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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남자는 없다 - 혐오사회에서 한국 남성성 질문하기 질문의 책 15
손희정 외 지음, 연세대학교 젠더연구소 엮음 / 오월의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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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의 제목이 가리키는 '그런 남자'는 어떤 남자인가? 들어가는 말에서 기획자는 이 책이 남자다움에 대한 여러 규범을 구현한 '그런 남자는 없다' 는 의미에서, "남자다움 자체가 일종의 판타지로 구성된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고, 다만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으로 다양한 차이들이 있을 뿐' 이라고 기획의도를 설명한다. 그러나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그런 남자는 없다' 라는 주제로 남성성 규범을 해체하기보다 '한국 남자'라는 특정한 집단의 '남성성'을 규정하려는 뉘앙스가 강하다. '한국 남성의 남성성'이 어떤 식으로 형성되고 유지되어왔는가를 분석하기 위해 광범위한 사회문화적 맥락을 훑어보고 그것을 정의내리려는 시도로 보인다는 것이다.

 제목과 기묘하게 불일치하는 책의 내용은 내게 
'한국남자의 남성성'의 특수함에 대한 새로운 통찰이 아닌, 한국 사회에서의 젠더 연구 방법론에 대한 고민을 던져주었다. 서구권에서 남성성을 분석할 때는 '서양 남자'에 대한 분석이라는 토를 달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이브 세즈윅은 미국의 영문학자이지만 남성간의 유대를 설명한 '호모소셜'이론에서 상정한 대상 남성을  '영문화권의 남성' 으로 한정짓지 않았다. 그건 서양인들이 자신들을 '보편'으로 상정하는데 너무 익숙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생략이었을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의 젠더 연구자들은 연구를 할 때 '한국'이라는 국가적 특성을 과도하게 인식하는 면이 있다.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측면이 강한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흐름에 대한 언급과 연구를 통째로 생략한 채  '한국'만의 특수한 현상인 것 처럼 앞에 국가의 태그를 붙이는 것이다. 이 책 또한 그런 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보편적 남성성'과 '한국남자의 특수한 남성성'을  명확하게 구별하여 정의내리지 않고 논의를 전개하는 내내 혼동하여 사용한다. '(보편적)남성성'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한국 사회의 문제를 이야기 하는가 하면 '한국 남자의 특수한 남성성'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보편적인 남성성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식이다.(대한민국의 남성성을 논의한다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공적영역/사적영역의 철저한 분리 문제를 예시로 드는 식이다.) 논의의 주제를 "한국 남자의 남성성"으로 잡았다면, 일단 '보편적 남성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까? 어떤 특성이 전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남성성' 인지에 대한 충분한 연구가 뒷받침 되어야 그것과 구별되는 '한국남성의 남성성'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더 납득하기 힘든 지점은 그들이 한국 사회의 남성성을 설명하는 기반으로 삼는 것이 서구의 이론이라는 것이다. 저자들은 정신분석, 헤게모니, 수행성 이론 등을 끌고 와 한국 사회에서 드러나는 여러 현상들을 비평한다. 그 현상들은 그들이 끌고 들어온 이론적 틀에 아주 잘 맞아떨어지는 동시에, 한국 사회의 '특수한' 현상으로 설명된다. 이상하지 않은가? 분석대상으로 삼은 특수한 사례가 보편적인 이론에 너무나 잘 맞아 떨어진다면, 어떻게 그것이 이 사회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공통적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있는가?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이런 의심이 들어 괴로웠다. 이들이 말하는 '한국 남자의 남성성'이 정말 '한국' 남자들에게서만 나타나는 특성인지, 아니면 보편적인 특성인지에 대한 답을 전혀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연구는 대체 무슨 쓸모가 있는 것일까? 서구 이론을 기반으로 한국의 문화를 비평하는 것은, 사회문화적인 인상 비평 작업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비평이 주장하는 바가 "한국문화에서도 드러나는 보편적 남성성 신화"가 아니라, "한국이라는 사회에만 드러나는 특수한 남성성 신화"라면, 그래서 여기 수록된 글들이 "한(국)남(성)론" 이라는 담론을 뒷받침 하기 위해 쓰여진 글들이라면, 나는 방법론 자체의 부실함과 오류를 지적할 수 밖에 없다.

 진중권은 이전에  <호모 코레아니쿠스> 라는 책에서 한국인의 특성에 대한 사회문화적 분석을 시도하면서, 자신의 연구가
'한국인'이라는 특정한 인종의 종족 특성을 밝히려는 것이 아니라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개념에 입각하여 특정한 사회 문화에서 그렇게 습득될 수 밖에 없었던 특수한 '습속'을 밝히려는 것임을 몇 번이나 강조하여 명시한다. 그리고 그가 논의를 진행할 때 한국인의 특정한 습속을 밝히기 위해 대조군으로 삼고 있는 것은 그가 유학시절 경험했던 독일인들의 습속이다. 대중서로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엄밀한 통제 아래서 분석된 것은 아닐지라도, 그는 적어도 비교를 위해 '독일인'이라는 대조군을 설정하고, 직접 경험에 의해 느꼈던 차이점들을 실례를 들며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남자는 없다>의 글들은 '한국남자의 특정한 습속'을 밝히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게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대조군도 설정하고 있지 않다. '보편적 남성성'과 '한국남성의 남성성' 개념을 구별하는 이론적 기초작업을 통째로 생략한 학문적 게으름에, 그 두 개념을 구별하여 '한남론'을 형성하려는 강한 의지가 더해져 기묘한 책이 만들어 졌다. 

 궁금증이 계속 든다. 왜 저자들은 '한국 남자'의 특수성에 집착한 것일까? '남자'도 아니고 '아시아 남자'도 아닌 '한국 남자'에 말이다. 아마 저자들은 '한국 남자'들이 그 어떤 다른 국가의 남성들과도 다른 특수한 남성성을 지니고 있다는 가정에 입각하여 연구를 해 나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일까. 그들은 왜 다른 나라의 이론가들과는 달리 '보편적 남성성'이나 '특정 문화권의 남성성'이 아닌 '한국'이라는 한 국가의 남성성이라는 한정된 대상을 연구 주제로 삼을 수 밖에 없었나. 그리고 왜 그 한정된 연구대상의 선정을 이론적 사전 작업이 필요하다고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여겼나. 이건 그들 또한 갖고 있던 식민성 때문이 아닐까? 서양 사람은 세계에 대해 말할 수 있지만 한국 이론가는 오직 '한국'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는 한계를 스스로에게 부여한 채 좁은 범위 안에서 작업하는 식민성 말이다. 이들에게 남자는 오직 '한국'남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보편적 남성성과 한국남자의 남성성이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게 느껴졌던 것이 아닐까. 어차피 이들이 말할 수 있는 남성성은 오직 한국 남자의 남성성에 대한 것 밖에 없기 때문에.

 재밌는 것은, 이들이 한국 남자의 특수성으로 수시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한국의 식민지 경험으로 인한 식민지 남성성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그들은 자기 집단 안의 식민성에 대한 어떠한 검토 없이 자신을 객관적/보편적 주체로 사정하고서 '한국 남자'라는 집단을 타자화 시킨 뒤 그들이 가진 식민적 특수성을 지적할 수 있게 된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13명의 저자 모두가 서로의 작업에 대한 어떤 비판 의식도 없이 이런 보편주체의 환상에 함께 빠지게 된걸까? 이것이야말로 분석해 볼만한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맹점은 그것 뿐만이 아니다.
 내가 이 글이 담고 있는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하지 않고 방법론 자체를 비판한 것은 이 책의 부실한 구성탓이 크다. '한국 남성의 남성성'이라는 공통 주제를 갖고서도, 이 책은 단 한 권에 담기에는 너무나 넓은 스펙트럼을 다루고 있다. 300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 책 안에서 무려 13명의 저자가 각자의 관심사에 따라 소재를 선택하고, 그마저 가지각색의 방법론을 사용하고 있다. 아기장수나 우투리 설화 등 한국 고전 민담에 반영되어 있는 남성성에 대한 정신 분석을 시도하는가 하면 해방기와 군사독재 시절을 거치며 형성된 군사주의적 남성성을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보고, 문학과 미디어에 반영된 남성성을 비평하기도 하며, 수행성 이론에 기초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남성들의 행동양식을 분석하기도 한다. 신화의 영역부터 현대의 온라인 커뮤니티까지라는 방대한 영역을 가지각색의 사회비판론으로 훑어보는 것이다.

