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세요? 북극곰 꿈나무 그림책 6
엠마누엘레 베르토시 글.그림, 이순영 옮김 / 북극곰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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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그동안 미루고 미뤘던 밀폐용기를 구입했다. 수납함에 쌓여있는 밀폐용기가 있기에 선뜻 구매하지 못했는데

더 이상은 미룰 수가 없어 과감히 주문 완료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결혼해서 얼마 안 된 신혼집에 유명한 이름의 밀폐용기가 커다란 상자 하나 가득 배달이 왔다.

남편이 결혼 한 달 기념 선물로 주문한 것이라고 한다.

깨끗한 용기들이 크기별로 다양하게 얼마나 빛이 나던지, 살림도 못하는 저이지만

그릇을 보니 너무나 반갑고 좋았다.

그렇게 나에게 기쁨과 뿌듯함을 줬던 용기들이 세월이 흘러 색도 바래고 뚜껑 손잡이는 한쪽씩 떨어져 나가고

김치도 조림 반찬도 튀김도 담았던 지라 아무리 잘 닦고 말렸다 해도 냄새는 지울 수가 없게 되었다.

중간중간 정리하면서 버렸지만, 여전히 나의 수납함에 자리하고 있던 용기들을 더 이상 사용하기가 불편해

이별을 해야 했기에 과감히 베란다 플라스틱 수거함에 차곡차곡 쌓아 이별을 하고자 내놓았다.

그것을 한참을 내다보던 남편이 하나하나 뚜껑을 열고 닫고 냄새를 맡고 하더니 양쪽으로 재분리를 한다.

그리곤 큰 아이에게 라벨을 부탁한다.


일반 작은 못, 일반 중간 못, 일반 큰 못, 나사 작은 못, 나사 중간 못...

작은 상자 속 지퍼백에 담겨 있던 못들과 집안 가구 손볼 때 쓰던 작은 연장들을 분리 작업을 하더니 수납장안에 차곡차곡 쌓아올린다.

큰아이가 쓴 라벨이 앞을 보고 당당하게 서 있다. 그 앞에 선 남편의 모습 또한 당당하고 뿌듯하다.

주방에서 쓸모없다고 나에게 버려진 플라스틱 밀폐용기가 남편의 손에 의해 새 자리를 찾아 새로운 모습으로 베란다 한편에 자리한다.

쓸모없음은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곧 누군가의 손에 의해 다시 태어나 또 다른 모습으로 당당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는 것이다.

 

 

어릴 적 우리 아빠는 맥가이버의 스승이었다.  우리 사 남매에겐 말이다.

친구네 집 담장이 예쁘다는 언니의 말에 담장을 다시 쌓아올려주신다고 흙을 개고,

오빠가 친구들처럼 얼음 썰매가 필요하다는 말에 나무판을 자르고 철사를 끊고 못질을 하셨다.

나에게 앉은뱅이책상이 처음 생긴 날, 첫 번째 서랍은 비밀 서랍이라고 했을 때 자물쇠와 열쇠를 직접 달아주셨다.

 그때 사용했던 톱과 펜치, 못과 망치. 자물쇠 등은 

도시 생활과 자식들이 아빠의 품에서 벗어나 어른이 되어가면서 아빠의 손에서 멀어져 간 공구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아빠의 손에 우리의 기억 속에서 절대 버려지지 않았다. 

아빠에겐 품을 떠나 자식에 대한 그리움일 테고

자식인 우리에겐 아빠에게 한없이 부탁한 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

지금쯤 그들은 어디에서 무얼 할까?

새 주인을 만나 여전히 일을 하고 있을까?

아님 여전히 아빠의 손을 기다리고 있을까?


세월이 얼마인가.

내가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아빠의 손은 감각이 둔해지고

눈도 예전 같지 않아 돋보기를 쓰고서야 은행 계좌를 적을 정도이니

그들도 노쇠하고 제 기능을 잃은 지 오래일 테지.

 

 

우리 집 담장에 쓰일 흙을 개던 힘 좋던 삽이 이렇게 녹이 슬었구나.

우리가 삽 위에 올라가 깡충깡충 삽콩콩이를 뛸 때 단단하게 힘이 되어주었던 삽자루는

어디로 보내고 요렇게 얼굴만 삐죽 남았을까.

삽, 너도 세월 앞에 어찌할 수 없었겠지.

나도 이제는 삽콩콩이 못 뛰니, 자루는 필요 없어졌어.

이렇게 네 얼굴이라도 볼 수 있으니 반가워.

 

 

 

매일 저녁마다 터진 그물 꿰매던 뱃사람들은 다 어디 갔을꼬.

그물이 이렇게 터지고 낡고 끝이 나풀거리는데 어느 누구도 그물 걱정을 안 하고 있으니

고기는 어떻게 잡고, 그물은 누가 던질꼬.

