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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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 네스뵈의 작품은 이것이 처음인가? 아마도 그런 것 같다.  한 번도 가보지 못 한 추운 북쪽의 나라에서 제대로 발음하기도 힘든 인물들이 활약하는 소설은 선뜻 손이 안 가게 되어 있다.  하긴 그건 이미 저자의 이름부터 그렇지만..

 

이 책의 존재를 접한 것은 다른 정보를 통해서였다.  작년에 이어 또 한 번의 대단한 폭염이 예상되는 여름의 초입 무렵, 휴가계획을 돕기 위해 사방에서 쏟아져나오기 시작한 정보의 홍수들 중에는 여행지에 대한 내용 뿐 아니라 여름날의 무더위를 조금이나마 식혀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제시하는 책들도 끼어있었다.  당연히 그런 책들의 주된 장르는 미스테리물이나 추리물.  추리물일 경우에도 보통은 심리전이 대단한 납량특집급.  이 책은 그 중 하나로 거론되었던 저서다. - 그런데 다 읽고난 지금으로서는 이 책의 장르를 뭐라고 정할 수 있을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드보일드 형사물이라고 하기엔 주인공이 형사도 아니고.  하지만 경찰들이 내용 전개상 주된 인물들로 나오기는 한다.   

 

"소년"이라고 지칭되며 나타난 주인공은 사실 이미 더 이상 소년의 나이는 아닌 인물이다.  하지만 저자는 대단히 흡입력이 강한 필력으로 빠른 전개를 통해 이 "소년"이 어떻게 소년일 때 이 곳으로(그러니 나락으로) 굴러떨어질 수 밖에 없었는지를 쏟아내간다.  일방적으로 휘몰아치는 소년의 과거는 갑작스러운 계기로 소년의 각성과 미래로 뻗어나간다.  그리고 시작된다, 소년의 연민에 찬 복수가.  알고보면 정의를 위한 복수도 아니다, 어차피 이 책에 나오는 그 어떤 인물도 정의로운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어쩌다 한 두명 있을까? 하지만 그들도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아직까지 타락할 기회를 가져보지 못 한 잔챙이거나 젊음으로 인해 아직 어둠의 제안을 받아보지 못 했을 뿐이다.  읽으면서 내내 섬뜩하게 느낀 부분이 바로 그 부분이었다, 권력의 부패.  권력과 금력의 조화로 싹튼 부패에서 피어난 어둠이 점차 그 밝음을 덮어가는 구조.  그러한 구조가 시각적으로 생생하게 그려진 만화가 바로, 어렸을 때는 그렇게 싫어했던 배트맨의 고담시티라는 엄연한 사실. 그리고 그 사실은 인류가 권력이란 것을 만들어낸 이후로 단 한 번도 없어진 적도 앞으로도 없어질 예정이 없다는 당연하나 그렇기에 슬픈 진실.  그 진실이 이 소설의 배경에 가장 중요한 파편이기 때문이었다.

 

소설을 읽다보면 의적 임꺽정도 아니고 그렇다고 슈퍼맨도 아니지만 적절하게 복수의 칼날을 휘두르며 감춰진 진실을 향해 다가가는 소년을 따라서 같이 궁금해진다, 이 소설 내의 도시 오슬로에서는 누가 그 어둠의 싹을 틔웠고 키워가고 있는 인물들인지.  그리고 누가 그 배신자였는지를.  소년의 원래 목표는 그 자들에 대한 복수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끝에 가서 발견한 어떤 진실로 소년은 그 복수의 원동력을 잃고 포기하려고 한다.  그리고 바로 그 때 나타난 누군가가 어쩌다 보니 그 모든 복수의 마지막을 장식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읽는 도중에 나도 모르게 소년의 생명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기를 그리고 小惡에 비해 大惡을 저지른 자들이 제대로 된 응징을 받을 수 있기를 - 그러니까 그에 걸맞은 고통 속에 그 죄값을 치룰 수 있기를 - 응원 중인 것을 깨달았다.  소설을 읽으면서 그 주인공에 감정이입이 되기는 해봤어도 영화를 보는 느낌으로 그 주인공을 제3자 입장에서 응원해보는 감정은 참 오랜 만에 접해본 듯 하다.  보통은 잘 짜여진 플롯을 가진 추리물이나 미스테리물에서 느끼는 감정인데, 이 책을 읽으며 한 번도 가보지 못 한 도시의 풍광이 활자를 통해 머리 속에 생생히 그려지면서 오랜 만에 그런 느낌에 빠져들어봤다.  그래서인가, 마지막의 작은 반전이라고 할까..  로빈후드마냥 끝까지 마무리를 짓고 가는 한 건의 에필로그를 읽으며, 이 주인공이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부활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얼핏 생각해봤다.

