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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스러운 탐정들 1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우석균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6월
평점 :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니 한 동안 정신이 멍했다. 1000페이지에 달하는 페이지들과 씨름하며 보낸 1주일 사이에 나이 한 살은 더 먹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방대하고 강도 높은 경험을 제공해 주는 작품이었다.
야만스러운 탐정들은 실패한 혁명가들에 대한 소설이다. 사라진 혁명가, 혁명에 실패한 시인들의 이야기. 울리세스 리마와 아르투로 벨라노가 이끄는 '내장사실주의자' 들은 옥타비오 파스로 대표되는 형이상학적 시와 파블로 네루다로 대표되는 정치참여적 시 양대 산맥에 반발하여 새로운 사실주의를 천명하고 문단의 혁명을 꾀한다. 그들은 뚜렷한 비전과 전략도 없이 그저 기득권을 지닌 모든 것을 적으로 두고 반발한다. 그저 같은 뜻에 의해 또는 친분에 의해 모여 시적 혁명을 꿈꾸며 좌충우돌 하고 있는 청춘들을 보고 있자니 19세기 말 프랑스 상징주의자들나 20세기 초 로스트 제너레이션, 또는 50년대의 비트 제너레이션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격변하는 시대에 태어난 젊은 문인들, 기존의 문학 제도에 반발하며 새로운 시대의 기류를 체화하고 그것을 새로운 형식의 문학으로 구현하려고 애쓰는 혁명가들.
'내장사실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진 않지만 그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모든 시인이 꿈꾸는 혁명은 같다. 그건 새로운 '모더니티'에 이르는 것이다. 모던modern이란 라틴어 modernus에서 도출된 단어로, 라틴어로 modo란 "바로 지금"의 뜻을 지니고 있다. 모더니티란 바로 지금의 생생한 현재성을 포착하는 동시에 그것을 시대에 구애 받지 않는 영원성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모더니티를 획득하기 위해 시인들은 기존의 관습적인 모든 형식과 내용을 거부해야 한다. 자신을 하나의 전도체로 두고 동시대 또는 도래할 시대의 흐름을 새 형식으로 기록해야 한다.
"내장"사실주의라는 희화화된 이름도 모더니티의 이런 반항적이고 혁명적인 속성을 드러내고 있다. '사실주의'는 근대 문학을 문학으로써 규정지었던 주류 문학사조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사실을 사실 그대로 묘사한 것이 아니다. 사실이란 무엇인가? 객관적인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은 시대적, 지리적, 정치적으로 그때 그때 다른 방식으로 직조되는 구성적 대상이다. 그러나 문학판에서의 '사실주의'는 기존 세력이 파악하고 구성해 온 '사실'만을 사실로 규정하며 또 다른 '사실'들을 억압하는 기준으로서 작용한다. '내장사실주의'는 이런 문단 기득권력이 주창하는 사실주의의 엄숙함을 비꼬며 새로운 '사실성'을 추구하는 동시에 사실주의를 정의상 그야말로 속부터 뒤집어버리는 것이다.
이 소설이 단순히 새로운 리얼리즘을 포착하려는 어린 문인들의 치기어린 혁명을 그린 것이라면 이처럼 많은 열광을 낳을 수 없었을 것이다. 소설 상에서 어린 내장사실주의자들이 모여 왁자지껄 소동을 일으키는 것은 고작 1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소설의 진가는 2부에 있다. '후안 가르시아 마데로' 라는 어린 시인의 1975년 11월 부터 12월까지의 일기로 기록되었던 1부와 달리 2부는 1976년 부터 1996년까지 무려 20여년 동안 어떤 대안도 발견하지 못하고 현실에서 몰락해가는 내장사실주의자들의 행로를 수 많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추적한다. 이 오랜 세월 동안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1968년 멕시코 틀라텔롤코 학살, 1973년 칠레 군사 쿠데타, 1979년 니카라과 혁명 등 무수한 정치적 사건이 발생하고 수십 명의 증언자들은 각각 라틴 아메리카, 유럽, 아프리카, 각각의 대륙에서 울리세스 리마와 아르투로 벨라노의 행적에 대해 스치듯 언급한다. 그 와중에 내장 사실주의자들은 서로 무수히 만났다 헤어지며 결혼하고 애를 낳기도 하고 시 쓰기를 그만 두기도 하고 자동차 사고로 죽기도 한다. 몇 백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 속에서 각국에 사는 수십 명의 목소리로 진행되는 세월의 방대함이란...'장편' 소설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문학적 시간 체험이었다.
