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1 - 천재의 의무 문화과학 이론신서 24
레이 몽크 지음, 남기창 옮김 / 문화과학사 / 2000년 12월
평점 :
절판


비트겐슈타인처럼 정체가 모호한 사람이 있을까? 부르조아적 경향이 강한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그를 대부로 모셨지만 정작 자신은 거부했다. 톨스토이의 민중적 기독교주의를 선망하고 볼세비즘에서 신성성을 보았지만, 사회주의적 개혁이나 혁명의 사회-지향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오히려 그는 종교 속에서의 초월과 거듭남을 더 옹호한다. 그런 점에서 레닌보다는 쇼펜하우어나 오토 바이닝거에 더 가깝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든 자파담론에 유리하게 전유하려고 애를 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부르조아적 검증주의의 신화적 인물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숨겨진 좌파 이데올로기의 화신으로 보기도 하며, 누군가에 의해서는 예술과 종교의 숨은 힘을 일깨우는 논리정연한 무당으로 보이기도 한다.

저자 레이몽크의 비트겐슈타인은 내게 이렇게 보였다. 그는 철학을 절대적인 원리를 탐구하고 가르치는 학문으로 보지 않는다. 그에게 철학이란 일종의 숙련된 노동이다. 철학은 감히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들어내거나 세상을 미망에서 깨우치는 일을 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철학은 그저 윤리적 충동과 예술적 충동, 그러니까 의지가 휘저어 놓은 삶의 회오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일이다. 비트겐슈타인에게는 러셀의 학문적 시도가 주제넘어 보인다. 러셀이 기호논리학을 수학의 기초로 토대삼으려 했던 것은, 과학주의 시대의 인식론적 토대인 수학에 철학을 토대로 놓음으로써 철학의 왕좌를 복위하려는 시도로 보일 것일 게다. 그에게 철학은 윤리적 행동과 예술적 행동이란 시민들에 복무하는 공무원일 뿐이다.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은 결별한다.

비트겐슈타인을 보면서 어떤 인간형을 떠올리게 된다. 단순성을 강조하는 인간과 반대로 복잡성을 강조하는 인간말이다. 흔히들 소위 어른들은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세상은 단순하지 않아. 회색이지... 복잡함을 깨달아가는게 어른이 되가는 과정이지.' 허나 이 말을 비트겐슈타인에게 했다간 황당한 꼴을 당할게다. 복잡함이란 '비겁한 삶', '불결한 삶'의 연막에 불과하다. 복잡함의 강조는 이런 연막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초라한 인생들의 변명일 뿐이다. 단순성을 강조하는 인간은 세상은 복잡해보이지만 그 토대와 궁극을 또렷히 볼 수 있으면 아주 단순하고 명료해진다고 본다. 단순명료한 믿음과 삶의 방식은 스스로에게 자기 완결성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이로인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지만 그 자신은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개의치 않는 불굴의 정신이 있다. 이 정신에 다다르면 개인들은 각자 올바르게 깨어있음으로 해서 억지로 사회개혁을 통해 개인의 성숙을 유도할 필요가 없어진다. 사회주의 개혁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회의적 태도다. 그래서 그의 철학은 단순명료성에 봉사한다.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것도 철학의 이름으로 말해져서는 안된다. 그것은 무한한 것이고 그것은 단지 보여질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말해질 수 있는 것'과 '보여질 수 있는 것'의 구분은 [논고]와 [탐구]의 큰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지켜지는 그의 사상의 핵심이다.

역서에 대해 말하자면 역시 제일 문제는 문화과학사 특유의 북디자인에 대한 무성의이고 둘째는 자주 오자가 눈에 띈다는 점이다. 오자가 자꾸 눈에 띄면 번역에 대한 신뢰도마저 동반추락한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 구절에 대해 번역탓을 하기 십상이고, 그러면 번역에 대한 헛소문이 떠돌아 책판매고를 떨어뜨릴 것이고, 나는 나대로 잘 이해하지 못하는 건 그냥 남의 탓하고 넘어가는 지적 나태로 빠져들 것이다. 이건 독자나 출판사나 다 손해다. 문화과학사의 분발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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