 

아들..  아들이기에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며 성장했고, 아들이기에 아버지보다 더 커지기를 원한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는 영원히 소년이며 아버지는 아들에게 영원한 보호자요 라이벌일 수 밖에 없다.  그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이 아들이 선택한 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  하지만 아들의 상대들이 애시당초 그런 정의로운 잣대를 들이댈 가치나 있는 자들인가 생각해보면, 이런 "아들"이 우리 사회에도 좀 존재해주면 좋겠다는 헛된 바램을 살짝 가져보게 된다.  물론 그 방법은 실생활에서 접하기에는 참 많이 과격하지만.  여하튼, 이런 폭염이 몰려오기 전에 올해의 무더위를 예상했던 그래서 이 책을 여름휴가용으로 권했던 그(들)의 선택은 옳았다고 본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앉은 자리에서 다 읽고 일어났으니까.  자주 접하면 식상한 플롯이지만..  가끔은 읽을 만 하고 그 "가끔"이 여름이면 확실히 좋을 법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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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마마로 살아가기 - 아이 없는 삶을 선택한 그녀들을 위한 관계 심리학
가야마 리카 지음, 안혜은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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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참 바람직한 얘기. 난 아들이 있다, 따라서 이후 아들이 가정을 꾸릴 경우 상대여성이 누구일진 모른다. 하지만 그 가정에 아이가 없기로 했다면 적극 지지할 예정. 안 태어난 아이들보단 이미 태어나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 더 집중하고 사람들에 대해 더 신경쓰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 믿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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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프 2
캐서린 스토켓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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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해서는 처음 나왔을 때부터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굳이 사 볼 생각은 못 했었다.  이후 영화로 나왔고 영화도 많은 이들에게 호평을 받았단 얘기를 들었지만 역시 굳이 볼 생각은 못 했었다.  그러다가 지난 주, Hidden Figures를 보다가 그 곳에 나온 주인공들에게 관심이 생겼다.  그들의 필모를 찾아보다 보니 그들 중 한 명이 이 영화에 나왔다고 되어있었다.  그래서 영화를 봤다.  줄거리 외에는 아무 정보 없이 보게 된 영화였는데 주요 등장인물로 나온 배우들이 모두 약방의 감초처럼 여기저기서 감칠나게 연기를 해내던 사람들이었고, 그들을 바로 알아본 나는 정말 기쁘게 영화에 빠져들었다.  생각 외로 잘 만든 영화였고, 그 영화에 대한 평을 다시 찾아 읽자니 소설이 더 좋다는 글들에 책도 주문해서 읽게 되었다.

 

읽다보니 영화에는 미처 다 담지 못 했던 내용들이 책에 더 나와있었고, 책에서는 주인공들이 흑인가정부들 쪽에 더 초점이 맞춰져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화에서 봤던 배우들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더 마음 따뜻하게 친근하게 다가온 이는, 소설 속의 소설인 가정부를 실제로 집필한 아이빌린이었다.  잠든 어린 아들 옆에서 스탠드를 켜고 읽다가 마지막 장을 덮으며 미시시피주가 어디인가 생각해봤다.  

 

 

