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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프 2
캐서린 스토켓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평점 :
이 책에 대해서는 처음 나왔을 때부터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굳이 사 볼 생각은 못 했었다. 이후 영화로 나왔고 영화도 많은 이들에게 호평을 받았단 얘기를 들었지만 역시 굳이 볼 생각은 못 했었다. 그러다가 지난 주, Hidden Figures를 보다가 그 곳에 나온 주인공들에게 관심이 생겼다. 그들의 필모를 찾아보다 보니 그들 중 한 명이 이 영화에 나왔다고 되어있었다. 그래서 영화를 봤다. 줄거리 외에는 아무 정보 없이 보게 된 영화였는데 주요 등장인물로 나온 배우들이 모두 약방의 감초처럼 여기저기서 감칠나게 연기를 해내던 사람들이었고, 그들을 바로 알아본 나는 정말 기쁘게 영화에 빠져들었다. 생각 외로 잘 만든 영화였고, 그 영화에 대한 평을 다시 찾아 읽자니 소설이 더 좋다는 글들에 책도 주문해서 읽게 되었다.
읽다보니 영화에는 미처 다 담지 못 했던 내용들이 책에 더 나와있었고, 책에서는 주인공들이 흑인가정부들 쪽에 더 초점이 맞춰져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화에서 봤던 배우들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더 마음 따뜻하게 친근하게 다가온 이는, 소설 속의 소설인 가정부를 실제로 집필한 아이빌린이었다. 잠든 어린 아들 옆에서 스탠드를 켜고 읽다가 마지막 장을 덮으며 미시시피주가 어디인가 생각해봤다.
잊고 있었던 미시시피, 뉴올리안즈의 습기찬 여름, 그 더위. 지열에 바로 녹아내릴 것 같은 그 뜨거운 여름날 3주, 잊고 있었다. 나는 1998년 여름 그 곳에 있는 로욜라 대학이란 곳에서 3주를 보냈었다. 기숙사에 방을 신청하고 대학원생들 숙소이기에 방은 각자 따로 쓰되 샤워실과 거실을 공유하는 일종의 아파트 형태의 숙소를 다른 여학생 3명 포함 총 4명이 함께 쓰기로 한다는 것만 알고 트렁크를 끌고 찾아갔던 그 곳의 첫 인상은 내게는 너무나 힘든 느낌이었다. 아는 이도 알고싶은 이도 아무도 없는 그 곳에 제일 처음 도착한 사람은 나였고, 배정받은 방에 들어가서 그 황량한 방 풍경에 트렁크를 옆에 놓고 혼자 얼굴이 허옇게 질려서 침대 위에 그냥 잠시동안 아무 말 못 하고 홀로 앉아있었던 것은 기억한다. 그 후 얼추 짐정리를 끝냈을 때쯤 방 밖에서 들린 새로 도착한 룸메이트의 소리에, 내 딴에는 익숙하지 않은 그 곳에서 얼른 누군가와 알고 지내고픈 마음에 최선을 다해 문을 열고나가 반갑게 인사했더랬다. 그렇게 처음 용기를 내어 마주한 아이가 반갑게 인사받으며 돌아선 순간 내 얼굴을 보고(그러니까 내 인종을 보고) 바로 굳이 감추려도 하지 않았던 헉?하는 소리에서 느낀 그 아이의 놀라움과 실망감. 그리고 이름을 묻는 내게 좀 전의 반가운 인사목소리와는 다르게 냉랭하게 누구라고 얘기했던 모습. 거기에서 충격받고 내 용기는 다시 자라가 목을 집어넣듯 껍데기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그 뒤에 새로 더 온 2명의 백인여학생들은 모두 상냥하고 친절하고 편견도 없어보였지만.. 이미 내 입장에서는 더 이상 다가갈 이들이 아니게 되었다. 그 원인이 되었던 첫번째 아이도 그 이유를 분명 알았을 것이고 굳이 미안해하지도 않고 있음을 역시 나도 알고 있었다. 거기까지 회상이 되고나니 문득, 그 첫번째 아이는 분명 남부 어느 지역 출신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나머지 2명 중 한 명은 나더러 시카고에서 왔다고 했었고 또 한 명은 별로 말은 안 해봤지만 대도시까지는 아니라도 그렇게 인종차별이 만연한 지역출신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떠나는 날, 공항으로 태워다 줄 택시를 부르고 트렁크를 끌고나와 기숙사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그제서야) 처음 본 제복을 입은 젊은 흑인여성 청소부. 그런 그녀가 내게 처음으로 걸어온 말, 너 여기 떠나는구나? 나도 떠나고 싶은데.. 난 못 가. 하고 멀리 바라본 그 눈길 속에서 나도 역시 멀리서 피어오르는 아지랭이를 바라보며 순진하게 속으로 되물었던 질문들.. 왜 못 떠나? 너희 나라는 이렇게 넓은데..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때 그 질문을 내가 입 밖에 내지 않았던 것이 얼마나 잘한 일이었는가를. 낯선 곳에 홀로 떨어진 충격과 외로움으로 매번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들을 입 안에서 씹어삼키며 본의 아니게 과묵했던 그 시절의 내가 그 때 혹 그 질문을 입 밖에 냈더라면 그녀에게 많은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때는 몰랐던 것을 이 나이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다는 것, 그것만큼 큰 축복과 자유가 없음을.