 기획단계에서 구체적인 연구 주제와 방법론을 정하지 않고  그저 '한국남성성 분석'이라는 컨셉만을 정해주고는 연구원 각자에게 에세이를 쓰게 한 다음 거칠게 엮어낸 책이란 느낌이 강했다. 각 글에 주어진 분량도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의 주제가 짧은 페이지 안에서 진행되다 보니 주장하려고 하는 바에 대해 충분한 논의가 펼쳐지지도 못한다. 자신이 주장하려고 하는 바에 전제가 되는 기존 연구에 대한 소개도 아주 간략한 요약으로 언급될 뿐이고, 그 이후에 전개하는 고유한 주제도 대상을 깊이 있게 파고들지 못하고 인상 비평에 그칠 뿐이다. 소재가 워낙 제각각이기 때문에 앞선 글에서 언급되었던 주제가 다음 글에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단편적인 정보와 아이디어만이 난무할 뿐 어떤 논의도 뚜렷하게 와 닿는 것이 없고 산만할 뿐이다.  이렇다 보니 이 책의 수신인으로 상정된 집단이 과연 누구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중을 설득할 수 있을 정도로 친절하게 쓰여진 것도 아니고, 학계에 의미있는 담론을 제기할 정도로 참신하고 엄밀하지도 못하다. 같은 문제의식과 전제를 공유하고 있는 어떤 특수한 집단 내부에서나 읽힐 만한 텍스트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남자다움의 안과 밖>이라는 글에서 인용한 1970년대의 한 글이다. 서울대 의대 한동세 교수가 학술지에 발표했다는  <한국인의 성도착증>이라는 논문을 언급하면서, 저자는 한 교수가 한국인이 서양에 비해 "성도착"이 훨씬 덜 나타나는 이유 중 생물학적인 요인을 설명하는 글을 인용한다.

"서양인은 "정력이 넘쳐흘러" "변태"가 많은 반면 한국인은 "초식"을 위주로 하고 "기생충"이 많아 "정력이 남아돌"지 않으므로 "변태"가 적다고 설명했다. 이를 바탕으로 저자는, 한국의 성에 "음양"이 분명한 점을 자랑스런 전통, "태극"이라 말하고 글을 마무리했다." 120p

나는 이 인용문과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이 취한 방법론이 그다지 다를바 없다고 생각한다. 학적인 방법론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 대상집단의 특성에 대한 어떤 심층적인 연구와 통계 조사도 없이 자신의 의견(편견)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제멋대로 나열한 인상 비평,  종족 특성에 대한 단정적 정의, 전통 문화를 끌고 들어와 국가적 특성으로 단정짓기, 자신 또한 속해있는 집단에서 홀로 객관적 위치를 담보하고 있다는 태도로 대상을 타자화 한 뒤 비평하기 등등..

이런 식으로 쓰여진 글은 한정된 시대 안에서 한정된 이해를 공유하고 있는 집단의 사람들만이 수긍할 수 있을 뿐이지, 전혀 다른 시대에서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힘은 전혀 없는 글이다. 그렇다면, 이런 글의 효용이 뭐란 말인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끼리 공감하고 자위하는 것 이상의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 사유하기 위해선, 사유의 발판부터 제대로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단순한 인상분석을 나열할 단계는 이미 지난 것이 아닌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전략적으로 '한남'이란 용어를 쓴다고 해도, 학계에서는 좀 더 엄밀한 태도로 접근해서 사회학적 분석을 해 보아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대상을 섣불리 분석하기에 앞서 학자로서 자신의 방법론에 대해 고민하고, 조금이라도 학적으로 엄밀해지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배움을 얻기 위해 펼쳐든 책에서 의심과 답답함만을 느끼게 되었다.
여러 국가에서 나온 책을 찾아읽을 수록 '한남'이라고 흔히 지칭하는 집단의 특성이 우리나라 남자들만의 특성이 아니라 대부분 전 세계 남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특성이라는 걸 알게 되는데, 이런 점을 제대로 짚어주는 이론서를 이 나라에서 찾을 수가 없다.
공부할 수록 벽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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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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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스플레인'이란 신조어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리베카 솔닛의 신작. 운 좋게 서평단에 당첨되어 책을 무료로 받아보았다.
제목 때문에 일견 뻔해 보일 수 있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다. 특히 이 책의 원제와 같은 제목의 '모든 질문의 어머니' 라는 짧은 글과 '침묵의 짧은 역사' 라는 글은 전문을 필사하고 싶을 정도로 압축적이고 강렬한 글이었다. 오랜 활동가 경험으로 인해 갖게 된 통찰력과 내공을 갖고 한 문장 한 문장 꾹꾹 눌러쓴 명문이었다. 내가 작년에 페미니즘 활동을 하며 느꼈던 답답함과 막막함을 놀라울 정도로 명료하게 언어화하는 그녀의 능력에 내내 감탄하며 읽었다.


모든 질문의 어머니

 그녀가 저술한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자리에서 한 인터뷰어는 그녀에게 "왜 아이를 갖지 않으셨나요?" 라고 묻는다. 그래, 바로 그 질문이다. 소탈한 관심과 상식을 가장하고서 시도때도 없이 우리에게 던져지는 질문. 말문을 턱 막히게 하고 앉은 자리에서 끌어내려져 심문당하게 하고 공개적으로 얻어 맞은 것 처럼 비참하게 만드는, 질문 자체로 공격인 질문.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결함 있는 존재로 돌아보게 하는 질문. 이 질문은 "왜 결혼을 하지 않으셨나요?" 일 수도, "아이를 낳는 건 여자의 본성 아닌가요?" "여자들은 일보다 사랑에서 더 성취를 얻지 않나요?"일 수도 있다.

리베카 솔닛은 이 질문에 깃든 폭력에 대해 거듭 사유한다. 그녀는 저런 질문이 사실 질문이라기보다 단언이라고 한다. "스스로를 개인으로 여기고 자신의 앞길은 자신이 개척한다고 생각하는 우리더러 너희가 틀렸다고 단언하는 말(16p)" 이다. 그 질문은 "여자라면 반드시 아이를 가져야 하고 따라서 여자의 생식 활동은 자연히 공적 문제라는 가정을 깔고 있(17p)"고,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로, 그 질문은 여자에게 적합한 삶의 방식은 하나뿐이라고 가정했다.(18p)" 그리고 그녀는 말한다. "여자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정답은 없고, 여자들이 습득해야 할 기술은 오히려 어떻게 그 질문을 거부할 것인가인지도 모른다."(18p)고.

사람들은 세상에는 답이 여러개일 수 있는 열린 질문이 있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닫힌 질문도 있다.
정답이 하나뿐인 질문, 최소한 질문자의 입장에서는 하나뿐인 질문이다.
우리를 무리 속으로 몰아놓고 우리가 무리로부터 벗어날라치면 물어뜯는 질문, 질문 속에 이미 답이 포함되어 있으며 실은 우리를 강제하고 처벌하는 것이 목적인 질문이다. 내 인생의 목표 중 하나는 진실로 랍비처럼 문답할 줄 아는 자가 되는 것, 닫힌 질문에 열린 질문으로 답할 줄 아는 것, 내 내면에 대한 권한을 스스로 가짐으로써 다가오는 침입자에 맞서서 훌륭한 문지기가 되는 것.
최소한 "왜 그런 걸 묻죠?" 라고 재깍 되물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18-19p)

작년에 정희진 선생님과 만났을 때도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었다. 내 인생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어떻게 말도 안 되는 질문에 '우아하게' 대답하는 거냐, 하는 거고 더 중요한 건 어떻게 그런 질문에 대답하기를 거부하는 거냐 하는 거라고. 그리고 우리에게 조언해주셨다. "그런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줄 알아야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고. 이건 십수 년 동안 활동한 활동가들만이 내어줄 수 있는 조언이다. 너무나 많은 질문에 찔려본 사람, 오만 군데에 구멍이 나서 피를 줄줄 흘려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다. 이걸 보면서 지금껏 날 후려친 수 많은 질문들, 단지 질문함으로써 날 동등한 대화자로 인정하지 않고 인간 이하의 존재, '자궁'을 가진 존재로 환원해 버리는 폭력적인 질문들을 떠올렸고, 그것들이 옭아맨 언어의 그물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애처로운 발버둥을 생각했고, 그래서 좀 울었다. 왜 그때 난 그 질문을 "폭력"이라 규정하고 단번에 거부할 수 없었던 걸까? 

침묵의 짧은 역사

이어지는 [침묵의 짧은 역사]의 장은, 페미니즘을 어느 정도 공부한 사람이라도 거듭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이 글은 단순 정보를 엮어 독자에게 흐름을 설명해주는 글이 아니다. 수 천년 동안 계속되어온 침묵의 화석을 현장에서 매번 발견해 온 목격자의 증언이다. 침묵의 거대한 바다에 아직도 우리가 잠겨있음을, 수면에 겨우 고개만 내밀고서 뻐끔뻐끔 증언하는 글이다. 행간마다 오랜 시간 축적된 슬픔과 분노가 묻어나온다.