고기는 못 잡더라도 바다 구경은 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네 고향에 남아 있어서 그 또한 다행이고.

뭐라고?

.

.

.

고향가고 싶어 돛을 올린거라고?

세월은 네게 그리움이겠구나.   


 

바람이 분다.

녹이 슬어 닦아도 닦아도 빛이 나지 않는 네 모습 슬프구나.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이 네 눈물 닦아주고

세상 소식 전해다 주니 그리 슬픈 인생만은 아닐거야.

이렇게라도 하면 네게 위로가 될까.

나이 듦이 마냥 서럽지만 않기를.   


저기 바람을 등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창을 든 청년을 봐.

고독한 길을 가면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의지를 담아 내딛는 발걸음
바람 앞에 당당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바람이 멈추면 멈추는 대로

바람의 손짓에 항상 손짓해주는 너의 배려심.

넌 결코 혼자가 아니야.

 

 

 

너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아.

장마 때 지붕에서 떨어진 물 맞아 녹슬었던 그 톱 맞지?

아빠가 좋아했던,

옆집 앞집 빌려주면서 그렇게 큰 소리쳤던 바로 그 녀석이었는데.


한 번의 슬픔이 너를 이렇게 힘없이 무너지게 했구나.

지금 너 화내는 거 아니지? 양을 물려는 건 아니겠지?


그럴 줄 알았어.

양에게 자유를 주려고 울타리를 끊어줄 참이었던 거지.


역시,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한 바로 너.

너답다.

 

 

 

 

우린 한때 누군가의 추억 속에 있었어.

청소 시간 대걸레를 빨기 위해 교실로 날랐던 우리 반 양동이

"같이 들어."하며

손을 내민 남자친구와 함께 잡았던 너무나 따뜻했던 손잡이


자식 넷 키우며 열심히 만들어주고 고쳐주느라 끊이지 않았던 아빠의 망치질 소리


추억을 가득 담고 선 너는 지금 혼자구나

언덕 위에서 흐드러지게 핀 꽃들을 보며 추억을 그리워하겠구나


함께 했던 그때의 추억이 그리워질 때마다

꽃향기를 날려보내구나

오늘 내가 맡은 꽃향기,

네가 그립다고 나에게 전해 준

엽서 한 장이었구나.

 

 

우리에겐 고철은 더이상은 쓸 수 없는,

고물상에 주고 잔돈 몇 푼 받을 수 있는,

있으면 골치 아프고

없으면 속이 후련한

그런 존재이다.


고철이 주는 차갑고 딱딱한, 그리고 녹이 슨 지저분함이

마치 쌀 가마니의 단조로운 꼬임을 배경으로 하여

선과 색 그리고 마치 그림자를 표현하듯 그려낸 그림을 만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따스함을 전달해 준다.


어디선가 본 것만 같은 철조각들이 형상을 이루고 있는 책표지에서 한 번 눈길이 멈추고,

첫장을 넘기는 순간, 다음 책장으로 향하는 손길이 멈췄다.

가느다란 실이 둥글게 말린 듯 가면서도 엉키지 않고 나아가는 선의 진행과 함께 쓰인 글이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우리 모두는 한때 어린이였습니다.

세상 모든 어린이들이

그 사실을 잊지 않고 자라기를 바랍니다

나도 어린이였다. 그리고 난 여전히 어린이다.

처음 본 것에 놀라워하고, 두려움을 느끼며, 맛있는 걸 보면 눈치보며 얼른 맛보고 싶고,

좋은 건 내가 먼저 갖고 싶은 욕심도 생기고, 가끔은 말도 안 되는 개그에 빵 터져 웃음 폭탄이 날리기 때문이다.

나를 아직 어린이로 받아주며, 철부지 나의 행동을 인정해주는 작가의 말에 

어른인 척하며 살았던 나의 마음에 깊은 위로를 받았다.  

 

세월을 이겨내지 못하고 녹이 슬어버린 그들이

본래의 쓰임을 잃고 새로운 모습을 태어난 공구들을 만나며

작가의 창의적 발상이 놀라우면서도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했었는지,

자신을 희생하며 뿌듯함으로 얼마나 당당했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삽이 물고기 되어 바위에 쉬어가기를 하고, 펜치가 새가 되어 하늘을 날고, 그물이 배의 돛이 되어 항해를 시작하는 등

다양한 모습으로 재탄생하는 모습을 보면서 처음엔 기발한 상상력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두 번 세 번 반복하면서

새롭게 탄생한 자신의 모습을 그들은 반가워할까? 만족할까?

그리고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해 달려온 그들이 그들의 자리를 빼앗기고 뒤로 물러났을 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나의 기억 속에 있었던 그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코 버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작가의 손에 의해서, 우리의 눈과 가슴을 통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또 다른 모습으로 당당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누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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