잊고 있었던 미시시피, 뉴올리안즈의 습기찬 여름, 그 더위. 지열에 바로 녹아내릴 것 같은 그 뜨거운 여름날 3주, 잊고 있었다.  나는 1998년 여름 그 곳에 있는 로욜라 대학이란 곳에서 3주를 보냈었다.  기숙사에 방을 신청하고 대학원생들 숙소이기에 방은 각자 따로 쓰되 샤워실과 거실을 공유하는 일종의 아파트 형태의 숙소를 다른 여학생 3명 포함 총 4명이 함께 쓰기로 한다는 것만 알고 트렁크를 끌고 찾아갔던 그 곳의 첫 인상은 내게는 너무나 힘든 느낌이었다.  아는 이도 알고싶은 이도 아무도 없는 그 곳에 제일 처음 도착한 사람은 나였고, 배정받은 방에 들어가서 그 황량한 방 풍경에 트렁크를 옆에 놓고 혼자 얼굴이 허옇게 질려서 침대 위에 그냥 잠시동안 아무 말 못 하고 홀로 앉아있었던 것은 기억한다.  그 후 얼추 짐정리를 끝냈을 때쯤 방 밖에서 들린 새로 도착한 룸메이트의 소리에, 내 딴에는 익숙하지 않은 그 곳에서 얼른 누군가와 알고 지내고픈 마음에 최선을 다해 문을 열고나가 반갑게 인사했더랬다.  그렇게 처음 용기를 내어 마주한 아이가 반갑게 인사받으며 돌아선 순간 내 얼굴을 보고(그러니까 내 인종을 보고) 바로 굳이 감추려도 하지 않았던 헉?하는 소리에서 느낀 그 아이의 놀라움과 실망감.  그리고 이름을 묻는 내게 좀 전의 반가운 인사목소리와는 다르게 냉랭하게 누구라고 얘기했던 모습.  거기에서 충격받고 내 용기는 다시 자라가 목을 집어넣듯 껍데기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그 뒤에 새로 더 온 2명의 백인여학생들은 모두 상냥하고 친절하고 편견도 없어보였지만..  이미 내 입장에서는 더 이상 다가갈 이들이 아니게 되었다.  그 원인이 되었던 첫번째 아이도 그 이유를 분명 알았을 것이고 굳이 미안해하지도 않고 있음을 역시 나도 알고 있었다.  거기까지 회상이 되고나니 문득, 그 첫번째 아이는 분명 남부 어느 지역 출신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나머지 2명 중 한 명은 나더러 시카고에서 왔다고 했었고 또 한 명은 별로 말은 안 해봤지만 대도시까지는 아니라도 그렇게 인종차별이 만연한 지역출신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떠나는 날, 공항으로 태워다 줄 택시를 부르고 트렁크를 끌고나와 기숙사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그제서야) 처음 본 제복을 입은 젊은 흑인여성 청소부.  그런 그녀가 내게 처음으로 걸어온 말, 너 여기 떠나는구나? 나도 떠나고 싶은데.. 난 못 가. 하고 멀리 바라본 그 눈길 속에서 나도 역시 멀리서 피어오르는 아지랭이를 바라보며 순진하게 속으로 되물었던 질문들.. 왜 못 떠나? 너희 나라는 이렇게 넓은데..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때 그 질문을 내가 입 밖에 내지 않았던 것이 얼마나 잘한 일이었는가를.  낯선 곳에 홀로 떨어진 충격과 외로움으로 매번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들을 입 안에서 씹어삼키며 본의 아니게 과묵했던 그 시절의 내가 그 때 혹 그 질문을 입 밖에 냈더라면 그녀에게 많은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때는 몰랐던 것을 이 나이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다는 것, 그것만큼 큰 축복과 자유가 없음을.

 

 

이 책은 소설이다.  배경은 1964년, 미시시피주 어느 가공의 작은 시골 마을, 잭슨 카운티.  하지만 그 안에 흘러내리는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과 혐오감은 그로부터 34년이 지난 현실 속의 미시시피주의 대도시, 1998년의 뉴 올리안즈에서는 여전히 끈끈히 살아남아 있었음을, 그로부터 다시 20년이 지난 2017년의 오늘 소설 한 권을 덮고나서야 깨달았다.  책에서 나온 힐리와 엘리자베스, 미나와 아이빌린을 난 20년 전 이미 뉴 올리안즈에서 만났었다.  그리고 나도 잠시 그들의 입장에서 당혹감을 느껴봤었다.  그 때는 그것이 무엇인지 자세히 알아 볼 기회도 없이 그대로 뭔지 모를 그래서 다시 들춰 볼 이유도 없는 기억의 파편으로 내 안에 흩어져있었다는 것도 이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은 뒤 곰곰히 생각하다가 깨닫게 된 것이다. 

