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입자들
정혁용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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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소개에서 만난 『침입자들』 은 제목이 주는 무게감에 살짝 흔들렸다. 누군가에게 다가간 침입자 그리고 그 침입을 받아야만 하는 누군가, 그들의 관계는 무엇이고, 그들이 각각 맡은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소개글을 살펴보게 되었다.

"택배·인생·행운동·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긴장감·하드보일드 소설" 로 소개된 글을 보면서 궁금증은 호기심으로 변해갔고, 너무나 낯설게 들려오는 '하드보일드'라는 소설 장르에 대한, 나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도전 의식이 일었다. 책장을 펴기 전, 미리 '하드보일드'라는 장르에 대해 의미를 바르게 알고 읽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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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동'이란 불리는 중년의 남자는 목적없이 터미널에 내려 구인 광고 중에 숙소 제공이라는 글 한 줄에 솔깃하여 택배 일을 시작한다.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되고, 인간 관계를 맺지 않아도 되는,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일자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달한 만큼 벌어가는 벌이도 꽤 괜찮은 편이다. 그가 맡은 구역은 행운동. 이름대신 그렇게 불리기 시작한다.

마흔이 넘었다는 이 남자의 일상을 따라간다. 내가 걸어가보지 못한, 내가 알지 못한 마흔이라는 나이를 쫓으면서 행운동이란 사내의 생각에 자꾸만 감동을 하게 된다. 대단한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엄청난 배포를 가진 것도 아니다. 다만 그는 잘 들어준다. 그리고 시기적절하게 칠 땐 과감하고 냉철하게 치고, 빠질 땐 말없이 묵묵히 자신의 자리만을 지킨다. 나이가 주는 여유로움도 있겠지만, 나를 보면 나이는아닌 것 같고, 지나온 삶이 그에게 준 용기와 물러섬을 안겨준 거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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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동 사내는 조용하게 살고 싶었던, 혼자만의 생활을 누리고 싶었던 그림자같은삶에 다양한 빛을 쏘아대는 침입자들이 생겨난다.

가방줄 짧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말하는 것이 마냥 좋은 주창이와 고된 삶 속에서 사랑을 꿈꾸는 청림, 우울증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는 춘자라는 아가씨와 손 씻을 물과 보디가드를 대동하고 다니는 동네 바보천재 마이클, 시간 맞춰 택배를 가져다주면 팁을 준다는 게이바의 그녀들과 폐지줍는 꽃다운 이십대 아가씨 마스크 그리고 노망든 열정 교수 할아버지와 손녀까지.

행운동이란 삶의 시간 속으로 과감하게 들어온 이들은 서로의 삶 속에 얽혀 있는 매듭을 그의 손을 빌어 풀려고 한다. 아주 과감하고도 욕심많은 침입자들이다.

"하지만 이 말은 해두는 게 좋겠군요."

여자가 반쯤 열려 있는 창문을 오른쪽 검지로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전 당신을 죽이려고 했어요."

[중략]

하지만 죽음이란 단어만은 잔상에 남았다. 죽음이라…….

마틴 쿠르즈 스미스는 《레드 스퀘어》에서 가장 비참한 죽음에 대해 이렇게 썼다.

'아무도 내가 죽어간다는 사실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아는 채로 죽어가는 것', 이라고. 비참한 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그런 죽음을 맞을 것 같긴 했다. 언제일지는 몰라도 말이다.

38~39쪽

 

행운동 사내는 항상 진지하다. 그의 말에는 가시도 있고 진실도 있고 농담도 있다. 그는 재미없는 사람이고, 이미 그런 사람으로 살아왔다는 정도로 자신의 존재를 내려놓는다. 그것이 그의 매력이라고 말들 하지만, 말을 아끼는 그에게서도 꽤 긴 말을 늘어놓는 그에게서도 꽤 깊은 상처가 느껴져 그의 삶에 더욱 집중하게 한다.

죽은 남편을 잊기 위해 돈으로 시간을 사는 춘자와 마약 중독 아버지로 힘겨움을 안고 살아가는 마스크, 수학 천재에서 동네 바보의 삶을 살아가는 마이클과 그를 끝내 포기 못하는 교수 할아버지, 3년을 병상에 누워 계신 지게꾼 아버지와 병간호를 위해 택배일을 선택했다는 남현동, 그들이 꿈꾸던 삶은 무엇이었을까? 행운동이란 사내의 시간 속에 더불어 살게 된 그들과 그들의 삶에 짧은 흔적을 남긴 행운동이란 사내란 존재는 무엇으로 연결되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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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입자들』 은 서로의 삶을 굳건히 지키는 사람들의 하루살이를 담고 있다. 삶이 힘겨운 이·삶이 버거운 이·삶이 무거운 이·삶이 무의미한 이까지 다양한 삶 속에 놓여진 이들이 '행운동'이란 사내의 침입자가 된다. 그리고 그들의 삶에 '행운동'이란 사내의 침입자가 나타난다. 서로의 삶에 일어난 변화의 이야기를 담담하고도 울컥하게, 피식 웃음이 나는가 하면 짠해서 마음이 쓰리게 하는, 객관적이고도 감정을 자제한 문체들이 '하드보일드' 라는 스타일을 정확하게 집어준다.

행운동 사내는 침입자들과의 대화 중에 그동안 읽어왔던 책들의 한 구절을 읊는다. 대화든 독백이든. 그가 소개한 많은 책과 글귀는 독자에게 또 다른 자극이 되어주고, 또 다른 생각으로 파장을 일으킨 채 그대로 넘겨준다. 책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덮는 마지막 순간까지 잠깐도 놓칠 수 없는, 한 자리에서 읽고 한 자리에서 멈춘 듯 멍하게 만드는, 꽤 오랜만에 느껴본 완독의 희열감을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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