1부는 물론이고 수십명이 돌아가며 발화자의 위치를 점하는 2부에서도 이 소설의 주인공인 울리세스 리마와 아르투로 벨라노는 화자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의 혁명과 몰락은 오직 다른 사람들의 증언에 의해서만 기록된다. 왜 일까? 왜 볼라뇨는 주인공들로 하여금 직접 말하게 하지 않았는가? 내 생각엔 그들이 타자로서의 혁명가들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들은 역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 실패한 혁명가들이며, 우리는 그들의 내력을 일관되게 파악할 수 없다. 그들이 무엇을 꿈꿨는지, 무엇을 시도했고 어떻게 스러져갔는지, 모자이크와도 같은 조각들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설정은 또한 이 소설의 탐정소설적 요소를 강화시킨다. 소설의 2부는 울리세스 리마와 아르투로 벨라노가 어린 창녀 루페를 포주 알베르토로부터 빼돌리기 위해 도망치는 동시에, 기록을 거의 남기지 못하고 잊혀진 1920년대 내장 사실주의의 창시자인 '세사레아 티나헤로'라는 시인을 찾아 떠나며 시작된다. 2부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수 많은 화자들의 산발적 증언으로 이뤄져 있는데, 여기서 남는 의문점은 대체 이 2부를 누가 엮었느냐 하는 문제이다. 리마와 벨라노가 세사레아의 발자취를 쫓아 그녀를 알았던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도서관에 가서 자료를 뒤적이는 것처럼, 이 책의 2부를 엮은 필자는 리마와 벨라노의 발자취를 집요하게 좇아 기록한다. 개별 화자들의 이름과 증언한 장소와 시간은 모두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지만 정작 이들의 증언을 모아서 엮은 사람의 정체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누가 그토록 열정적으로 리마와 벨라노의 행적을 좇아 사람들의 증언을 엮어냈는가? 2부 화자 중 한 명인, 내장사실주의의 유일한 연구자를 자처하는 파추카 대학의 에르네스토인가? 아니면 볼라뇨 작가 자신인가? 또는 볼라뇨가 소설 안에 숨겨 놓은 또 다른 화자인가? 명확히 알 수 없다.
이것 또한 볼라뇨가 소설 안에 숨어 놓은 미스테리이다. 독자가 직접 여행자가, 그리고 탐정이 되어 사건의 전말을 적극적으로 파악하도록 만드는 유인책이다. 독자들은 세사레아를 찾는 리마와 벨라노처럼, 리마와 벨라노의 행적을 찾는 야만스러운 탐정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소설이 제시하는 사건을 단순히 따라가는 게 아니라, 집중하고 분석하고 적극적으로 재구성하는 능동적 독자가 되길 요구받는 것이다. 사건은 벌어졌다. 리마와 벨라노는 혁명에 실패하고 현실에 얻어맞고 짓이겨져 세월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왜 그들은 실패할 수 밖에 없었나? 누가 그들을 패배하게 만들었나? 언제 그들은 실패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일까? 단서는 2부의 증언들이다. 독자는 2부의 수 많은 증언들을 날실과 씨실처럼 짜 맞추어 사건을 재구성하고 복기해야만 한다. 이 소설은 단 한 번의 체험으로 소비할 수 없는 작품이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부둥켜 안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다시 페이지들을 뒤적이며 자신만의 답을 찾아내려 고투해야 한다.
작품을 보면서 가장 강렬했던 순간은 세사헤라 티나헤로가 남긴 유일한 시가 등장한 장면이었다. 보는 순간 울 것 같았다. 너무 슬펐다. 그 시가 이 소설의 내용 전체를 함축하고 있는 것 같았다. 3행으로 나눠진 것 중 각 행이 소설의 각 챕터를 형상화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순탄하게 흘러가는 어린 시절 - 모험을 떠난 청년의 방랑 시절 - 그리고... 뒤에서 리마와 벨라노도 이와 비슷하게 설명하긴 하지만, 내게 있어서 3행의 느낌은 '정지'이다. 풍랑이 날카로운 유리판 처럼 굳어져 버리는 것, 더 이상 흐름을 탈 수 없게 되는 것, 오도 가도 할 수 없이 추락하는 길 밖에 남지 않은 것.
3부의 화자는 다시 1부의 어린 시인 가르시아 마데로이다. 시간적으로 역행하여 그들이 1부 마지막에서 여행을 떠난 바로 직후를 일기로 쓰고 있다. 그러나 이때의 일기는 1부와는 다르게 선형적이지 않고 모호하며 환상적이다. 사건이 일어나지만 이것들이 현실에서 일어났는지 환상과 신화의 차원에서 일어난건지 잘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이다. 소설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은 도형으로 끝난다. 이것 또한 세사레아 티나헤로의 유일한 시, 그리고 작품의 3부와 연계해서 이해하면 더 풍부한 해석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이 더 와 닿았던 것은 여기서 그리는 멕시코 문단의 모습, 더 넓게는 라틴 아메리카의 현실이 지금 한국의 현실과 너무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별다른 설명도 없이 무지막지 하게 줄줄이 언급되는 현대 라틴 아메리카 시인들 이름에 기가 질렸지만 점차 그들의 모습이 우리 나라 문단을 차지하고 있는 문인들과 오버랩 되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한 때는 혁명가였으나 정치 세력과의 결탁을 통해 권력을 얻고 부패한 거장들, 어떻게든 문단에서 한 자리를 차지해 성공하기 위해 거장들에게 알랑방귀를 뀌어 가며 착실히 그들의 스타일을 모방해가는 문인들, 문단의 권력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무것도 위반하지 않고 기득권들이 원하는 스타일대로만 글을 쓰는 문학지망생들, 각종 현상금 사냥꾼들, 명성과 신분상승을 위해 글을 쓰는 작가들, 서양의 스타일과 지식을 그대로 수입해 오는 지식인들, 식민주의에 찌들어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들. 모두 다 지금 한국의 상황을 그대로 묘사한 것만 같았다.