 

 

이상한 건, 내가 거기서 보냈던 그 3주란 시간을 정말 내 기억 속 어딘가에 완벽히 봉인해두고 있었다는 점이다.  창 밖의 기온과 창 안의 기온의 높은 차이로 창문은 습기가 거의 물처럼 타고 흘러내려서 마치 누군가가 호스로 창에 대고 물줄기를 틀어대는 것 같은 느낌에 낮에는 창 밖이 아예 안 보였던 곳.  더위에 지쳐서 흐느적대며 혹 허클베리 핀의 흔적이라도 찾아볼까 하고 주말에 나가본 시내에서 마주한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중절모를 쓰고 더위에 지쳐 퍼져있는 사람들과 저녁에 오픈 할 술집에서 한참 연습 중인 재즈음악 뿐이었다.  거기서 본 나폴레옹의 데드 마스크, 그리고 마크 트웨인을 팔아서 띄워놓은 미시시피강 위의 큰 유람선.  그 모든 파편들은 조각조각 기억하면서 정작 내가 어느 해 여름 그 곳에 왜 있었는지, 그리고 그 때 내가 머물렀던 로욜라 대학의 기숙사에서 부딪히고 스쳐갔던 인연들에 대해서는 정말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단 3주 만으로도 나도 모르게 거기에 대해 그렇게까지 봉인을 해야만 했을까.  그런데 떠나는 날 아침, 얼굴 가득히 부러움을 담고 "넌 떠나는구나? 하루도 더 있기 싫은 거지? 나도 그래.." 하며 멀리 바라보던 그 젊은 검은 얼굴이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나니 말릴 새도 없이 내 기억 속에서 또렷이 되살아나다니.. 

 

 

이제서야 그 때 그녀의 말을 들으며 간단히 응..하고 고개만 주억거릴 것이 아니라 한 마디 물어봤으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내가 그 때 너무 지치고 힘들고 슬픈 상태가 아니었다면, 그녀의 이름을 묻고 손이라도 한 번 잡고 인사를 했으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내가 너무 아프고 힘들어 주변을 돌아볼 기운이 없었을 때 스쳤던 사람들, 그리고 나를 스치고 지나갔던 그 시선들, 그 모든 것이 이 책 안의 주인공들이 현실에 걸어나왔던 모습들이란 것을 그 때 이미 알았다면.  그 때 그 손을 한 번 잡고 우리 그래도 같이 기운내자고 했었을 수 있었을 것 같다.  이제 나는 10여 년 전에 되돌아온 내 고향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내 원래 가족과 친구들 틈 속에 섞여서 또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누구에게 차별이란 것을 받아본 적도 해본 적도 없는 연 하며 살아간다.  내가 그러하듯, 그녀는 그녀의 고향에서 그렇게 자신의 가족과 또 어쩌면 꾸렸을 새로운 가족과 함께 그렇게 별 일 없이 살아가고 있을까.  

 

 

