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골의 꿈 - 전2권 세트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김소연 옮김 / 손안의책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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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부메의 여름> <망량의 상자>에 이어 쿄고쿠 나츠히코의 추리소설을 세번째로 읽었다. 치밀하다!! 순식간에 두 권을 다 읽었다. 논리적으로 살짝 의아스러운 부분도 없지 않았지만 긴장감있게 읽힌다. 더구나 이 작가 특유의 초자연스러운 공포감 조성이라는 점에서는 압권이다. 도대체가 일본에는 왜 이리 원혼이나 귀신이 많은걸까 싶게 너무나 일본적인 그 으스스한 분위기. 비내리는 어두운 밤, 요기가 감도는 신사나 절 주변의 풍경 등등...책을 읽으면서 오래된 나무에서 풍기는 축축한 비냄새가 느껴질 정도로 실감난다. 묘사를 길게 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상황 자체가 너무나 이상하달까...도저히 있을 것 같지 않은 이야기가 연속해서 등장하는데 짧은 문장에도 머리카락이 쭈볏 선다.   

하지만 분위기가 다가 아니다. 한바탕 공포분위기를 조성해놓고 나중에 아님 말고 식으로 결론을 흐리지 않아서 좋다. 아무리 초자연적으로 보이는 사건일지라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쿄고쿠 나츠히코 소설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끝까지 혼란스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책을 읽어온 독자에 대한 예의라고나 할까...환상소설이 아니라 추리소설이라서 좋은거다. 그것도 어디까지나 수수께끼풀이에 초점이 맞춰진다는 점에서 정말 정통 추리소설이다. 모든 에피소드들, 모든 단서들이 퍼즐의 조각처럼 마지막에 가서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는 쾌감이 정통 추리소설의 매력이라면 그런 매력을 요즘 보기 드물게 듬뿍 갖고 있는 소설이다. 합리적인 설명은 고사하고 초자연적인 현상이라고 포기하더라도 정돈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의 '미친 이야기 조각들'을 결국엔 깔끔하게 짜맞추는 고쿄구도의 솜씨에 입이 떡 벌어질 뿐이다.

이 작가의 소설은 이야기의 층이 섬세하고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굉장히 입체적인데 이것도 참 좋아한다. 교훈이나 설교 같은 것이 없으면서도 이야기 곳곳에 사회심리학적 분석이랄까 하는 것이 숨어있다. 무지나, 혹은 반대로 지나친 지식이 낳은 공포...인간 속에 숨어있는 어두운 면에 대한 이야기만이라면 그렇게 대단할 것도 없다. 하지만 쿄고쿠 나츠히코는 이 어둠을 파헤치면서 '실제로 어두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는 반전을 제시하는데 이것이 뒤통수를 친다. 하지만 단순히 공포나 무지에 맞서 이성의 밝은 면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이 작가에는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있다.   

책마다 이야기를 관통하는 하나의 이미지를 잡고 거기다 살을 붙여가는 방식도 맘에 든다. (물론 <망량의 상자>의 '상자'처럼 좀 지나치게 많이 등장한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어떤 이미지가 한번 등장하면 그런가보다 하지만 두번 세번..나오고 또 그것들 사이에 무슨 연결이 있는 것 같으니까 더 무섭다. 그 이미지에 얽힌(광골의 꿈에서는 '백골') 전설, 기록, 비전, 이론 등등이 현란하게 서로 얽히고 하나의 얼개를 형성하면서 사건이 해결된다. 이 얽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서 그 자체가 주술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광골의 꿈>은 <망량의 상자> 다음에 나온 소설인데 실제로 이 소설과 연결되는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꼭 그래서가 아니라 <망량의 상자> 다음에 읽으면 더욱 재밌다. <망량의 상자>에서 제시한 것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스포일러라 말하기 어렵지만...전작에서 제시한 것을 작가 스스로 교묘하게 뒤집고 다시한번 뒤통수를 친다. 