라틴 아메리카 또한 우리와 같이 식민지로서의 역사를 갖고 있는 땅이며, 아직도 정신적 식민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곳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많다. 하지만 우리 나라는 라틴 아메리카 보다 한 세대는 더 뒤쳐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라틴 아메리카는 1950-60년대에 '붐 문학'이라는 독자적인 문학의 흐름을 일으켜낸 역사를 갖고 있으며, 무엇보다 단일 국가가 아니라 대륙 전체가 연합하여 한 마음으로 혁명을 갈구하고 있다. 또한 정복자였던 스페인의 언어를 공통으로 씀으로써 대륙 전체가 단일 언어로 통일되어 있는 동시에 유럽의 한 부분인 스페인까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언어적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소수 언어를 쓰는 민족이며 그나마도 반토막으로 나라가 분단되어 턱 없이 적은 독자들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우리 나라는 세계 문학사에서 단 한 번도 독자적인 흐름을 일으킨 적이 없음은 물론이고, 내부적으로도 폐쇄적이고 파벌주의에 찌들어 같은 나라 독자들에게마저도 철저히 외면받고 있다. 문단 권력은 갈수록 공고해지기만 해 기존 권력의 '승인'을 받지 못한 작가들은 아예 작가로서 주목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하고, 기존 권력은 자신의 구미에 맞는 작품만을 선별해 문학의 다양성을 죽이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 나라에서도 문학 혁명이 일어날 수 있을까? 아니, 우리 나라의 세사레아 티나헤로는 누구였나? 리마와 벨라노는 누구인가? 있다면 나는 그들을 알아볼 수나 있을 것인가? 그들은 또 어떻게 문단의 몰매를 맞고 현실에 짓이겨져 비참하게 사라져 갈까?
*혁명을 꿈꾸는 문학도들이라면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소설이다. 그들의 실존적 문제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폐쇄적인 문단 권력과 정치 문제를 비꼬는 것도 깨알같은 재미가 있다. 중간 중간에 낯선 현대 라틴 아메리카 문학가들에 대한 언급이 시도 때도 없이 나오며, 중간에 한 내장사실주의자가 라틴 아메리카의 시인들을 마리콘, 마리카, 로카 등 유형으로 분류해 나누며 평하는 것도 나오는데 이게 만약 한국 문단 작가들에 대한 코멘트라면 정말 통쾌하고 웃겼을 거란 생각을 했다. 라틴 아메리카 문학도들은 훨씬 더 뉘앙스를 즐기며 재밌게 읽었을 것 같다. 그것 외에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이 스페인 이외에도 프랑스 문학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에 대한 내장사실주의자들의 동경이 대단했다.
*아르투로 벨라노
-> '아르투로' 랭보 + 로베르토 '볼라뇨'의 결합.
어린 나이에 프랑스 시에서 혁명을 일으키고 은퇴한 뒤 아프리카와 아랍지역을 떠돌았던 랭보 + 바르셀로나로 이주한 뒤 온갖 잡다한 일을 했던 볼라뇨의 인생이 결합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울리세스 리마
->호메로스, 제임스조이스의 '율리시즈' + 페루의 수도 '리마'
호메로스와 제임스 조이스의 히어로가 행했던 대서사시적 여행을 라틴 아메리카 대륙에서 펼치는
*정착민과 유목민들간의 싸움. 기득권을 가진 정착 시인들과 혁명을 하기 위해 이동한 유목시인. 문학의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한 탈주.그리고 유목민들의 처절한 패배. 들뢰즈가 천개의 고원에서 주창한 노마디즘을 문학적으로 구현한 느낌이었다. 작품 내용도 그렇고 구성도 그렇고. 요즘 보면 이전 세대와는 달리 철학이 문학보다 먼저 현대성을 선취하여 개념화하고, 그걸 문학이 뒤늦게 문학적으로 응용하여 구현하는 느낌이다. 들뢰즈와 데리다는 둘 다 문학적으로 글을 써서 철학과 문학의 경계를 지워버린 철학자들이기도 하고.
보르헤스 이후로 철학보다 먼저 시대성을 선취한 문학가를 본 적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