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비평 14호 - 2001.봄
도서출판 삼인 편집부 엮음 / 삼인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조선일보에 당대비평의 임지현의 사진이 대문작만하게 나왔다. 임지현은 매스미디어의 힘을 업고 자신의 [일상적 파시즘론]이란 아성의 지존이 되기 위해 여기저기서 논객들을 불러 모았다. 자신은 논의의 진전을 위해서 자리를 마련했다고 하지만 임지현 스스로가 너무 준비가 안되어있었다. 파시즘에 대한 개념 정의부터 일상의 문제까지 뭐 하나 딱부러지게 자신의 의견을 내놓지 못하고 얼버무리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리고 하는 소리가 아직 개념의 혼동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학자로서는 안이하기까지한 발언을 아무러 수치심없이 내뱉는다. 그렇게 많은 지면을 계간지에 할애하면서도 그렇게 무성의할 수 있는가? [당대비평]이 한 교수의 학습노트화되는 꼴이 아닌가? 솔직함을 넘어서 무례하고 파렴치한 건 아닌가?

임지현의 [일상적 파시즘론]이 또 조선일보에 의해 화용론적으로 도용당했다. 역시나 임교수 자신의 논지와는 좀 동떨어진 헤드라인으로 임교수의 모호한 이론이 거침없이 조선일보의 무기로 전유되고 있다. 조선일보가 바라는 것은 임교수의 [일상적 파시즘론]의 진의가 아니라 그 모호한 담론이 조선일보가 자주 쓰는 '홍위병론'으로 빠꿔놓기에 너무도 안성마춤이란 사실이다. 임지현은 민주주의 대 파시즘의 이분법을 넘어서 오히려 근대 민주주의의 적자가 파시즘이라고 명한다. 그리고 민중의 긍정적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자발적 동원의 매커니즘을 문제삼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민중과 그 동원의 매커니즘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그 문제가 선결되지 않고 자발적 동원 매커니즘이란 모호한 범주로 비판할 경우 민중 자체를 부정해 버릴 수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 있어서 과연 민주주의 대 파시즘의 이분구도가 유효하지 않다는 인식이 타당한 가이다. 국가보안법이 서슬퍼렇게 살아있고 조선일보 같은 언론들이 활개치고 있다는 사실은 민주주의 대 파시즘의 이분구도가 한국사회에서는 아직 유호하다는 분명한 방증이 아니던가?

김동춘 교수의 반박이 가장 날카로왔다. 그는 임지현의 사고방식이 탈맥락적이라고 비판한다. 스티브 라이히 등의 [파시즘의 대중권력]이나 포스트 모더니즘 이론서 읽기에 빠져 있기 보다는 우리의 근현대의 역사를 실증적으로 파고들어서 현대 한국의 지배층 및 권력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파고드는 작업부터 선행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따진다. (이는 김동춘이 스스로 행하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임지현은 동유럽사 전공이다. 그는 현실 한국의 양상을 제대로 읽어낼 효과적인 이론틀을 만드려고 하지 않은 채 서구에서 유행하는 이론에 손쉽게 기대어서 한국사회를 연역적으로 재단하려 드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의 '일상적 파시즘론'의 불철저성이 그걸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 하다. 학자로서 땀을 흘리겠다는 자세보다는 손쉽게 무임승차 하겠다는 듯한 인상을 준다.

또하나 김동춘의 비판에 대한 임지현의 반박이 너무 구질구질해 보인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김동춘이 투박한 민중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이제 현실적으로 없다라고 말헀는데 그에 대해 그는 '아님 말고'하는 식으로 구렁이 담넘듯 넘어간다. 또한 탈근대의 문제설정에 있어서 김동춘이 근대의 모순으로부터 스스로 떳떳하다면 당신이 부러울 뿐이라고 빈정거린다. 이 모든 것이 현실 한국에 대한 실증적 연구가 결여된 학자가 그 대신 고상한 이념적 아성에 기대어 자신에 대한 반론을 폄하하는 태도가 아닌가? 탈근대가 환원론적 사고방식의 오류에서 벗어나 개체성에 주목한 담론일 것인데 오히려 임지현식의 탈근대론으로 보이는 '일상적 파시즘론'은 '형이상학적'으로 보인다. 만일 일상적 파시즘론이 학계의 주요한 이슈로 떠오른다면 이 땅에 뿌리 내리지 못한 지식인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그러한 결핍을 만회하는가 하는 입지전적 사례를 보여주는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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