침묵은 금이라고, 어릴 때 나는 들었다. 나중에는 모든 것이 바뀌었다. 침묵은 죽음이라고, 에이즈를 둘러싼 방기와 억압에 맞선 퀴어 활동가들은 거리에서 외쳤다. 침묵은 말해지지 않은 것, 말할 수 없는 것, 억압된 것, 지워진 것, 들리지 않는 것으로 이루어진 바다다. 그 바다는 말하도록 허락된 사람, 말해질 수 있는 것, 들어주는 사람으로 이루어진 섬들을 에워싸고 있다. 침묵은 여러 이유에서 여러 방식으로 일어난다. 우리는 누구나 말하지 않은 말로 이루어진 자신만의 바다를 갖고 있다. (34p)
여성에 대한 폭력은 종종 여성의 목소리와 이야기에 대한 폭력이다. 그것은 여성의 목소리를 거부하는 것이고, 그 목소리의 의미를, 즉 자주적으로 결정하고, 참가하고, 동의하거나 반대하고, 살며 참여하고, 해석하고 이야기할 권리를 거부하는 것이다.
남편은 아내를 때려서 침묵시키고, 강간을 저지르는 데이트 상대나 지인은 피해자의 '싫다'는 말이 자기 몸에 대한 권한은 자신에게만 있다는 뜻임을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사회의 강간문화는 여자의 증언에는 가치도 신뢰성도 없다고 선언하며, 낙태 반대 운동가들은 여성의 자기결정권마저 침묵시키려고 하며, 살인자는 여자를 영원히 침묵시킨다. 이는 모두 피해자에게는 아무 권리도 가치도 없으며 피해자는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고 선언하는 행동이다.
여성을 침묵시키는 행위는 좀더 사소한 방식으로도 벌어진다. 어떤 여자들은 온라인에서 끈덕진 괴롭힘을 겪다가 입을 닫아버리고,
대화 중에 상대가 끼어들거나 말을 가로채는 일을 겪으며, 얕보이거나 깔보이거나 무시당한다. 목소리를 갖는 건 중요한 일이다.
그것이 인권의 전부는 아니지만 핵심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성의 권리와 그 결핍의 역사를 침묵과 그 침묵을 깨는 일의 역사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38~39p)

레베카 솔닛은 철학자 레이 랭턴이 구분한 침묵의 세 종류를 언급한다. 첫째는 문자 그대로의 침묵이다. 둘째는 이야기 해도 듣는 사람이 없는 경우이다. 셋째는 말을 해도 그말로 의도했던 행동을 수행하는데 실패하는 경우다. 여성이 '싫다'고 말하는 경우가 그에 속한다. 여자들은 거부하려고 '싫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포르노그라피적 맥락에서 곡해되어 애초의 의도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들. 또는 이야기를 해도 아무도 듣지 않거나, 믿어주지 않는 사람들. 이야기해도 그 원래의 의도 자체가 불신당하는 사람들. 여성과 소수자들의 침묵은 여전히 말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섬을 둘러싼 바다이고, 이 바다의 얼음은 아직도 깨어지지 않고 있다. 이 침묵은 기존의 공고한 가부장적 체제에 의해 유지되고 있고, 이 침묵을 벗어나려고 하는 시도들은 제제받고 처벌당한다.

수천년 된 침묵을 깨려는 행동이 몇십년 전부터 활발해지게 되었지만, 이건 단 몇 세대의 작업으로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말한다. 이미 여자는 평등을 얻었다고. 그러나 그것은 여자들이 이제야 겨우 첫 번째의 침묵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여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여자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는 사람들은 여전히 거의 없다. 여자들의 말은 무시당하고, 그저 흘러지나가고, 사라진다. 얼마 전에 본 다큐에서 다나 해러웨이는 말했다. "여자들이 이룬 업적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지를 보세요." 리베카 솔닛은 이 침묵의 역사를 깨뜨리기 위해, 기억되는 역사의 지형도를 바꾸기 위해 기나긴 투쟁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것은 "종종 전투에도 휘말려야 하는 창조와 파괴의 과정"이다.

봉기의 해

"페미니즘 리부트"는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었다. 2014년 미국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일어났다. 리베카 솔닛은 2014년이 여성과 페미니즘의 분수령이었다고 한다. 여자들이 "강간, 살인, 구타, 길거리 성희롱, 온라인 협박 등 여성에 대한 폭력의 전염병을 잠자코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시끄럽게 굴고 혁명을 일으켰던 해였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와 매우 유사하게 온라인 상에서 촉발되었다. 여자들은 그 해에 일어난 각각의 사건들이 그냥 조용히 묻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고, 해시 태그를 만들어 온라인 상에 전파했다. #yesallwomen(여자들은 다 겪는다), #whyileft(나는 왜 헤어졌나), #whyistayed(나는 왜 참았나) 등의 해시태그가 유행하며 수 많은 여자들에게서 가지각색의 증언과 고발들이 쏟아져나왔다.

이는 2015-16년, 우리 사회에서 벌어진 일련의 여성혐오 사건들로 인해 온라인 상에 뜨겁게 촉발되었던 페미니즘 운동 현상과 맞닿아 있는 것 처럼 보인다. 2015년 장동민의 발언에 분개한 여자들이 #Go Wild, Speak Loud, Think Hard(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라)는 구호를 만들어 반격에 나섰으며 메르스 사태에 이르러서는 '메갈리아'라는 전대미문의 여혐 미러링 사이트 창설에 이르렀다. 그 뒤로 2016년엔 '강남역살인사건'과 '문화계성폭력' 사건들을 거치며 오프라인과 온라인 양쪽에서 젊은 층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페미니즘 운동이 일어났다.

 리베카 솔닛은 이 해를 '봉기의 해'라고 부르며, 왜 하필 이때 이 문제가 전면으로 부상했는지에 의문을 던진다. 작년과 제작년 페미니즘 강연에 가서 만났던, 오랫동안 운동을 하신 활동가 분들도 이 지점을 궁금해 하셨다. "왜 하필 지금?"이냐고. 그 전에도 남자들은 무수히 헛소리를 많이 하고, 여자들은 수 없이 남자에게 억울하게 죽어갔는데 왜 갑자기? 라는 것이 그분들의 물음이었다. 우리는 뭐라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전까지 우리는 깜깜한 대륙에서 잠자코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인식의 파도가 몰아닥쳤달까. 시대가 바뀌어 남자애들과 평등한 대우를 받으며 교육 받아와서 '내가 여자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지 잘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거대한 파도에 후려져져서 '여자'에게 허락된 좁고 깊은 지하공간으로 떨어져 내린 기분이었다.

 어쨌든 리베카 솔닛은, 그리고 우리나라 페미니즘 운동의 대모님들은 말한다. "이 순간을 몇 십년 동안 기다려왔다"고.
 봉기의 해에 몇 가지 계기가 된 사건들이 발생하긴 했지만, 그 정도의 사건은 그 이전에도 숱하게 일어났다. 이번의 봉기는 지진과도 같은 지각변동 처럼 갑자기 터져나왔다. 리베카 솔닛은 여기에 대해 이전 세대들의 노력 때문에 세상이 이미 바뀌었다는 것, 그리고 소셜미디어의 부상으로 누구나 이야기를 퍼뜨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꼽지만 솔직히 그것만으로는 분석하는 게 역부족이라고 생각한다. 지진이 일어날 때 그것의 원인을 정확히 예측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 처럼, 이번의 봉기도 수 많은 사건과 요소들이 누적되어 갑자기 터져나온 것일 거다.

 분명한 것은, 봉기 이후의 세상은 완전히 바뀌어버렸다는 거다. 여자들은 자신들이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을 거란 걸 보여줬다. 성추행범들은 마땅한 처벌을 받지는 않을 망정 자신들이 언제든 사회적으로 공개 망신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자들은 더 이상 이전처럼 '여자를 함부로 대하고도 처벌받지 않을 권리'를 누릴 수 없게 되었다. 몇몇 남자들은 자신들이 그럴 권리(맘놓고 성추행할 권리, 여자를 항상 성적 대상화할 권리)를 빼앗겼다는 것에 분개하여 백래쉬를 일으켰지만, 나아가는 과정에서 감내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김현미 교수님은 2015년을 '한국페미니즘의 원년'으로 지칭하며, 대한민국의 페미니즘은 이제서야 시작되었다고 하셨다. 일본에서도 2016년 #남녀가뒤바뀐일본사회 란 해시태그가 유행하며 미러링 열풍이 불어 한일 연대를 위한 트위터 계정이 생긴 적도 있었다. 폴란드에서도 2016년 수많은 여성들이 검은옷시위를 열어 낙태죄를 폐지시켰다. 미국, 한국, 일본, 폴란드 뿐만 아니라 수 많은 나라들에서도 이와 비슷한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기를 꿈꾼다. 언젠가는 거대한 지진이 일어나 그동안 잠겨있던 침묵의 바다가 드러날 수 있기를.


*내가 인상깊게 읽었던 건 대부분 1부에 수록된 글들이다. 2부의 글은 상대적으로 짧은 기고문들이어서 소품격으로 느껴졌다.
문학에서의 여성혐오 문제를 다루고 있는 글이 몇 편 있는데 케이트 밀레트의 '성의 정치학'을 읽은 사람이라면 그다지 새롭지 않은 내용이다. 아직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여기 수록된 글들이 이 문제에 대한 좋은 안내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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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7-09-06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읽은 책이었는데 님의 리뷰를 읽으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멋진 리뷰입니다^^

힐데 2017-09-08 11:47   좋아요 0 | URL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Nina 2017-09-07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다른 글들에서 보여주신 역량에 비해 본서는 입서 경로 때문인지 홍보동기에 치우쳐 독창적 비판 관점은 다소 결여된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하는 궁금해하시는 근래의 세계적 페미니즘 고양 현상의 원인에 대한 유력설들을 정리한 내용이니 일독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1. 가정-학교에서의 성평등 교육 대 사회적 성불평등 온존유제 간 모순심화설
; 일명 ’드높은 기대’설

¶ Orr, Judith(2015). [Marxism and Women’s Liberation]. Bookmarks.
국역본: 오어, 주디스(2016). [마르크스주의와 여성해방]. 책갈피.
(특히 ˝제1장 드높은 기대˝를 집중 검토할 것.)

