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타계 10주기 헌정 개정판 소설로 그린 자화상 (개정판) 2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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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박완서 작가는 참 예뻤다. 그가 쓴 책을 읽기 전에 우연히 본 신문 기사를 통해 본 그녀의 쑥스러운 듯 맑게 웃는 모습이 너무나 예뻐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작가가 이렇게 예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그 다음부터 그의 책이 궁금해졌다. 예쁜 그가 쓴 글은 또 얼마나 예쁠까.

 

그의 글은 예쁘다. 솔직하다. 그리고 담백하다. 미사여구로 꾸미지 않았는데 읽다 보면 예쁜 구석이 눈에 띄고, 눈물을 쏟았다고 하지 않았은데 나는 가슴이 메어져 눈물이 난다. 박완서는 나에게 참 예쁜 사람이고, 건강하고 고운 선의 글을 쓴 작가이다.

 

그의 타계 10주년을 맞아 다시 읽게 된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한국 전쟁의 시대를 살아간 스무살의 '나'가 써 내려가는 이야기이다. 잠시 잊고 있던 그의 글을 다시 만나게 된다는 기쁨과 설렘,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에 집중해서 책장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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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빠는 다리에 총을 맞아 방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오빠의 아내, '나'에게 올케는 총구멍에 심을 갈아끼우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먹을 것 없는 공간 속에서 세상의 변화에 굴복해서 살아가는 한 가정이 '전쟁'의 시대를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낸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그 동안 접했던 다양한 전쟁의 모습과는 다르게 다가온다.

 

누구도 모르게 조용히 살아가야만 했던 '나'의 가족은, 조금씩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가족들을 굶길 수 없다는 단 한 가지의 이유로. 올케와 '나'는 피난을 떠난 이웃들의 집을 털어내기 시작하면서 전쟁이라는 시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찾게 되고, 인민위원회에 출근하게 되면서 가족의 시간과 나라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이놈의 나라가 정녕 무서웠다. 그들이 치가 떨리게 무서운 건 강력한 독재 때문도 막강한 인민군대 때문도 아니었다. 어떻게 그렇게 완벽하고 천연덕스럽게 시치미를 뗄 수 있느냐 말이다. 인간은 먹어야 산다는 만고의 진리에 대해. 시민들이 당면한 굶주림의 공포 앞에 양식 대신 예술을 들이대며 즐기기를 강요하는 그들이 어찌 무섭지 않으랴. 차리리 독을 들이댔던들 그보다는 덜 무서울 것 같았다. 65~66쪽

 

지금은 돌아가신 할머니는 어린 나에게 전쟁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빨갱이'로 오해받아 지금의 삶은 없었을 거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굽이굽이 깊은 산골에 살았던 할머니, 마당에서 놀고 있던 아빠와 고모에게 어느 날 낯선 군인들이 찾아와 엄마를 찾아와 밥상을 차려달라고 했단다. 할머니는 길 잃은 군인들이라 생각하고 푸짐하게 차려주었다고. 워낙 시골이라 전쟁이 난지도 몰랐고 피난도 몰랐다는, 그 때는 할머니 말이 거짓말이라고 여겼는데, 올케와 '나'의 안식처가 되어준 교하마을을 만나면서, 전쟁 속에서도 사람으로 살아간 공간이 있다는 것이 그리 반가울 수가 없다.

 

'나'의 가족은 길을 떠나고 다시 만나고, 다시 떠나고 만나는 상황 속에서 오빠는 힘든 여정을 끝내고 가족들은 누구도 울지 않은 채, 오래도록 가족의 중심이었고 짐이기도 했던 오빠를 떠나보낸다. '나'는 오빠를 하루만에 매장했단 죄의식에 오래도록 가슴 아파하면서도 살아가기 위해 버둥거린다. 근숙 언니의 도움으로 미군 피엑스에 취직하게 된 '나'는 서울대학교 학생이라는 이유로 들어간 '나'는, 그들의 곁에서 자신의 학벌이 얼마나 쓸모없는 것인지 현실을 직시하게 되고, 살아나기 위해서는 버릴 것에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함도 배운다. '나'와 "박수근" 화가와의 만남은, '나'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잃지 말라는 무언의 조언을 남긴다. '나'의 삶 속에 찾아온 가는 햇살이 아니었을까.

 

 

목련나무였다. 아직은 단단한 겉껍질이 부드러워 보일 정도의 변화였지만 이 나무가 봄기운만 느꼈다 하면 얼마나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오르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미친 듯한 개화를 보지 않아도 본 듯하면서 나도 모르게 어머, 얘기 미쳤나봐, 하는 비명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실은 나무를 의인화한 게 아니라 내가 나무가 된 거였다. 내가 나무가 되어 긴긴 겨울잠에서 눈뜨면서 바라본, 너무나 참혹한 인간이 저지른 미친 짓에 대한 경악의 소리였다. 99쪽

 

 

약 15년 전 나는,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보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먼저 읽었다. 두 권이 서로 연결된 책이라는 것도 모른 채 신간 소개를 보고 부랴부랴 읽었던 나였다. 손 때와 먼지로 내 책장 한 켠에 자리한 책이 '박완서 타계 10주년' 을 기리며 새롭게 옷을 입고 출판되어 반가움과 함께 '박완서'의 웃음과 지금의 글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이 현실로 다가오면서 가슴에 작은 구멍이 하나 생긴 듯하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스무살의 '나'와 스물 두살의 '나'의 이야기를 담아낸 자전적 이야기다. 피가 난무하고 총칼이 오가던 그 동안의 전쟁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전쟁의 이야기는 '나'를 중심으로 한 가족이 전쟁의 시련을 맞아 쓰러지고, 일어서고, 무너지고, 애태우는 과정을 담담하게 소리내어 말한다. 철없게만 보였던 '나'가 서서히 일어서는 모습에서 희망을 읽을 수 있었고, 여전히 휘둘리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의 이십대 그리고 지금의 우리를 만날 수 있다.

 


근숙이 언니는 취직시켜 준 김에 내 눈치 보지 않고 말을 막 했다. 난 그게 조금도 싫지 않았다. 걱정도 됐지만 전혀 단 세상으로 발을 들여놓은 것처럼 마음이 설레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제 그림자 노릇은 지긋지긋했다. 엄마는 외아들을 잃었으니 앞으로 무슨 낙을 바랄 것이며, 올케 또한 과부가 되고 말았으니 죽지 못해 사는 게 가장 잘 어울리겠지만, 나에겐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엄마와 올케에 동조한 의무 기간은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주 오래간만에 내 안에서 삶의 의욕이 쾌적하게 기지개를 켜는 걸 확실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것 같아도 난 이제 겨우 스물한살이었다. 미치게 젊은 나이였다. 225~226쪽

 

전쟁은, 미움을 키우고 서로를 등 돌리게 하며 마음까지 갉아내는 시간을 안겨준다. 그 속에서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게 되었던 이들의 이야기가 '나'의 눈을 통해 읽게 된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그 때 그 시간을 이겨낸 많은 이들의 고됨을 대신한다. 스무살의 어린 '나'가 지켜낸 가족 그리고 새로운 가족을 일구기 위한 선택, 그들의 이야기를 다시 읽게 된 나는, 이제서야 그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고 힘겹고 치열했을지 조금이나마 가늠해본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저의 솔직하고 주관적인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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