으스스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곳곳에 의외의 유머도 많다. 그건 등장인물들 성격때문일거다. 전작에서 슬쩍 슬쩍 모습을 드러냈지만 여기서는 아예 전면에 나서서 일...이 아니라 훼방을 놓고 다니는 이상한 탐정 에노키즈의 대사가 튀어나올 때마다 너무 웃겼다. 기바 형사의 단순하고 괄괄한 성격이 여기에 맞부딪히면 심각한 와중에도 피식거리게 된다. 

한 가지 단점이라면 등장인물이 너무나 많이 나오고 그들이 서로 만나는게 너무 우연적이며, 일본의 역사나 전설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이야기 가닥을 따라잡기가 어렵다. 너무 전문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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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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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기술>을 워낙 좋아했기 때문에 알랭 드 보통이라는 작가의 이름을 단단히 기억하게 됐다. 하지만 이상하게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나 '불안' 같은 책은 척 사게 되지 않더라. 서점에서 슬슬 들춰보다가 그냥 내려놓곤 했다. 보통의 이름이 사고싶은 책 리스트에서 점차 사라질 무렵, 이 책, <행복의 건축>에 대한 기사를 보게 됐다. 오 이거다! 한달음에 달려가 샀다. 왠지 읽기도 전에 '삘'이 오는 책이 있는 법. 역시나 실망시키지 않았다. 아깝게시리 한나절에 다 읽어버렸다.

불만을 이야기하자면 없는 것은 아니다. 정보보다는 글쓴이이 시각이랄까 감수성에 기대고 있는 책이 원래 좀 그렇듯이, 사알짝, 주제는 달라도 근본적으로는  <여행의 기술>과 큰 차이가 없다 싶기도 하다. 하고싶은 이야기가 어슷비슷하다보니 이런 스타일로 두 권, 세 권..계속 읽어가면 처음의 재미가 계속 유지되지는 않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 작가가 보통이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복잡한 이론을 늘어놓지 않지만 틀림없이 평소에 수많은 책을 읽어서 소화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한마디로 책 한권 써봐야겠다고 급조해서 이것저것 읽어치운 것이 아니라 평소에 생각을 많이 하는 티가 나는거다. 글이 쉬우면서도 만만치는 않다. 왠지 실제 만나보면 조금 불편하겠다 싶을 정도로 예민한 사람일 것 같다. 하지만 자신의 예민함에 휘둘리지 않고 슬쩍 자조적으로 빈정대는 뉘앙스를 실어 담담하게 글을 쓰는 것이 맘에 든다. 그렇다고 절대 소박한 스타일은 아니지만, 괜시리 감상을 늘어놓거나 자기 글에 자기가 도취되는 법이 없고 무엇보다 섬세하면서도 잘난척 하지 않아서 좋다. 관점은 있되 열광하지는 않으며, 살짝 비껴서서 차분히 이야기를 해나가는 느낌이다. 비록 이 사람의 미감 자체는 살짝 고전주의적이라  은근히 그런 쪽을 옹호하는 느낌은 들지만, 뭐, 큰 문제는 아니다(사실 건축은 고전주의와 가장 친화성 있는 장르이기도 하다).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워낙 좋아한다. 엔지니어링의 측면에서는 아는게 없지만 장소나 공간에 대한 관심이 워낙 지대하다. 학교다닐 때 서양건축사를 듣기도 했고, 따로 공부하기도 했지만, 도무지 암기적인 방법으로는 머리에 남는게 없었던 것 같다. 르 코르뷔지에가 그 중의 하나였는데, 도무지 이 사람이 뭘 주장하려 했는지 정리가 안되더라. 그런데  전문 건축가가 쓴 것도 아닌 이 책에서 확 삘이 왔다! 보통은 절대 노골적으로 빈정대는 건 아니면서도 은근히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정사'와는 좀 다른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르 코르뷔지에의 유명한 빌라 사부아는 실은 물매가 없는 지붕 때문에 물이 새서 집주인 사부아 부부가 "사람이 살 수 없는 집"이라고 불평하고 수십번 고쳐달라고 건의했다고...-_-)  