한국을 포함해 국제적으로 뉴페미들의 ˝feminist moment˝에 대한 경험적, 직관적 자기고백들은 매우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개 이 범주에 일치하며 크게 벗어나지도 않음.

2. 신자유주의 갈등 증폭설
←노골적 차별, 배제에 의한 불평등 (온존 아닌) 심화설
¶ http://blog.aladin.co.kr/790316263/9522683

2.1. 신자유주의적 경쟁주체의 자생적 대응양식 중 내적 대응으로서의 극단적 자기계발 노오력과 외적 대응으로서의 혐오, 분노.

2.2. 신자유주의 체계 위기에 따른 중산층 붕괴 및 남성-가부장제 (생계부양자 모델) 위기에 따른 여혐 심화.

2.3. (중공업 이윤율하락과 사양화 이후) 탈산업사회 경제, 특히 post-Fordism과 노동유연화에 가장 적합하며, 경제위기 시 제1공격 취약대상인 여성 계층에의 착취, 수탈, 공격의 집중

크게 이 두 계열, 4대 기본요소의 증폭 상호작용에 의한 시너지 효과로 페미니즘이 폭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음.
: 요약하면, 가정-학교에서의 성평등 교육은 꾸준히 확대 경향을 지속해왔으나 사회적 불평등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다, 신자유주의기에 오히려 모든 차이들이 노골적 차별로 전치되면서 대폭 심화되고 붕괴-위기기에 감정적 갈등, 혐오 폭발까지 겹쳐 양 경향의 모순이 최대치에 이른 것이 그 원인이라 정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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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데 2017-09-08 11:45   좋아요 0 | URL
오...이렇게 길게 댓글을 남겨주시다니..추천해주신 도서 꼭 읽어보겠습니다!
아래 정리해 주신 요지는 작년에 이런 저런 강연회 다니면서 대체적으로 접하긴 했는데 그래도 시원하게 이해가 되지 않더라구요. 책을 읽으면서 좀 더 맥락을 꼼꼼히 짚어봐야겠습니다.

저는 이것 외에도 가정-학교 내에서 여성들에게 형식적인 평등이 주어졌지만 실제로 어린 여성들에게 페미니즘 교육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던 것도 한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여성이라는 게 어떤 걸 의미하는지 모르고 나름대로 평등한 대접을 받으면서 살아가다가 갑자기 차별을 자각하게 되고 충격을 받은 거지요.

제도를 바꾸는 데 힘썼던 80년대 페미니스트들과는 달리 90년대에 활동했던 영페미니스트 세대는 ‘일상의 정치화‘를 주장하며 자신들만의 공동체 생활과 문화적인 영역으로 활동 범위를 축소했고 그래서 이후 세대에 자신들의 흐름을 충분히 전수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여성 세대 간의 단절이 일어난거지요. 실제로 저를 포함한 현재의 20대-30대 초반세대는 공교육 과정에서 제대로 된 페미니즘 교육을 한 번도 받지 못했으며, 윗 세대에서도 그런 영향을 줄 만한 선배들을 일상에서 만난 적이 거의 없어 페미니즘의 무풍지대에서 자라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신자유주의가 심화되면서 여성혐오가 나날히 심해지자 극도의 스트레스 속에서 분노를 느끼고 갑작스런 자각과 함께 반발하게 된 거지요.

제가 궁금한 것은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세대 간의 단절이 있었을까? 그리고 그 단절이 근래의 갑작스런 세계적 페미니즘 고양 현상의 공통 원인일까? 하는 부분인데... 이것에 대해 명쾌히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더라구요. 2세대의 ‘일상의 정치화‘ 라는 문화적 페미니즘 물결이 영미권에서도 있었긴 하지만 그게 우리나라처럼 세대 간 단절을 일으킬 정도였는지도 모르겠구요. 그리고 아시아와 영미권 이외 다른 문화권 - 유럽, 중남미, 중동 - 등에서도 이런 페미니즘 고양 현상이 있었는지, 이런 점들은 계속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있네요. 다른 국가 상황까지 조사해 볼 여력이 없어서;

누가 이런 걸 좀 거시적인 관점에서 분석해줬음 좋겠는데 그런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했네요... 그리고 저는 리베카 솔닛에게는 애초에 이런 현상들에 대한 독창적인 분석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리베카 솔닛은 페미니즘을 깊게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라 액티비스트이자 에세이스트니까요. 서평단에 뽑혀 더 긍정적인 관점에서 리뷰를 쓰기는 했지만 그걸 차치하고서라도 저는 이 책이 나름의 역할을 다 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녀가 할 역할은 최대한 자신의 경험을 살려 전달력 강한 언어로 페미니즘에 문외한인 사람들이나 초심자들을 끌어들여 관심 갖게 하는 것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나라에 이런 역할을 하는 책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구요. 더 깊고 날카로운 분석을 보여주는 책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긴 하지만요.

Nina 2017-09-08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축자적 독해를 하시는 경향이 있으신 게 아닌가 싶어요.
원래 제1계열 원인은 ˝가정-학교 교육에서의 성평등 (확대경향)˝이었는데 댓구를 맞추기 위해 ˝가정-학교에서의 성평등 교육˝으로 바꿨던 거고 명시적, 의식적 (페미니즘) 이론/지식 교육 뿐만 아니라 암묵적, 묵시적, 비형식적 풍조 (전승으)로서 광의의 교육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나 불필요한 혼란을 피하기 위해 ˝가정-학교에서의 성평등 문화/환경˝으로 바꾸기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정리하면 힐데가르트님의 진술경험도 다른 국제적 뉴페미들처럼 이 범주에 거의 포함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덧글이나 댓글로 반복적 의견교환을 자주 하는 편은 아닌데다 보충설명이 쪼끔 길어질 수도 있을 듯해 짬이 나는대로 틈틈이 추가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아 너무 죄송하지만 이하는 나중에 시간 되실 때 천천히 다음의 본문 하단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 http://blog.aladin.co.kr/790316263/9554127

우선 급한대로 짧게만 말씀드리면,
객관적 Feminism 운동사를 고찰해볼 때 Feminism이론과 교육의 계승/단절 여부 등의 Weberian factor는 그리 결정적 변수가 아니고 오히려 외생적인 경기변동과 경제위기를 주변수로 이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는 주기를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세대 feminism은 자유경쟁 증기기관 산업자본주의기 섬유업 등의 경공업 분야에 노동자로 대거 진출하며, 이를 위한 (최소)대중교육으로 의식이 성장하고 역량이 축적된 여성계층이 1873~1895년 연간의 자본주의 제1차 구조위기를 전후로 도전받으며 그에 대한 저항으로 참정권 이쓔를 중심으로 부상했던 것이며,
1929~1945년 연간의 제2차 구조위기시엔 독자적 feminism 운동으로 가시화하진 못했으나 연속되는 세계대전의 포화와 지구적 계급투쟁의 열기 속에 완전히 흡수되어 동시 출현했었다고 보아야하고,
1970~1980년 연간의 제3차 구조위기를 전후로 68운동에 뒤이어 2세대 feminism이 부상했으며,
이번 2007~2008년 세계금융위기에 의한 대공황이라는 제4차 신자유주의 구조위기로 세 번째 feminism의 대물결이 몰려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3세대 feminism이 2세대 post-feminism에 불과했고 이번이 진짜 3세대 feminism이 될지, 아니면 그냥 4세대 feminism이 될지는 이번 물결의 크기와 구체적 성격에 의해 결정될 것입니다.)

이런 주기성에 입각해서 볼 때, 무의식화된 아비튀스적 문화축적과 제도만이 계승될 뿐 Feminism 운동과 이론 자체의 부침, 단절은 세계적 보편성이며 각 물결마다 그 초반기에 특정 경향성들이 압축반복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전 사회적으로 계승되는 요소인 이 아비튀스와 제도도 누적적으로 보전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 위기기와 신자유주의 같은 우파집권 반동기에 대대적 공격을 받아 후퇴와 퇴행을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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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스러운 탐정들 1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우석균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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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니 한 동안 정신이 멍했다. 1000페이지에 달하는 페이지들과 씨름하며 보낸 1주일 사이에 나이 한 살은 더 먹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방대하고 강도 높은 경험을 제공해 주는 작품이었다.

야만스러운 탐정들은 실패한 혁명가들에 대한 소설이다. 사라진 혁명가, 혁명에 실패한 시인들의 이야기. 울리세스 리마와 아르투로 벨라노가 이끄는 '내장사실주의자' 들은 옥타비오 파스로 대표되는 형이상학적 시와 파블로 네루다로 대표되는 정치참여적 시 양대 산맥에 반발하여 새로운 사실주의를 천명하고 문단의 혁명을 꾀한다. 그들은 뚜렷한 비전과 전략도 없이 그저 기득권을 지닌 모든 것을 적으로 두고 반발한다. 그저 같은 뜻에 의해 또는 친분에 의해 모여 시적 혁명을 꿈꾸며 좌충우돌 하고 있는 청춘들을 보고 있자니 19세기 말 프랑스 상징주의자들나 20세기 초 로스트 제너레이션, 또는 50년대의 비트 제너레이션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격변하는 시대에 태어난 젊은 문인들, 기존의 문학 제도에 반발하며 새로운 시대의 기류를 체화하고 그것을 새로운 형식의 문학으로 구현하려고 애쓰는 혁명가들.