언제고 한 번쯤은 다시 가봐야할 곳 같다, 뉴 올리안즈는.  그 때는 그런 환경과 인간관계에 무지했기에 모르고 넘겼던 그 시절이 21세기가 된 지금도 여전한지 꼭 확인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젊은 시절의 얼굴로만 기억에 남은 그녀가 20년을 통해 어떻게 변했든, 그녀의 소망대로 그 곳을 떠났기를 바란다.  아니라면 그녀가 원했기에 그 곳에 정착했기를 바란다.  어차피 20년 전의 그녀를 내가 알아볼 일은 없다, 그녀의 이름도 모른다.  그녀 역시 나를 알아볼 일은 없다, 우린 20년 전 더운 여름날 그 허허벌판같은 곳에 덩그라니 서있던 기숙사 정문 앞에서 더위에 힘들어하며 택시를 기다리는 때에 2,3분 스쳐간 인연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혹 내가 다시 찾아간 그 곳에서 그녀와 비슷한 얼굴의 청년이 보인다면 나도 모르게 그 청년의 표정을 살피게 될 것 같다.  그리고 그 청년의 표정이 밝고 자신감에 차있지 않다면 내 마음이 헛헛할 것 같아서 그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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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이야기 1 - 민주주의가 태동하는 순간의 산고 그리스인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이경덕 옮김 / 살림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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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로마인 이야기를 읽고 처음엔 감탄하나 후일 다른 역저를 접하고 얼마나 조잡한 저술인가를 알았다. 언론이 띄워준 노작가, 딱 편의점 수준의 저자인데. 실제 저서 수준보다 특이한 이력이 먹혔던 90년대의 마지막 유물인 셈. 또 번역서가 나왔길래 저술이 아닌 저자에 대해 평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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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 열차
크리스티나 베이커 클라인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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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드라마를 잘 안 보는데 우연히 "도깨비"를 보게 되었고 그만 그 재미에 폭 빠져버렸다.  특히 비쥬얼의 우월함이라고나 할까.ㅎ  덕분에 어제는 아이가 유치원에 등원한 틈을 타서 좀비물이라고 해서 관심도 없었던 영화 "부산행"까지 찾아보게 되었다.  도입부분 좀 보고 등장인물들의 역학관계에 대한 학습이 끝나자마자 중간부분은 8배속으로 돌려본 뒤 끝 마무리 부분만 찾아보기는 했지만..(난 빨리감기 기능이 없는 극장은 앞으로도 가기 힘들겠구나 다시 한 번 느끼며.)  그리고 맨 뒷부분에서 가슴 뭉클한 장면이 나왔다.  자신의 감염사실을 인지한 순간, 변하기 전에 사랑하는 아이로부터 떨어져야겠구나 하는 것을 느끼고 급히 실행에 옮기는 모습.  아빠 가지말라고 손목을 붙들고 끝까지 울며 매달리던 아이를 억지로 떼어내고 기차 뒤로 가서 울먹이다가 아이가 태어났을 때 처음 안아본 그 날을 회상하며 미소짓던 모습에서 나도 그만 같이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래, 아이가 성장하면서 나도 모르게 옅어지고 흩어져버렸던 그 때의 그 감동, 기쁨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뭉클함과 아이에 대한 애정을 되살리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사실 그 아이 하나 잘 키워보고자 열심히 달려온 나날들인데, 정작 그 아이와의 추억은 남은 것이 없다면..  그래도 그 애정 하나 확인하고 떠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 역시 마지막 순간에 미소를 지을 수 있을까.

 

 

고아열차는 그렇게 영화 부산행을 마치고나서 읽게 된 책이었다.  아이가 돌아오기까지 약 3시간 정도의 시간이 남아서 머리 식힐 겸 찾아든 "소설"이었는데 영화를 본 여운이 남아있어서일까, 비슷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1차세계대전 전후로 수많은 고아들이 생산된 그 시절, 미국에서도 고아열차라는 것이 있었다.  뉴욕에서부터 고아들을 모아서 태우고 서부로 달리며 멈춰서는 역마다 아이들을 내려서 세워두고 양부모(인지 무자비한 고용주일지는 아이의 운이고) 생각이 있는 어른들이 나와서 소를 고르듯, 말을 고르듯, 또는 보모를 고르듯 마음에 드는 애들을 先占하여 데려가는 것이다.  거기서 끝까지 보내질 집을 못 찾은 아이들은 다시 기차를 타고 뉴욕까지 되돌아가게 되고.  소설에는 주인공이 두 명 나오는데 한 명은 그렇게 고아열차를 타고 갔었던, 지금은 90대의 할머니, 그리고 또 한 명은 21세기에 부모의 보살핌을 받을 수 없기에 정부의 주관 하에 위탁가정에 맡겨진 10대의 말썽쟁이 청소년이다.  우연을 통해 만나게 된 둘의 만남에서, 할머니의 다락방을 정리하며 함께 추억이 정리되어 나온다.  그리고 독자들은 그 추억의 길을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함께 걸어가본다.

 

 