이 책은 소설이다. 배경은 1964년, 미시시피주 어느 가공의 작은 시골 마을, 잭슨 카운티. 하지만 그 안에 흘러내리는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과 혐오감은 그로부터 34년이 지난 현실 속의 미시시피주의 대도시, 1998년의 뉴 올리안즈에서는 여전히 끈끈히 살아남아 있었음을, 그로부터 다시 20년이 지난 2017년의 오늘 소설 한 권을 덮고나서야 깨달았다. 책에서 나온 힐리와 엘리자베스, 미나와 아이빌린을 난 20년 전 이미 뉴 올리안즈에서 만났었다. 그리고 나도 잠시 그들의 입장에서 당혹감을 느껴봤었다. 그 때는 그것이 무엇인지 자세히 알아 볼 기회도 없이 그대로 뭔지 모를 그래서 다시 들춰 볼 이유도 없는 기억의 파편으로 내 안에 흩어져있었다는 것도 이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은 뒤 곰곰히 생각하다가 깨닫게 된 것이다.
이상한 건, 내가 거기서 보냈던 그 3주란 시간을 정말 내 기억 속 어딘가에 완벽히 봉인해두고 있었다는 점이다. 창 밖의 기온과 창 안의 기온의 높은 차이로 창문은 습기가 거의 물처럼 타고 흘러내려서 마치 누군가가 호스로 창에 대고 물줄기를 틀어대는 것 같은 느낌에 낮에는 창 밖이 아예 안 보였던 곳. 더위에 지쳐서 흐느적대며 혹 허클베리 핀의 흔적이라도 찾아볼까 하고 주말에 나가본 시내에서 마주한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중절모를 쓰고 더위에 지쳐 퍼져있는 사람들과 저녁에 오픈 할 술집에서 한참 연습 중인 재즈음악 뿐이었다. 거기서 본 나폴레옹의 데드 마스크, 그리고 마크 트웨인을 팔아서 띄워놓은 미시시피강 위의 큰 유람선. 그 모든 파편들은 조각조각 기억하면서 정작 내가 어느 해 여름 그 곳에 왜 있었는지, 그리고 그 때 내가 머물렀던 로욜라 대학의 기숙사에서 부딪히고 스쳐갔던 인연들에 대해서는 정말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단 3주 만으로도 나도 모르게 거기에 대해 그렇게까지 봉인을 해야만 했을까. 그런데 떠나는 날 아침, 얼굴 가득히 부러움을 담고 "넌 떠나는구나? 하루도 더 있기 싫은 거지? 나도 그래.." 하며 멀리 바라보던 그 젊은 검은 얼굴이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나니 말릴 새도 없이 내 기억 속에서 또렷이 되살아나다니..
이제서야 그 때 그녀의 말을 들으며 간단히 응..하고 고개만 주억거릴 것이 아니라 한 마디 물어봤으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내가 그 때 너무 지치고 힘들고 슬픈 상태가 아니었다면, 그녀의 이름을 묻고 손이라도 한 번 잡고 인사를 했으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내가 너무 아프고 힘들어 주변을 돌아볼 기운이 없었을 때 스쳤던 사람들, 그리고 나를 스치고 지나갔던 그 시선들, 그 모든 것이 이 책 안의 주인공들이 현실에 걸어나왔던 모습들이란 것을 그 때 이미 알았다면. 그 때 그 손을 한 번 잡고 우리 그래도 같이 기운내자고 했었을 수 있었을 것 같다. 이제 나는 10여 년 전에 되돌아온 내 고향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내 원래 가족과 친구들 틈 속에 섞여서 또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누구에게 차별이란 것을 받아본 적도 해본 적도 없는 연 하며 살아간다. 내가 그러하듯, 그녀는 그녀의 고향에서 그렇게 자신의 가족과 또 어쩌면 꾸렸을 새로운 가족과 함께 그렇게 별 일 없이 살아가고 있을까.
언제고 한 번쯤은 다시 가봐야할 곳 같다, 뉴 올리안즈는. 그 때는 그런 환경과 인간관계에 무지했기에 모르고 넘겼던 그 시절이 21세기가 된 지금도 여전한지 꼭 확인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젊은 시절의 얼굴로만 기억에 남은 그녀가 20년을 통해 어떻게 변했든, 그녀의 소망대로 그 곳을 떠났기를 바란다. 아니라면 그녀가 원했기에 그 곳에 정착했기를 바란다. 어차피 20년 전의 그녀를 내가 알아볼 일은 없다, 그녀의 이름도 모른다. 그녀 역시 나를 알아볼 일은 없다, 우린 20년 전 더운 여름날 그 허허벌판같은 곳에 덩그라니 서있던 기숙사 정문 앞에서 더위에 힘들어하며 택시를 기다리는 때에 2,3분 스쳐간 인연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혹 내가 다시 찾아간 그 곳에서 그녀와 비슷한 얼굴의 청년이 보인다면 나도 모르게 그 청년의 표정을 살피게 될 것 같다. 그리고 그 청년의 표정이 밝고 자신감에 차있지 않다면 내 마음이 헛헛할 것 같아서 그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