'내장사실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진 않지만 그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모든 시인이 꿈꾸는 혁명은 같다. 그건 새로운 '모더니티'에 이르는 것이다. 모던modern이란 라틴어 modernus에서 도출된 단어로, 라틴어로 modo란 "바로 지금"의 뜻을 지니고 있다. 모더니티란 바로 지금의 생생한 현재성을 포착하는 동시에 그것을 시대에 구애 받지 않는 영원성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모더니티를 획득하기 위해 시인들은 기존의 관습적인 모든 형식과 내용을 거부해야 한다. 자신을 하나의 전도체로 두고 동시대 또는 도래할 시대의 흐름을 새 형식으로 기록해야 한다.

"내장"사실주의라는 희화화된 이름도 모더니티의 이런 반항적이고 혁명적인 속성을 드러내고 있다. '사실주의'는 근대 문학을 문학으로써 규정지었던 주류 문학사조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사실을 사실 그대로 묘사한 것이 아니다. 사실이란 무엇인가? 객관적인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은 시대적, 지리적, 정치적으로 그때 그때 다른 방식으로 직조되는 구성적 대상이다. 그러나 문학판에서의 '사실주의'는 기존 세력이 파악하고 구성해 온 '사실'만을 사실로 규정하며 또 다른 '사실'들을 억압하는 기준으로서 작용한다. '내장사실주의'는 이런 문단 기득권력이 주창하는 사실주의의 엄숙함을 비꼬며 새로운 '사실성'을 추구하는 동시에 사실주의를 정의상 그야말로 속부터 뒤집어버리는 것이다.

이 소설이 단순히 새로운 리얼리즘을 포착하려는 어린 문인들의 치기어린 혁명을 그린 것이라면 이처럼 많은 열광을 낳을 수 없었을 것이다. 소설 상에서 어린 내장사실주의자들이 모여 왁자지껄 소동을 일으키는 것은 고작 1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소설의 진가는 2부에 있다. '후안 가르시아 마데로' 라는 어린 시인의 1975년 11월 부터 12월까지의 일기로 기록되었던 1부와 달리 2부는 1976년 부터 1996년까지 무려 20여년 동안 어떤 대안도 발견하지 못하고 현실에서 몰락해가는 내장사실주의자들의 행로를 수 많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추적한다. 이 오랜 세월 동안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1968년 멕시코 틀라텔롤코 학살, 1973년 칠레 군사 쿠데타, 1979년 니카라과 혁명 등 무수한 정치적 사건이 발생하고 수십 명의 증언자들은 각각 라틴 아메리카, 유럽, 아프리카, 각각의 대륙에서 울리세스 리마와 아르투로 벨라노의 행적에 대해 스치듯 언급한다. 그 와중에 내장 사실주의자들은 서로 무수히 만났다 헤어지며 결혼하고 애를 낳기도 하고 시 쓰기를 그만 두기도 하고  자동차 사고로 죽기도 한다. 몇 백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 속에서 각국에 사는 수십 명의 목소리로 진행되는 세월의 방대함이란...'장편' 소설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문학적 시간 체험이었다.

1부는 물론이고 수십명이 돌아가며 발화자의 위치를 점하는 2부에서도 이 소설의 주인공인 울리세스 리마와 아르투로 벨라노는 화자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의 혁명과 몰락은 오직 다른 사람들의 증언에 의해서만 기록된다. 왜 일까? 왜 볼라뇨는 주인공들로 하여금 직접 말하게 하지 않았는가? 내 생각엔 그들이 타자로서의 혁명가들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들은 역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 실패한 혁명가들이며, 우리는 그들의 내력을 일관되게 파악할 수 없다. 그들이 무엇을 꿈꿨는지, 무엇을 시도했고 어떻게 스러져갔는지, 모자이크와도 같은 조각들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설정은 또한 이 소설의 탐정소설적 요소를 강화시킨다. 소설의 2부는 울리세스 리마와 아르투로 벨라노가 어린 창녀 루페를 포주 알베르토로부터 빼돌리기 위해 도망치는 동시에, 기록을 거의 남기지 못하고 잊혀진 1920년대 내장 사실주의의 창시자인 '세사레아 티나헤로'라는 시인을 찾아 떠나며 시작된다. 2부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수 많은 화자들의 산발적 증언으로 이뤄져 있는데, 여기서 남는 의문점은 대체 이 2부를 누가 엮었느냐 하는 문제이다. 리마와 벨라노가 세사레아의 발자취를 쫓아 그녀를 알았던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도서관에 가서 자료를 뒤적이는 것처럼, 이 책의 2부를 엮은 필자는 리마와 벨라노의 발자취를 집요하게 좇아 기록한다. 개별 화자들의 이름과 증언한 장소와 시간은 모두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지만 정작 이들의 증언을 모아서 엮은 사람의 정체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누가 그토록 열정적으로 리마와 벨라노의 행적을 좇아 사람들의 증언을 엮어냈는가? 2부 화자 중 한 명인, 내장사실주의의 유일한 연구자를 자처하는 파추카 대학의 에르네스토인가? 아니면 볼라뇨 작가 자신인가? 또는 볼라뇨가 소설 안에 숨겨 놓은 또 다른 화자인가? 명확히 알 수 없다.

이것 또한 볼라뇨가 소설 안에 숨어 놓은 미스테리이다. 독자가 직접 여행자가, 그리고 탐정이 되어 사건의 전말을 적극적으로 파악하도록 만드는 유인책이다. 독자들은 세사레아를 찾는 리마와 벨라노처럼, 리마와 벨라노의 행적을 찾는 야만스러운 탐정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소설이 제시하는 사건을 단순히 따라가는 게 아니라, 집중하고 분석하고 적극적으로 재구성하는 능동적 독자가 되길 요구받는 것이다. 사건은 벌어졌다. 리마와 벨라노는 혁명에 실패하고 현실에 얻어맞고 짓이겨져 세월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왜 그들은 실패할 수 밖에 없었나? 누가 그들을 패배하게 만들었나? 언제 그들은 실패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일까? 단서는 2부의 증언들이다. 독자는 2부의 수 많은 증언들을 날실과 씨실처럼 짜 맞추어 사건을 재구성하고 복기해야만 한다. 이 소설은 단 한 번의 체험으로 소비할 수 없는 작품이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부둥켜 안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다시 페이지들을 뒤적이며 자신만의 답을 찾아내려 고투해야 한다.

작품을 보면서 가장 강렬했던 순간은 세사헤라 티나헤로가 남긴 유일한 시가 등장한 장면이었다. 보는 순간 울 것 같았다. 너무 슬펐다. 그 시가 이 소설의 내용 전체를 함축하고 있는 것 같았다. 3행으로 나눠진 것 중 각 행이 소설의 각 챕터를 형상화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순탄하게 흘러가는 어린 시절 - 모험을 떠난 청년의 방랑 시절 - 그리고... 뒤에서 리마와 벨라노도 이와 비슷하게 설명하긴 하지만, 내게 있어서 3행의 느낌은 '정지'이다. 풍랑이 날카로운 유리판 처럼 굳어져 버리는 것, 더 이상 흐름을 탈 수 없게 되는 것, 오도 가도 할 수 없이 추락하는 길 밖에 남지 않은 것. 

3부의 화자는 다시 1부의 어린 시인 가르시아 마데로이다. 시간적으로 역행하여 그들이 1부 마지막에서 여행을 떠난 바로 직후를 일기로 쓰고 있다. 그러나 이때의 일기는 1부와는 다르게 선형적이지 않고 모호하며 환상적이다. 사건이 일어나지만 이것들이 현실에서 일어났는지 환상과 신화의 차원에서 일어난건지 잘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이다. 소설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은 도형으로 끝난다. 이것 또한 세사레아 티나헤로의 유일한 시, 그리고 작품의 3부와 연계해서 이해하면 더 풍부한 해석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이 더 와 닿았던 것은 여기서 그리는 멕시코 문단의 모습, 더 넓게는 라틴 아메리카의 현실이 지금 한국의 현실과 너무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별다른 설명도 없이 무지막지 하게 줄줄이 언급되는 현대 라틴 아메리카 시인들 이름에 기가 질렸지만 점차 그들의 모습이 우리 나라 문단을 차지하고 있는 문인들과 오버랩 되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한 때는 혁명가였으나 정치 세력과의 결탁을 통해 권력을 얻고 부패한 거장들, 어떻게든 문단에서 한 자리를 차지해 성공하기 위해 거장들에게 알랑방귀를 뀌어 가며 착실히 그들의 스타일을 모방해가는 문인들, 문단의 권력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무것도 위반하지 않고 기득권들이 원하는 스타일대로만 글을 쓰는 문학지망생들, 각종 현상금 사냥꾼들, 명성과 신분상승을 위해 글을 쓰는 작가들, 서양의 스타일과 지식을 그대로 수입해 오는 지식인들, 식민주의에 찌들어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들. 모두 다 지금 한국의 상황을 그대로 묘사한 것만 같았다.