이상적인 미래도시의 실현을 위해 파리의 절반을 없애버리려고 했던 르 코르뷔지에의 극단적인 플랜 같은 사례를 통해 보통은 건축가의 이상이 평범한 삶의 디테일과 조화되지 못할 때 어떤 위험이 되는가를 보여준다. 일상의 작은 이야기들을 존중하는 이런 시각은 내가 보통의 글에서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건축의 미덕'이라는 장에서는 균형, 우아, 질서 같은 단순한 원리들을 이야기한다. 사실 교과서적인 주제다. 하지만 이야기 솜씨가 아기자기해서 지루하지 않다. 특히 '우아'(grace)'라는 고전적인 미적 범주가 '힘'과 관련된 것이라는 주장은 나름 새로우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협곡에 가로놓인 다리와 유리창틀에서 드가의 발레리나를 연상하는 감수성이라니.       

책 전체에 걸쳐 건물 사진들을 보는 맛도 쏠쏠하다. 컬러였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렇담 책값이 확 뛰었을테고..요즘 사진만 요란하고 제대로 된 글이 없는 책들이 워낙 많다보니, 그런대로 이런 편집도 나쁘지 않았다. 이걸 일일이 다 조사하다니 대단하다 싶고, 특히 몇몇 건물들은 그 도시에 가보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그중에서도 인공도시 브라질리아에 가보고 싶다. (건축을 이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 건물이 서 있는 장소에 실제로 가보는거다! 보통이 썼듯이, 그 장소에 가면, 건물 그 자체, 건물을 둘러싼 모든 환경들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 

p.s. 이 책의 부작용이라면 부작용인 것은, 닭장 같은 아파트 월세 한 칸 마련하기도 빠듯한 대한민국 현실에서 건축의 행복에 대한 이야기가 그림의 떡처럼 느껴진다는 거다. 집에 심미적 감각을 심는다는 건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사치일 뿐 아닌가 싶으니까 살짜쿵 심술이 난다. 물론 공공건물의 아름다움도 논할 수 있겠지만, 이 분야 역시 그다지 즐거운 현실은 아니지 싶다. 내가 너무 꼬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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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량의 상자 - 상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 손안의책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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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약간의 스포일러 있음)

'우부메의 여름'에 감명받고 곧바로 주문했다!
제목부터 멋지다. '망량의 상자'...

전반에는 '상자'라는 은유가 너무 번번히 등장해서, 조금 재미가 없었고,
후반부에는 출생의 비밀이라던가..하는 살짝 신파조의 이야기가 나오는게 좀 그랬지만,
전체적으로는 우부메의 여름보다 오히려 더 매력적이고 탄탄했다.
특히 하권에 접어들어서는 정신없이 읽어치웠다. 
우부메..에서도 보여줬던, 으스스한 아우라를 깔아놓는 솜씨는 역시 최고였고, 
복잡하게 얽힌 여러 사건들의 가닥들을 결국 깔끔하게 정리하는 능력도 보통이 아니다. 
우부메..가 작은 장소에 집중된 스토리였고 전체적으로 정적인 느낌을 주었다면
망량..은 좀더 스케일이 크고 활동적이다.

우부메에도 나왔던 그 주인공들이 또 나오는데, 이들의 활약상은 다소 귀엽기도 하고,
으스스한 사건의 암울함을 조금 누그러뜨리는 효과를 가져오고 있지만
그래도 뭐니뭐니해도 이 작가의 가장 뛰어난 점은
시대와 인간의 광기를 포착하는 그 예민한 감수성이다.
굉장히 냉철하고 논리적으로 느껴지지도 하지만
머리로만 세상을 보는 사람이 결코 포착하지 못하는
'어둠에 대한 감수성'을 이 사람은 갖고 있다.

