른처럼 살아가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을 한순간도 쉬지 않는다. 또한 앞으로도 그의 삶은 끊임없이 흘러갈 것이며, 끝이 보이는 순간에도 삶을 이어가는 미노루의 삶, 결코 저물지 않는다. 그에게는 그에게 맞춰진 삶의 시계가 있을 뿐이다.

그는 오늘도 삶의 한 자락에 자신의 영혼을 담아내고 있을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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