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치미 떼듯 생을 사랑하는 당신에게
고정순 지음 / 길벗어린이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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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거리에 도서관이 있어서 좋아요.

사람들의 문장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아요.

사람들의 문자를 만날 수 있어서,

내가 아직 쓰는 사람으로 살 수 있어서.

『시치미 떼듯 생을 사랑하는 당신에게』 100쪽



나의 마음에 '고정순' 이라는 이름 석자를 새기게 한 그림책은, 「철사 코끼리 」와 「코끼리 아저씨는 코가 손이래」를 읽은 후이다. 우연하게 코끼리가 주인공인 두 그림책을 통해 작가님이 가진 내면의 깊이와 주변을 살피는 마음의 눈이 얼마나 따듯한지 느낄 수 있었다.


그림책에서 청소년 소설, 에세이, 만화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활동의 폭을 확장해가는 모습에서 작가님의 도전과 즐기며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는 것 같아 이번에 신간으로 발표된 에세이 『시치미 떼듯 생을 사랑하는 당신에게』가 더욱 깊이있고 따듯하게 다가온다.


『시치미 떼듯 생을 사랑하는 당신에게』는 「3초 다이빙」의 저자 정진호 작가님과 주고 받은 편지를 모아 '에세이'라는 그릇에 고이 담아낸 작품이다. 작가들의 편지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작가들이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작가들의 매일 매일은 어떨까, 하는 궁금증으로 에세이를 펼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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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스트 고정순 작가는, 우리가 스쳐 지나는 일상에서 겪어내는 많고 많은 이야기 중 24개의 주제를 선택해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성으로 스스로의 삶을 솔직하고 대담하게 표현하고 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가만히 파고들어 어느 순간 파동을 휘몰아치기도 하고, 잔잔함이 어느 순간 웃음으로 승화시키고 마는, 또 다른 매력으로 독자 스스로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는 계기를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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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순 작가님이 정진호 작가님과 나눈 편지글이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자신의 과거를 걸러내지 않고 솔직하게 쓰여 있다. 우리는 때로는 자신을 꽤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나만의 가면'을 쓰기도 하고, 씌워지기를 바라기도 한데, 『시치미 떼듯 생을 사랑하는 당신에게』는 마치 이웃집 언니가 지나온 시간을 이야기해 주듯 툭 던져 놓는다. 언니의 툭 던짐을 건져 담아내는 것이 나의 몫이듯, 고정순 작가님의 툭 던짐은 정진호 작가님을 거쳐 독자에게 고이 담겨 왔다.

가벼울 듯 시작한 것이 결코 가볍지 않고, 묵직할 법한 것이 가벼운 에피소드로 넘겨지는 이야기들을 만나면서 우리의 삶을 보는 듯 했다. 우리의 삶 또한 가벼운 듯 가볍지 않고, 묵직해서 굴 속을 파고들 것 같다가도 금세 세상 밖으로 미소를 답을 보내기도 하는, 우리의 삶과 똑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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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치미 떼듯 생을 사랑하는 당신에게』를 통해 고정순 작가를 따라 슈퍼로 어린이집으로 우체국으로 영화관으로 따라다니면서 나도 모르게 '글을 쓰고 싶다',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나를 감싸안는다.

특별한 무엇을 봐서도, 특별한 어디를 가서도, 특별한 무언가를 해서도 아닌, 특별할 그 무엇도 없는 순간의 이야기가 나의 삶이고 나의 시간이며 나의 이야기가 된다.

나의 이야기는 '나'를 통해서만 담아낼 수 있는 것.

쓰고 싶다. 나의 이야기를.

솔직하고 간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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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햇볕과 바람 그리고 달과 별을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만질 수도 없고 정확한 생김도 알 수 없는데 말이에요. 그것들을 그릴 수 있다고 믿는 이유는 똑똑히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제대로 보고 싶어서, 선명하게 느끼고 싶어서 제멋대로 상상하고, 마음껏 그려 보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 봄밤의 알전구 중에서. 12~13

둘이 나눠 먹는 아이스바가 있는데, 혹시 아나요?

그 아이스바를 부주의하게 쪼개면 한쪽만 양이 많아져요. 난 큰 쪽 아이스바를 냉큼 먹어 버리는 그런 사랑이 하고 싶어요. 기껏 아이스바 하나로 느낄 수 있는 다정한 무례를, 나도 상대도 살피지 않는 가식 없는 상태를,

이런 걸 사랑이라고 믿다니. 고양이처럼 가르릉 웃고 싶네요.

- 바람돌이 선물 중에서. 21

그림책이 둥글다면 그 원 안에 들기 위해 가까스로 깨금발로 서 있던 나였는데, 이제 밖으로 밀려난다해도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낙화의 타이밍과가 착지의 모양을 상상해요. 왜 체조 경기 점수 중 착지 점수가 중요한지 이제 알겠어요. 시작만큼이나 중요한, 어쩌면 시작보다 더 어려울지 모르는 마지막을 위해 날마다 나는 부지런히 저물어 가고 있어요.

-새침한 시작 중에서. 37

사람들에게 보이는 글이 쌓여 갈수록 내 안에 창피도 단골 마트 포인트처럼 적립되고 있어요. 그래도 멈출 수가 없어요. 첫 산문집을 내고 날마다 조금씩 쓰는 근육이 발달해요. 이건 잘 쓴다는 말이 결코 아니란 걸 정 작가는 알 거예요. 날마다 조금씩 늘려 가는 생활의 근육이 없다면 우리의 이야기는 허약한 외피만 남는다는 사실을 말이죠. -쌉쌀한 공범 중에서. 60

여름이 오면 슬리퍼 질질 끌고 편의점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맥주 한 캔 마시면서 내 휴대폰 플레이 리스트에 있는 유행가를 들을 거예요. 이 시시한 결심을 하는 이유는 소소한 일상이 자꾸 도둑맞는 기분이 들어서랍니다.나는 한 번 뿐인 마흔일곱의 여름을 흔하디 흔한 일상으로 가득 채우고 싶어요.

모쪼록 지치지 않는 여름 보내시길

- 여름의 바이올린 중에서. 77

나는 오늘도 '보이는 나'를 생각해요. 한 발 내딛으면 가식이 될 수도 있는, 어쩔 수 없는 또 다른 나.

-유리 가면 중에서. 147

얼마 전 아는 작가님이 메신저로 "그림책 세상에 있어 주세요."라는 메시지를 남기셨어요. 능력으로 되는 일이라면 노력하고 싶고, 재능으로 되는 일이라면 슬플 것 같아요. 내게 남은 이야기 주머니의 수를 세면서, 동료 작가에게 툴툴 대면서, 가끔은 닻을 내린 달처럼 쉬어 가면서 그림책 세상에 있고 싶어요.

우리 함께 이곳에서 오래오래 놀아요.

철들기 싫은 띠동갑내기 친구가.

- 닻을 내리는 달 중에서. 16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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