환상소설, 사이비종교, 연쇄토막살인사건..이런 소재 자체가 주는 아우라를 바탕에 깔고
익숙한 고전적 추리소설의 포맷을 빌리면서도, 그 속에서 언뜻언뜻 상식을 깨는 시각을 제시한다.
특히나 내가 맘에 들었던 것은, 이 작가 흔히 우리가 추리소설의 정석으로 알고 있는
상식들에 미세한 균열을 내는 그 방식이었다.
우부메..에서도 그랬지만, 추리소설팬이라면  눈치챌 수 있을 이런 전복적인
즐거움이 특히 좋았다. 

예를 들어, 보통 모든 사건은, 서로 무관한 채로 흩어져 있는 조각들이 퍼즐처럼 제자리를 찾아서
서로 연결될 때 해결된다.
하지만, 반대로,서로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조각들이 실은 서로 무관한 것들이라면
어쩔 것인가?
토막살인사건이 났다. 보통이라면, 시체를 토막내는 이유는 들키지 않고 시체를 처리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어쩔 것인가?
토막내기가 살인에 따라온 것이 아니라, 살인이 토막내기에 따라온 것이라면 어쩔 것인가?
환상적인 이야기를 쓰는 소설가가 있다.
현실에 결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가 쓰는 이야기가 정말로 현실에서 목격한 이야기라면 어쩔 것인가?
눈에 명백히 보이는 것이 있음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젖혀놓는다면, 
상상력의 빈곤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 풍부한 상상력이 공격당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이 소설을 꼭 영화로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캐스팅도 생각해봤다.
교고쿠도도역에는 설경구, 에노키즈는 차승원.
그리고 구보 역에는 원빈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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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영의 알제리 기행 - '바람 구두'를 신은 당신, 카뮈와 지드의 나라로 가자!
김화영 지음 / 마음산책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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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삶에 끊임없이 낯설음을 느끼는 사람들은 여행자가 되거나, 아니면 예술가가 된다. 하지만 인생은 불공평한 것인지도 모른다. 때로 예술가의 감수성을 지닌 여행자도 있으니까.  아니 여행자의 감수성을 지닌 예술가라고 해야 하나. 어느 쪽이건, 이런 사람들은 나의 영원한 질투대상이다. 어쩌면 모든 예술가는 여행자로 타고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불행히도 그 역은 성립되지 않지만) 

<김화영의 알제리 기행>에 나오는 앙드레 지드와 알베르 까뮈도 그런 사람들이다. 노르망디의 부잣집 아들이었다는 지드에 비해(지드가 북아프리카를 좋아했다는 것도 이번에 첨 알았다) 까뮈는 알제리에서 태어나서 자랐기 때문에 단순히 여행자 입장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하여간 이 책에서 내가 얻은 예기치 않았던 최대의 수확은 지드와 까뮈의 글이었다. (김화영 교수님, 이분이 뛰어난 번역가라고 생각하는데, 번역문체 자체가 좋았다)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는 걸까. 난 지드는 잘 모르지만 까뮈의 <페스트>를 상당히 좋아했었기 때문에 감회도 새로웠다.

이 책 자체로 말하자면 너무 기대를 해서인지 2프로 부족한 느낌이었다. 우아하고 단정한 느낌이 책 장정 자체의 세련된 느낌과 맞물려 기분좋게 독파한 책이지만, 약간은 감질이 났다. 저자가 분문에서 "다음번에는 글을 쓰는 숙제를 안고오지 말아야겠다"라고 쓰고 있듯이, 신문에 연재했던 글이라서인가..좀 너무 단정하게만 쓰려고 한 느낌이다. 어쩌면 김화영 교수님도 밝히고 있듯이 알제리 여행의 동기가 된 까뮈와 지드의 문학이라는 필터로만 너무 이곳을 보려고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해도, 까뮈가 쓴 것과 실제의 알제리는 어떻게 달랐는지, 아니면 어떻게 같았는지, 그런 생생한 느낌을 좀더 많이 써주셨으면 좋았을걸 싶었다.