라틴 아메리카 또한 우리와 같이 식민지로서의 역사를 갖고 있는 땅이며, 아직도 정신적 식민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곳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많다. 하지만 우리 나라는 라틴 아메리카 보다 한 세대는 더 뒤쳐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라틴 아메리카는 1950-60년대에 '붐 문학'이라는 독자적인 문학의 흐름을 일으켜낸 역사를 갖고 있으며, 무엇보다 단일 국가가 아니라 대륙 전체가 연합하여 한 마음으로 혁명을 갈구하고 있다. 또한 정복자였던 스페인의 언어를 공통으로 씀으로써 대륙 전체가 단일 언어로 통일되어 있는 동시에 유럽의 한 부분인 스페인까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언어적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소수 언어를 쓰는 민족이며 그나마도 반토막으로 나라가 분단되어 턱 없이 적은 독자들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우리 나라는 세계 문학사에서 단 한 번도 독자적인 흐름을 일으킨 적이 없음은 물론이고, 내부적으로도 폐쇄적이고 파벌주의에 찌들어 같은 나라 독자들에게마저도 철저히 외면받고 있다. 문단 권력은 갈수록 공고해지기만 해 기존 권력의 '승인'을 받지 못한 작가들은 아예 작가로서 주목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하고, 기존 권력은 자신의 구미에 맞는 작품만을 선별해 문학의 다양성을 죽이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 나라에서도 문학 혁명이 일어날 수 있을까? 아니, 우리 나라의 세사레아 티나헤로는 누구였나? 리마와 벨라노는 누구인가? 있다면 나는 그들을 알아볼 수나 있을 것인가? 그들은 또 어떻게 문단의 몰매를 맞고 현실에 짓이겨져 비참하게 사라져 갈까?


*혁명을 꿈꾸는 문학도들이라면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소설이다. 그들의 실존적 문제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폐쇄적인 문단 권력과 정치 문제를 비꼬는 것도 깨알같은 재미가 있다. 중간 중간에 낯선 현대 라틴 아메리카 문학가들에 대한 언급이 시도 때도 없이 나오며, 중간에 한 내장사실주의자가 라틴 아메리카의 시인들을 마리콘, 마리카, 로카 등 유형으로 분류해 나누며 평하는 것도 나오는데 이게 만약 한국 문단 작가들에 대한 코멘트라면 정말 통쾌하고 웃겼을 거란 생각을 했다. 라틴 아메리카 문학도들은 훨씬 더 뉘앙스를 즐기며 재밌게 읽었을 것 같다. 그것 외에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이 스페인 이외에도 프랑스 문학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에 대한 내장사실주의자들의 동경이 대단했다.

*아르투로 벨라노
-> '아르투로' 랭보 + 로베르토 '볼라뇨'의 결합.
어린 나이에 프랑스 시에서 혁명을 일으키고 은퇴한 뒤 아프리카와 아랍지역을 떠돌았던 랭보 + 바르셀로나로 이주한 뒤 온갖 잡다한 일을 했던 볼라뇨의 인생이 결합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울리세스 리마
->호메로스, 제임스조이스의 '율리시즈' + 페루의 수도 '리마'
호메로스와 제임스 조이스의 히어로가 행했던 대서사시적 여행을 라틴 아메리카 대륙에서 펼치는


*정착민과 유목민들간의 싸움. 기득권을 가진 정착 시인들과 혁명을 하기 위해 이동한 유목시인. 문학의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한 탈주.그리고 유목민들의 처절한 패배. 들뢰즈가 천개의 고원에서 주창한 노마디즘을 문학적으로 구현한 느낌이었다. 작품 내용도 그렇고 구성도 그렇고. 요즘 보면 이전 세대와는 달리 철학이 문학보다 먼저 현대성을 선취하여 개념화하고, 그걸 문학이 뒤늦게 문학적으로 응용하여 구현하는 느낌이다. 들뢰즈와 데리다는 둘 다 문학적으로 글을 써서 철학과 문학의 경계를 지워버린 철학자들이기도 하고.
보르헤스 이후로 철학보다 먼저 시대성을 선취한 문학가를 본 적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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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됨을 후회함 - 모성애 논란과 출산 결정권에 대한 논쟁의 문을 열다
오나 도나스 지음, 송소민 옮김 / 반니 / 201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결혼을 하고 후회하는 중년 남성들의 이야기와 그런 그들의 고달픔에 공감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널리 퍼져 있지만, 
아이를 낳고 후회하는 여성의 이야기는 좀처럼 들어보기 힘들다.
만약 그런 이야기가 있다고 해도, 그건 여성의 입장에서 공감하는 게 아니라 여자를 악마화시키고 비난하려는 의도를 깔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그 사람은 결혼한 걸 후회한대' 라는 이야기에 대해 사람들은 일단 그 이유를 듣고 싶어할 테지만, '그 여자는 자기 애를 낳은 걸 후회한대.' 라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자동반사적으로 판결을 내리려고 한다. '어떻게 엄마가...!!'

엄마됨에 대한 후회를 금지하는 감정규칙

이스라엘의 사회학자 오나 도나스는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후회는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고 무언가를 형성하고 느끼는 삶의 모든 분야에서 나타날 수 있다.
그런데도 왜 엄마가 된 것을 후회하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 감정일까?"

오나 도나스는 이 사회에 '감정규칙'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감정규칙은 한 개인이 어떤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어떤 감정을 느끼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를 규정하고 규제한다. 사람이 죽으면 슬퍼야 하고, 결혼을 하면 기뻐야 하고 또한 아이를 낳으면 행복해야 한다는 것. 이런 규칙들은 어떤 상황에 마주해 개인이 고유하게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을 억누르게 하고 사회적으로 승인 받은 단일한 감정만을 표출하도록 한다. 출산을 장려하고 강요하는 사회에서는 아이를 출산한 여자들에게 오직 긍정적인 감정들만을 허락한다.

'후회'라는 감정은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를 지키는 수단으로 이용된다. 사회의 기대를 저버린 행동 - 흡연, 거짓말, 비혼, 낙태-에 대한 후회는 사회적으로 널리 인정받지만, 결혼이나 출산 등 정상 이데올로기에 대한 후회는 사회적인 지탄을 받는다. 결혼하지 않은 삶, 아이 없는 삶, 낙태경험에 대한 후회는 사회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감정이다. 엄마가 되고 싶지 않은 여성들도 이 '후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이를 낳도록 몰린다. 이 두려움은 모든 여성이 엄마가 되고 싶은 욕구를 타고 났고 출산을 해야만 여성으로서의 삶을 완성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무언가 '결여'된 인간이라는 사회적 압박에 의해 조장된다. 많은 여성들이 아이를 낳는 것 이외의 길을 찾을 수 없어서, 그것만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별 다른 고민 없이 아이를 낳는다.

그리고 그 경험을 후회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묻혀진다. 모성을 신성시하는 사회에서 엄마됨을 후회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도덕적인 지탄의 대상이 된다. 엄마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개인이 느끼는 온갖 양가적인 감정들은 모성에 대한 견고한 신화에서 비롯된  비난 앞에서 억압된다. 여성으로서의, 엄마로서의 삶에 전연 무지한 사람도 '어떻게 엄마가..!' 라는 말 한마디로 한 여성이 아이를 기르며 느낀 온갖 감정들을 일축시킬 수 있다. 그만큼 엄마로서의 삶에 대해 사회가 가하는 억압은 뿌리가 깊고 강력하다. 엄마됨을 후회한다는 감정은 정당하지 않은 것, 물리쳐야 하는 것, 또는 원칙적으로 아예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며 전면 부인된다. 왜냐면 엄마들의 후회는 사회 질서를 위태롭게 하기 때문이다.

오나 도나스는 엄마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26~73세 사이의 유대인 여성 23명을 인터뷰하며 지금까지 금기시 되어왔던 '엄마됨을 후회함'이란 감정을 끌어내 보인다. 많은 여성들이 사회적 지탄이 두려워 인터뷰를 피했고 참여한 여성들도 자신의 신원을 절대 밝히지 말 것이란 조건으로 인터뷰를 승낙했다고 한다.  신의 경험과 느낌에 대한 그들의 생생한 증언은 '엄마됨을 후회함'이란 감정을 어느 정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나에게도 생경하게 다가오는 충격이었다.


Q)"과거에 지금의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면 여전히 엄마가 되겠습니까?" 

스카이(15세~20세 사이의 자녀 2명, 20세~25세 사이의 자녀 1명) : 내가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틀림없이 아이를 낳지 않을 거에요.
도렌(5세~10세 사이의 자녀 3명): 이 말을 하는 것이 끔찍하게 고통스럽고 아이들에게는 절대 말하지 않을 거지만, 나는 완전히 아이들을 거부해요. 아이가 없는 것에 대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에요.
데브라(10세~15세 사이의 자녀 2명):아이들은 사랑스럽고 놀라운 존재고 믿을 수 없는 선물이고 내 인생의 또 한 차원을 열어주었지만, 만약 내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이 길로는 두 번 다시 접어들지 않을 거에요.
오델리아(1~5세 사이의 자녀 1명) : 아이를 가진 게 나로서는 실수였어요. 그래요, 실수였죠, 아이를 낳는 건 의무였으니까요. 하지만 나는 내 인생을 살고 싶어요. 인생 계획이 있어요. 때문에 나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일, 다른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후회해요.