아일랜드에서 가난해도 가족을 아끼고 지킬 줄 아는 조부모의 곁을 떠나서 가난하지만 꿈과 희망을 찾아 미국으로 부모를 따라 건너온 니브는, 추운 겨울 어느 날 집에서 난 화재로 가족을 모두 잃고 만다.  이기적이고 의존적이고 결코 어른일 줄 몰랐던 어리석은 어머니의 죽음에는 그다지 애정이 없기에 슬픔도 없었지만 더 이상 함께 할 가족이 없기에 떠돌아다녀야 할 인생은 고달프기만 하다.  그래도 니브는 강했고 영특했으며 몇 군데의 위탁가정을 거쳐 결국은 그녀의 진가를 인정하고 그녀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존중해줄 줄 아는 따뜻한 부부를 만나 양부모와 입양딸로 새로운 가족을 갖게 된다.  그 사이의 이야기들은 그저 잔잔한 흐름으로 흘러가고 그 사이사이 현재 시점의 10대 청소년의 이야기는 마치 데쟈뷰의 느낌으로 함께 조금씩 스며나온다.  역시 갑작스러운 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무책임하기에 부모는 커녕 어른으로서도 그 자격이 불분명한 엄마로부터 정부는 법적 미성년자인 아이를 떼어내서 위탁가정으로 보내고, 정부의 보조금이 탐나서 위탁가정을 신청한 사람들이 대부분인 현재의 미국 현실을 감안한 구성으로 역시 그 아이도 잘 적응하지 못 하고 이 집 저 집을 떠돌며 법적 성년이 될 날만 기다리는 나날들.  하지만 그렇게 둘이 만나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위트있는 노부인의 회상과 그녀와 나누게 되는 따뜻한 인간관계를 통해 점차 마음을 열어가며 노부인의 추억을 함께 여행하는 소녀의 곁에서, 책을 읽어나가는 나도 함께 그 시절을 거닐며 마음이 점차 따뜻해짐을 느꼈다.  특히 소녀의 도움으로 잃어버렸던 가족과 재회하게 되는 노부인의 환희는 마지막장을 덮는 나까지도 같이 기쁨을 느끼게 해줬으니까.

 

 

생각해보면, 탄광촌같은 곳에서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위해 바다를 건너 새 대륙으로 넘어갔던 유럽인들의 모습이 그렇게 오래 전 일은 아니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3등칸에 타고 있던 멜빵바지를 입고 자켓 하나가 갖고 있는 옷 전부인 사람들이 결국 그들 아니었나.  그렇게해서 건너간 꿈의 대륙은 모두에게 꿈의 실현을 허락하는 호락호락한 곳은 아니었다는 것도 자명한 사실이었고.  설사 판자로 덧대어 만든 것이라도 나름 지붕과 벽이 있기에 비바람 피할 집 하나는 있다고 말을 한다해도, 죽음은 언제나 그 얇은 문 너머에서 바로 기다리고 있었던 녹록하지 않았던 삶들이 분명 그 곳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도 불과 백 년이 채 안 된 그 시대까지.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우리의 삶이 이렇게 평안해지고 문명의 利器들로 인해 "호화"로와진 것은 인류에게 있어서도 불과 80년이 채 안 된 호사이고, 이 나라에 사는 우리에겐 50년이 채 안 된 사치임을 새삼 깨닫는다.  또 따뜻한 집과 그 안을 채우고 있는 가족, 그리고 언제나 두 팔 벌려 맞이해줄 부모가 함께 하는 가정이란 것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닌 크나 큰 선물이자 감사할 일이고 그렇기에 함께 하는 시간들이 결코 허투루 흘려보내도 되는 순간들이 아니란 것을 생각하게 된다.  마침 하원해서 돌아온 아이의 작은 몸뚱아리를 꼭 껴안고 녀석의 온기로 내 몸을 가득 채우며 녀석의 내음을 맡으면서 새삼 느낀다, 이 모든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의 순간인지를. 

 

 

고아열차,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실제로 존재했던 열차.  하지만 유럽에서 유대인수용소를 향해 달렸던 죽음의 열차와는 달리 누군가에게는 희망을 그리고 새 삶을 열어주었던 열차.  그 열차에 함께 올라타고 잠시 다녀왔던 90년 전의 과거로의 시간여행.  과거에서 깨어나 현재로 돌아오니 너무나 사랑하는 내 아들이 내 앞에서 조부모로부터 성탄절 선물로 받은 장난감을 갖고 즐겁게 놀고 있다.  영화에서처럼 아이와 함께 하는 순간의 소중함을 깨닫는 순간 헤어지게 되지도 않고 또 소설에서처럼 언제나 그리워하면서도 함께 하지 못 하는 가족이 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새삼 감사함을 느껴본다.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고난 뒤, 내가 지금 못 가진 것에 대한 후회와 한탄보다 내가 지금 갖고 있는 것에 대한 감사함과 고마움으로 마음이 채워지며 오히려 눈물이 날 뻔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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