하지만 책의 절반 정도를 넘어가자 앞부분보다는 재미있어졌다. 여행이 진행될수록 이분이 좀 더 자유로운 글쓰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 도시를 떠나 사하라 쪽으로 내려갈수록 흥미로와졌다. 까뮈의 <페스트>의 배경이 되었던 오랑에 대한 묘사도 상당히 관심을 끌었고. 어느날 호텔에 돌아와 화가 나서 쓴 메모, 부분에서는  큭큭 웃었다. (쓰레기나 먼저 치우라고 했던 부분) 이런 생생한 묘사가 오히려 조금은 더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도 초점이 확실하고 공연한 감상이나 뜬금없는 인생철학 같은 게 없는 여행기라서 좋았다.(나는 자기가 본 걸 묘사하는 것보다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면서 인생철학을 설파하는데 더 집중하는 그런 류의 여행기를 너무 싫어한다) 무엇보다 요즘 많이 나오는 그저그런 여행기에 비하면 훨씬 고급스러운 책이다. 번역하신 글의 문체처럼 우아하고 차분한 문체도 좋았다.

이 책만으로 판단하기는 많이 부족하겠지만, 글과 사진으로 미루어볼 때 알제리는 (내가 가본 유일한 북아프리카 나라인 모로코에 비하면) 뭐든지 큼지막한 나라인 것 같다. 수도 알제의 풍경은 별로 정이 안가고 내가 로마에 큰 관심이 없어서인지 북부의 로마유적지가 나올 때는 그저 그랬는데, 오히려 사하라 근처의 마을들, 오아시스의 풍경들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비스크라, 엘 칸타라, 셰트마, 드로, 우마크, 셰가.. 이런 이름들을 기억해야겠다.

아트망이여 나는 너를 생각한다. 비스크라여, 나는 너의 종려나무들을 생각한다. - 투구르트여, 너의 모래를..오아시스여, 거기에는 아직도 사막의 메마른 바람이 너의 수선스러운 종려나무 가지들을 흔들고 있는가? 더위에 익어서 터진 석류들이여, 너희들은 새콤한 씨를 땅 위에 떨어뜨리고 있는가? 셰트마여, 너의 시원하게 흐르는 물과 곁에 가 서면 땀이 나던 너의 더운 샘물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 황금의 다리, 엘 칸타라여, 나는 기억한다. 너의 낭랑한 아침들이며 황홀한 저녁들을. 우마크여, 나는 너의 황량한 모습을 꿈에 그린다.

-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사무실들과 집들에서 아직 어둑어둑한 거리거리로 떠들썩한 군중들이 쏟아져 나와 바다 앞의 대로들에까지 흘러가고 그곳에서 밤이 다가옴에 따라 하늘의 빛과 해안의 등대들과 도시의 불빛들이 차츰차츰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다 같은 박동 속에 한 덩어리가 되어감에 따라, 마침내 입을 다물고 잠잠해지는 이런 저녁시간이면 나는 그 고장에 가 있고 싶어지는 것이다. 모두가 다 같이 이처럼 물가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숙연해지고 수천 가지의 고독이 군중들로부터 분출한다. 그때에 바로 아프리카의 저 거대한 밤들이, 당당한 유적이, 고독한 여행자를 기다리는 절망적 열광이..시작되는 것이다.