이외에도 인터뷰이들은 지금 같은 통찰력과 주변의 지원이 있었다면 -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이 주변에 받아들여졌다면- 엄마가 되는 길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대부분의 엄마들이 아이들과 엄마가 된 것에 대한 후회는 완전히 다른 것임을 분명하게 구별해줄 것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엄마로서의 삶에 대한 감정과 아이들에 대한 감정의 구별이다. 그들은 아이를 사랑하고 진심으로 유대감을 느낀다고 강조한다. 다만 자신이 그들을 보살펴야 하는 엄마라는 위치에 있다는 게 싫다는 것이다. 후회는 아이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자녀가 없는 상태를 동경하지만 이미 태어난 아이들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후회는 '엄마라는 위치'와 관련된다. '나는 엄마라는 역할이 싫다' 라는 것이 인터뷰에 참여한 모든 여성들의 공통적인 메시지였다.

그들이 한 말 중에 인상적이었던 것은, "내가 현재 살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을 보살피기 위해서지 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가 아니다." 라는 것이었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여성은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고 그 아이의 보호자로서 살아야 한다. 항상 남을 보살펴야 한다는 것. 단 한 순간도 온전히 나의 삶을 살 수 없으며 항상 남의 삶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 아이를 낳아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압박감이다. 그들은 말한다. 아이를 가진 이후로 단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고.
한 인터뷰이는 엄마가 된다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렸다. "돌이킬 수 없는 것. 노예화되는 것. 혹사당하는 것"

그런데도 왜 아이를 낳았느냐고 묻는 질문에, 그들은 자신을 몰아세우고 부추겼던 사회적 압박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니나는 되돌아봤을 때 분명한 것은 인생이 이끄는 대로 따랐다는 것.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스스로 정하지 않고 끌려다녔다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데브라는 아이를 갖는 다는 것 자체가 여성으로서 이 사회에서 주류에 속할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이라고 말한다. 그녀의 표현에 의하면 "정답 칸에 체크했으니 더 이상 모든 전선에 나서서 싸울 필요가 없는 것" 이다. 또한 대부분의 여자들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될 까봐, 적응하지 못하게 될 까봐 두려워 다들 하는 길을 따라갔고, 큰 고민 없이 아이를 낳는 걸 선택했다고 말한다.

출산과 양육이라는, 트라우마적 경험


우리 중 하나가 태어나면 다른 하나는 땅에 묻힌다. 수 많은 여성들이 아이를 출산함과 함께 이전의 정체성의 해체를 맞이하고 혼란을 겪는다. 오나 도나스는 사회가 아이를 낳지 않은 여성을 결함있는 사람으로 간주하는 반면, 아이를 낳은 여성들은 오히려 출산 전의 삶이 더욱 풍부하고 만족스러웠으며 엄마가 됨으로써 결함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느낀다는 점을 밝힌다. 많은 여성들에게 출산의 경험은 완전함으로의 이행이 아니라 충만함의 상태에서 공허함의 상태로의 이행이었다는 것이다. 출산 전에는 상대적으로 성구별에 구애받지 않았던 반면, 출산 후에는 여성성에 완전시 귀속되어 버린다. 여성들은 사회가 추구하는 모범상의 덫에 걸려든다. 

또한 엄마가 되는 것은  사회적 소수자로서 차별받고 자랐거나,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에게는 고통을 배가 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아이를 키우면서 다시 자신이 불행했던 옛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으며 고통받는다. 과거에 묻어두고 싶었던 기억들이 자식을 통해 다시 연속적으로 현실에서 벌어지면서 괴로움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엄마가 된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기 보다는 억압적인 사회 질서를 재생산하고 원래의 부조리를 더욱 첨예화하고 부각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오나 도나스는 엄마가 된다는 것 자체가 여성에게 지속적인 트라우마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아이들과 여성에게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일로 간주되어온 엄마가 되는 일이 실은 여성을 완전히 소진시키고 말살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는 모성애로 가득한 어머니, 창조의 기쁨에 젖은 어머니, 아이를 안고 행복에 겨운 어머니의 모습을 끊임없이 생산하며 어머니들에게 감정적인 압박을 가한다. 아이를 낳은 어머니라면 당연히 아이를 가진 것에 최고의 행복을 느껴야 하며, 그걸 후회한다면 어딘가 도덕적으로 비정상적이고 결함있는 여자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나는 살면서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아이를 낳고 기른다는 건 내게 항상 완전히 다른 사람의 이야기였다. 내 삶에 '아이'라는 것이 끼어드리란 것을 상상해 본 적도 없다.아이가 있는 삶이 어떨지 스치듯 잠시 생각해 본 적은 있지만 그건 나에게 맞는 삶이 아닐 것이라는 확신으로 매번 이어졌다.
나는 나만의 삶을 살기에도 벅찬 사람이니, 남을 보살피기 보다는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평생을 살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신념이 있었는데도 종종 나는 혼란에 빠졌다. 
나중에 후회하게 되지 않을까?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킨다는 신성한(!)일이고 새로운 삶의 단계에 들어서는 일인데 그걸 경험하지 않는다는 건 미성숙한 채로 머물러 있는 게 아닐까? 아이를 낳아야만 깨달을 수 있는 삶의 진리와 아름다움이 있고, 그걸 모르고 살아간다는 건 불행한 게 아닐까...

그런 와중에 이 책의 등장은 내게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나는 아이를 낳고 후회하는 감정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금기'처럼 묶여있는, 사회문화적 압박으로 깊숙한 곳에 숨겨져 전달되지 못하고 있는 이야기들에 대해. 그리고 읽고 난 감상은 '역시!'이다.  왜 모든 여자가 자신의 삶의 많은 부분을 희생하며 다음 세대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의무를 당연하게 짊어져야만 하는가. 그건 너무도 무거운 짐이다. 한 사람의 독립과 자유를 빼앗고 남은 여생을 타인을 위한 노동과 책임에 종속시켜버리는 무서운 일이다. 이 사회는 여자들이 짊어지고 있는 무거운 짐의 실체를 들여다보고 그것의 어두운 면을 인정해야만 하고, 여자들에게 그런 짐을 당연한 의무로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 누구에게나 아이를 낳고 기른다는 것의 실체를 제대로 알고 그것을 자유롭게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주어야만 한다. 

엄마로서의 삶을 낭만화하려는 사회의 이데올로기 공격이 거세어질 때마다, 이 포스팅을 다시 읽으며 마음을 다잡아야겠다.

 

 

 

http://blog.naver.com/aquma09/220942210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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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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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몰입감 있는 소설을 읽은 게 얼마만인가. 독서를 좋아하긴 하지만 지루함을 잘 느끼는 편이라 어떤 책이라도 100~150쪽 정도 읽으면 일단 덮어놓고 다른 책을 펼치는 편인데 이 책은 그렇지 않았다. 금요일 퇴근길에 읽기 시작해서 그날 약속 때문에 마저 못 읽다가 토요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이 책을 읽을 수 있단 생각에 행복했을 정도. 

 옥타비아 버틀러는 최초의 흑인 여성 SF 작가로, 백인 남성 일색이던 SF계의 보이지 않는 장벽을 뚫고 작품성과 대중성 모두를 인정받아 SF계의 '그랜드 데임' 이란 칭호를 얻었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다보면 어떤 식으로든 7-80년대 영미권  페미니즘 SF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 구조에 대해 질문을 하고 대안적인 사회를 상상하는 SF의 사고실험적 성격은 평등이 가능한 사회의 조건을 만들기 위해 급진혁명을 꾀했던 6-70년대의 2차 페미니즘 물결과 맞물려 70-80년대 페미니즘 SF문학의 르네상스를 열었다. 어슐러 르귄,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마거릿 애트우드 등과 함께 알게 된 작가가 바로 이 옥타비아 버틀러였다.

<킨>은 타임슬립물이다. 그러나 주인공이 '흑인 여성'이라는 점에서 기존 타임슬립물과 차별화된다.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다 150년 전의 미국 남부로 돌아가게 된 흑인 여성에 대해 생각해 보라. 설정만으로도 소름이 돋지 않는가? 1976년, 백인 남편인 케빈과 결혼해 이제 막 신혼집으로 이사를 한 다나는 갑자기 현기증을 느끼고 1815년 메릴랜드 주의 숲에서 혼자 깨어난다. 그녀는 호수에 빠져 죽어가는 소년을 발견하고, 앞뒤 생각할 것 없이 물에 뛰어들어 그 소년을 구해낸다. 그런데 그녀와 소년을 발견한 소년의 부모는 기이하게도 그녀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며 심지어 장총으로 겨냥을 하는데...

*약간의 스포가 있습니다.

이 책의 원제은 <Kindred>이다. 직역하면 친족. 다나는 자신이 구한 그 백인 소년이 자신의 멀고 먼 조상이란 걸 알게 되고, 그가 죽을 위험에 처할 때 마다 자신이 과거로 소환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라날 수록 백인 남자라는 유리한 지위를 이용해서 흑인들에게 폭력을 저지르고 자신을 속박하는 루퍼스. 그러나 다나는 그가 자신의 조상이라는 이유로 그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그의 목숨을 구해줄 수 밖에 없다.