- 알베르 까뮈, <결혼, 여름>

p.s. 다른 것을 다 떠나서 무엇보다 이 책은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알제리 여행기이다! 사실 그래서 너무나 반가왔다. 북아프리카는 나에게도 로망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모로코에 여행갈 때 우리말로 된 모로코에 대한 책을 구하기 어려워서 결국 론리 플래닛과 <큐리어스> 한 권만 들고갔었다. 다음에는 튀니지에도 가려고 한다. 알제리에도 가보고 싶지만 지금은 우선순위에서는 밀리고 있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오랑과 같은 도시에 직접 가보면 예술가의 상상력에 훨씬 못미치는 현실에 실망하지 않을까. 길가의 무뚝뚝한 청동 조각상 하나에도 놀라운 통찰력을 보이는 카뮈 같은 작가의 가이드(그리고 그 구절을 뽑아서 소개해준 감화영 교수님의 안목)이 아니라면 실제로는 눈이 있어도 아무 것도 못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하라엔 꼭 가보고 싶다. <알제리 기행>에 실린 사막의 풍경이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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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와 장소상실 논형학술총서 14
에드워드 렐프 지음, 김덕현.김현주.심승희 옮김 / 논형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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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지리학자 에드워드 렐프가 1976년에 쓴 책이다. 번역이 진짜 늦게 나온 거다. 난 지리학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지만, 지리학을 몰라도 읽는데는 별 지장이 없다. 전문용어가 별로 없어서 읽기 어렵지 않다. 현상학적 방법론을 적용했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데 현상학이란 어차피 모든 학문 분야에 있어서 방법론적 반성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맥락이 이해가 갔다. 그러니까, 이론적 도구를 정련시켜서 거기서부터 논의를 전개해나가는 게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직접적인 세계, 그러니까 '생활세계'에 대한 기술(description)로부터 출발하려는거다.  

1장부터 5장까지는 이런 '세계에 대한 기술'이 담겨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있어서 장소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나름의 분류를 하는데, 솔직히 이 부분은 살짝 지루하다. 너무 '나열'에 그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현상학적 방법=나열은 아닐텐데 말이다. 암튼 그래도 거기 담긴 문제의식은 잘 느껴졌고, 몇몇 범주들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6장부터는 앞보다 훨 재미있다. 저자가 모던 사회의 특징으로 본 '무장소성(Placelessness. 제목의 '장소상실'과 같은 단어인데 책 안에는 '무장소성'이라고 되어있다)'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이다. 서브토피아(subtopia), 박물관화, 디즈니화, 산업에 의한 경관의 파괴 등등, 중요한 카테고리들이 잇따라 등장한다. 화질이 안좋긴 하지만 사진도 많다. 저자가 분석하고 있는 것은 주로 유럽과 미국의 경관인데, 특히나 미국에 잘 들어맞는 부분이 많다. 미국 서부여행에서 약간이나마 이런 '무장소성의 극치'라고 해야 할 경관들을 봤기 때문에 '삘'이 왔다. 하긴 요즘 우리나라에도 무장소성의 경관은 넘친다. 각종 국적의 간판이 붙은 모텔촌, 새로지은 고층 아파트촌...그러나 이런 무장소성의 경관도 동네마다 특색이 있다. 렐프가 못본 것이 있는 건지도.

이 책은 '무장소성'이라는 개념을 처음 유행시킨 고전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훨씬 전에 굉장히 포스트모던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해서 유명한 책인데, 지금 봐도 통찰력이 날카롭다. 물론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크게 날카로울 것도 없지만, 1976년에 썼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책 끝부분에서 결론을 유보하고 있긴 하지만, 이 책은 '무장소성의 경관'에 대한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을 담고있다. 때문에 복고적 향수취향으로 느껴지기도 한다(특히, 이 문제에 관한 한 꽤나 보수적인 이론가인 하이데거에 의존하고 있는 부분에서 그렇다). 하지만 저자가 '유보'했던 부분이 오히려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다. 렐프는 무장소성에 대한 '불편한' 느낌은, 그것이 '새로운 것'이기 때문일 수 있으며, 그래서 본인이 처해있는 문화 속에서는 어떤 섣부른 결론을 낼 수 없다고 말한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는 '무장소성의 경관' 속에서 렐프 시절보다 훨씬 덜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가. 그렇긴 한데 무장소성 그 자체도 날로 업그레이드된다. 똑같이 늘어선 신도시 고층아파드들의 경관은 굉장히 삭막해보이고 싫다. 왜일까? 렐프의 주장처럼 인간에게는 '진정한 장소성의 감각'을 가지려는 욕구가 기본적으로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지 아직 그것이 우리에게도 여전히 '새로운 것'이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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