이 소설의 설정이 더 매력적인 건 인종과 사는 시대가 다른 주인공 두 명이 혈족으로 이어져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작중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시대의 산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루퍼스는 남부의 농장주라는 계급을 갖고 있기에 흑인들에게 폭력을 저지르지만, 일부러 남을 해치려고 폭력을 행사하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노동을 시키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으로 행하기 때문에 그를 악당으로 비난할 수가 없다. 그는 그 외에 다른 방식으로 사는 법을 알지 못하는, 철저히 시대의 한계에 갇혀 있는 존재다. 게다가 우리가 작품에서 처음 마주하는 루퍼스는 폭군과도 같은 아버지에게 얻어맞고 자라던 어린 시절의 소년이다. 그는 가부장제 하에서 억압받고 폭력을 당하고 방치된 채 자란다. 우리는 그를 마음 놓고 미워할 수가 없다.

 앨리스에 대한 그의 폭력도 마찬가지이다. 앨리스를 향한 그의 폭력엔 애정과 소유욕이 복잡하게 뒤섞여있다. 그는 앨리스를 사랑하지만, 백인 남자이기 때문이 흑인 여자인 그녀에게 폭력을 행한다. 왜냐면 그는 그렇게 할 수 있고, 그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것 때문에 그는 불행해지지만, 그것 외에 다른 식으로 그녀를 사랑하는 방법을 생각하지도 못한다. 더 충격적인 것은 다나까지 그것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버리는 지점이다. 다나는 탈출을 생각하는 앨리스에게 '그냥 이대로 지내는 게 어때. 루퍼스의 기분을 적당히 맞춰주면서. 그럼 너는 사랑받으면서 지낼 수 있고. 너의 아이들도 자유민이 될 수도 있고...'라는 충고를 한다

 이렇게 소설은 미묘한 설정으로 선악으로 쉬이 단정지을 수 없는 인물들의 행동을 묘사하며 독자에게 다양한 감정과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심리 묘사를 깊숙이 들어가지 않고 상황을 스피디하게 묘사하며 감정은 최대한 절제하여 단순히 던지는 것이 독자의 상상력을 더욱 자극한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남에게 폭력을 행하는 사람은 나쁘다'라는 당연하고 관념적인 윤리적 명제에 대한 치열한 재고를 요청한다. 우리가 얼마나 시대에 얽매일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인지, 사회 구조가 얼마나 타자들에게 폭압적일 수 있는지, 억압적인 상황에서 개인이 자유를 추구하기 위해 얼만큼 위험을 무릅쓸 수 있는지, 인간이 얼마나 쉽게 노예로 길들여질 수 있는지...다양한 인간 군상과 시대를 넘나드는 관점을 통해 당연한 것들을 당연하지 않게 보여주고, 그럼으로써 독자에게 느끼고 사유할 것, 치열하게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

 흑인이라는 인종적 마이너리티까지 함께 갖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작품은 여타 페미니즘 SF 작가의 작품과는 색채가 많이 다르게 느껴졌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더 생생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고 할까. 미래 사회를 그리거나 새로운 설정을 만들어내지 않고 단순히 과거로 가는 것 만으로도 이야기할 것들을 이렇게 많이 불러낼 수 있는 건, '노예'에서 '인간'으로 인정받게 된 지 고작 150년 밖에 되지 않은 극적인 역사를 가슴에 새기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150년 전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지금의 세계는 그 어떤 세계보다 더 공상과학적인 세계라는 것. 그리고 지금 상황에 비해서도 그때의 상황은 너무나 비현실적인 다른 세계 이야기라는 것. 사회의 구조는 이렇게 시대에 따라 극적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 상상력이 요구되는 영역이라면 어디든, 타자성이란 주류를 뒤흔들 수 있는 혁명적 씨앗을 내포하고 있는 강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사족1.

 소설의 기법에 대한 생각을 했다. 아직도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고 있는데, 쉬이 끝나지가 않아 진절머리가 날 정도이다. 자의식 과잉으로 씌어진 소설. 서구 문화의 뿌리인 신화의 구조에 기대어 빈곤한 정신의 작품에 깊이와 후광을 부여하려는 얄팍한 욕망, 타자에게 무관심한 채 오직 자기 자신의 별 볼일 없는 의식에 세계에 갇혀 끊임없이 중얼대는 백인 남자의 혼잣말들, 온갖 현란한 기교적인 실험들에 진력이 난다. 몇 번이고 중간에 책을 덮으며 이게 대체 뭘 위한 건지를 물었다. 제임스 조이스란 자의식 쩌는 예술가의 에고를 만족시켜주고 소설의 죽음을 앞당기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나? 조이스는 연구자들이 자신의 작품을 연구하려 평생을 매달려야 할 것이라고 예언하며 흡족해 했단다. 소수의 식자들에게 영원히 관심받는 것을 성취하였으니 조이스는 아마 천국에서도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으리라. 그러나 버틀러는, 자신이 더 쓰지 못하고 너무 일찍 가버린 것에 아쉬워 초조해 하고 있지 않을까? 그녀에겐 아직 쓸 것이 잔뜩 남아있었을 텐데 말이다.

 흑인 여성은 '율리시스'를 결코 쓸 수 없다. 문화적인 뿌리와 문제의식, 관심사가 모두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다. 흑인 여성에겐 고작 150여년 전까지만해도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고 노예로 살았던 선조들의 피흘리는 역사가 있다. 그 피는 아직까지 흘러 내려 종종 그들의 이마와 신발을 적실 것이다. 그녀들에겐 아직도 동등한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고 무시당하며, 저임금 일에 내몰려 빈곤에 허덕이는 현실이 있다. 그녀들은 현실을 현실로 느낄 것이다. 왜냐면 그것이 너무나 강렬한 고통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인 중산층 남자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이 역사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모두 마쳤다. 그들은 더 이상 할 일도, 새로 해 낼 생각도 없으며 새로 개발할 기법도 거의 남아있질 않다. 그리고 그들은 배가 너무 부르다. 부르고 너무 불러서 현실이 더 이상 현실로 느껴지지도 않는다. 할 일이 너무 없는 나머지 모든 게 다 가짜같은 것이다. 모든 게 가짜같아서 쓰기 시작한 소설과 모든 게 너무 진짜여서 쓰기 시작한 소설이 어떻게 같은 길로 갈 수 있으랴?

 글을 쓰는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본다. 문학의 형식은 역사적인 것이다. 어떤 식으로 글을 쓸 지 정하는 것은 곧 누구의 역사에 이입할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된다. 자신의 지정학적 위치를 제대로 보고 새로운 길을 개척할 것인가 아니면 끊임없는 마취 상태에서 서구 백인 남성들의 의식에 빙의해 역사를 함께 이끌어나가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있을 것인가? 나는 모더니즘 보다 페미니즘 SF를 더 가깝게 느낀다. 하지만 페미니즘 SF도 결국 완전한 대안은 아니다. 흑인들은 이미 '아프로 퓨처리즘' 같은 고유한 문화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한국여자에겐? 나에겐 어떤 길이 있을까? 쓰면서, 읽으면서 계속 고민해야 하는 문제다. 이걸 멈추는 순간 진부한 흐름에 비판 없이 휩쓸리게 될 것이다.



*사족2.(스포있음)

소설을 읽는 내내 다나의 남편인 '케빈'의 변화에 대해 조마조마했다. 그는 백인 남성이었기 때문에 150여년 전의 과거로 가도 딱히 큰 핸디캡이 없었다. 소유하고 있는 농장이 없긴 하지만, 현대에서도 그는 사유재산 없이 일용직에 종사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케빈이 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곳에선 자신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이 아니란 걸 깨닫고, 흑인을 착취하고 부리는데 만족을 느껴 다나와 함께 현재로 돌아가는 걸 거부할 수 있지 않을까? 150년 전 미국 남부에선 그냥 길 가던 흑인을 납치해 자신의 노예로 부리는 것이 가능했으니 말이다. 혹은 루퍼스와 결탁해서 다나를 노예화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루퍼스는 다나와 떨어져 있는 기간 동안 오히려 흑인 노예들의 탈출을 도왔고, 다나에게 끝까지 충실했다. 하지만 이게 소설 내에서 필연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오히려 이게 가장 판타지였다고 생각한다) 케빈의 선량함이 작중 상황이 너무 극적으로 비참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로 기능했달까. 만약 내가 이걸 썼다면...좀 더 비참하고 출구없이 고통스러운 지옥의 형상을 구현했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왜냐면 난 지금 남성인간에 대한 신뢰를 거의 상실했기 때문이지..

 그것 외에도, 본문에도 언급했던 묘사를 최대한 절제한 문체가 내 상상력을 자극했다. 좀 더 인물 깊숙이 들어가서 약동하는 심리를 파고들어 묘사해도 재미있었을텐데...인물의 행동과 행동 사이에, 말과 말 사이에 내면에서 수 많은 일들이 벌어졌을 거란 생각이 든다. <킨>의 한국판은 520페이지이지만, 글자크기와 간격을 매우 널널하게 배치하여 그렇고 원서는 300페이지도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가 같은 플롯으로 글을 썼다면 원서버전으로 3000페이지 정도의 대작이 나왔을 것이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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