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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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몰입감 있는 소설을 읽은 게 얼마만인가. 독서를 좋아하긴 하지만 지루함을 잘 느끼는 편이라 어떤 책이라도 100~150쪽 정도 읽으면 일단 덮어놓고 다른 책을 펼치는 편인데 이 책은 그렇지 않았다. 금요일 퇴근길에 읽기 시작해서 그날 약속 때문에 마저 못 읽다가 토요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이 책을 읽을 수 있단 생각에 행복했을 정도. 

 옥타비아 버틀러는 최초의 흑인 여성 SF 작가로, 백인 남성 일색이던 SF계의 보이지 않는 장벽을 뚫고 작품성과 대중성 모두를 인정받아 SF계의 '그랜드 데임' 이란 칭호를 얻었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다보면 어떤 식으로든 7-80년대 영미권  페미니즘 SF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 구조에 대해 질문을 하고 대안적인 사회를 상상하는 SF의 사고실험적 성격은 평등이 가능한 사회의 조건을 만들기 위해 급진혁명을 꾀했던 6-70년대의 2차 페미니즘 물결과 맞물려 70-80년대 페미니즘 SF문학의 르네상스를 열었다. 어슐러 르귄,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마거릿 애트우드 등과 함께 알게 된 작가가 바로 이 옥타비아 버틀러였다.

<킨>은 타임슬립물이다. 그러나 주인공이 '흑인 여성'이라는 점에서 기존 타임슬립물과 차별화된다.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다 150년 전의 미국 남부로 돌아가게 된 흑인 여성에 대해 생각해 보라. 설정만으로도 소름이 돋지 않는가? 1976년, 백인 남편인 케빈과 결혼해 이제 막 신혼집으로 이사를 한 다나는 갑자기 현기증을 느끼고 1815년 메릴랜드 주의 숲에서 혼자 깨어난다. 그녀는 호수에 빠져 죽어가는 소년을 발견하고, 앞뒤 생각할 것 없이 물에 뛰어들어 그 소년을 구해낸다. 그런데 그녀와 소년을 발견한 소년의 부모는 기이하게도 그녀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며 심지어 장총으로 겨냥을 하는데...

*약간의 스포가 있습니다.

이 책의 원제은 <Kindred>이다. 직역하면 친족. 다나는 자신이 구한 그 백인 소년이 자신의 멀고 먼 조상이란 걸 알게 되고, 그가 죽을 위험에 처할 때 마다 자신이 과거로 소환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라날 수록 백인 남자라는 유리한 지위를 이용해서 흑인들에게 폭력을 저지르고 자신을 속박하는 루퍼스. 그러나 다나는 그가 자신의 조상이라는 이유로 그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그의 목숨을 구해줄 수 밖에 없다.

이 소설의 설정이 더 매력적인 건 인종과 사는 시대가 다른 주인공 두 명이 혈족으로 이어져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작중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시대의 산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루퍼스는 남부의 농장주라는 계급을 갖고 있기에 흑인들에게 폭력을 저지르지만, 일부러 남을 해치려고 폭력을 행사하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노동을 시키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으로 행하기 때문에 그를 악당으로 비난할 수가 없다. 그는 그 외에 다른 방식으로 사는 법을 알지 못하는, 철저히 시대의 한계에 갇혀 있는 존재다. 게다가 우리가 작품에서 처음 마주하는 루퍼스는 폭군과도 같은 아버지에게 얻어맞고 자라던 어린 시절의 소년이다. 그는 가부장제 하에서 억압받고 폭력을 당하고 방치된 채 자란다. 우리는 그를 마음 놓고 미워할 수가 없다.

 앨리스에 대한 그의 폭력도 마찬가지이다. 앨리스를 향한 그의 폭력엔 애정과 소유욕이 복잡하게 뒤섞여있다. 그는 앨리스를 사랑하지만, 백인 남자이기 때문이 흑인 여자인 그녀에게 폭력을 행한다. 왜냐면 그는 그렇게 할 수 있고, 그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것 때문에 그는 불행해지지만, 그것 외에 다른 식으로 그녀를 사랑하는 방법을 생각하지도 못한다. 더 충격적인 것은 다나까지 그것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버리는 지점이다. 다나는 탈출을 생각하는 앨리스에게 '그냥 이대로 지내는 게 어때. 루퍼스의 기분을 적당히 맞춰주면서. 그럼 너는 사랑받으면서 지낼 수 있고. 너의 아이들도 자유민이 될 수도 있고...'라는 충고를 한다

 이렇게 소설은 미묘한 설정으로 선악으로 쉬이 단정지을 수 없는 인물들의 행동을 묘사하며 독자에게 다양한 감정과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심리 묘사를 깊숙이 들어가지 않고 상황을 스피디하게 묘사하며 감정은 최대한 절제하여 단순히 던지는 것이 독자의 상상력을 더욱 자극한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남에게 폭력을 행하는 사람은 나쁘다'라는 당연하고 관념적인 윤리적 명제에 대한 치열한 재고를 요청한다. 우리가 얼마나 시대에 얽매일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인지, 사회 구조가 얼마나 타자들에게 폭압적일 수 있는지, 억압적인 상황에서 개인이 자유를 추구하기 위해 얼만큼 위험을 무릅쓸 수 있는지, 인간이 얼마나 쉽게 노예로 길들여질 수 있는지...다양한 인간 군상과 시대를 넘나드는 관점을 통해 당연한 것들을 당연하지 않게 보여주고, 그럼으로써 독자에게 느끼고 사유할 것, 치열하게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

 흑인이라는 인종적 마이너리티까지 함께 갖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작품은 여타 페미니즘 SF 작가의 작품과는 색채가 많이 다르게 느껴졌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더 생생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고 할까. 미래 사회를 그리거나 새로운 설정을 만들어내지 않고 단순히 과거로 가는 것 만으로도 이야기할 것들을 이렇게 많이 불러낼 수 있는 건, '노예'에서 '인간'으로 인정받게 된 지 고작 150년 밖에 되지 않은 극적인 역사를 가슴에 새기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150년 전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지금의 세계는 그 어떤 세계보다 더 공상과학적인 세계라는 것. 그리고 지금 상황에 비해서도 그때의 상황은 너무나 비현실적인 다른 세계 이야기라는 것. 사회의 구조는 이렇게 시대에 따라 극적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 상상력이 요구되는 영역이라면 어디든, 타자성이란 주류를 뒤흔들 수 있는 혁명적 씨앗을 내포하고 있는 강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사족1.

 소설의 기법에 대한 생각을 했다. 아직도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고 있는데, 쉬이 끝나지가 않아 진절머리가 날 정도이다. 자의식 과잉으로 씌어진 소설. 서구 문화의 뿌리인 신화의 구조에 기대어 빈곤한 정신의 작품에 깊이와 후광을 부여하려는 얄팍한 욕망, 타자에게 무관심한 채 오직 자기 자신의 별 볼일 없는 의식에 세계에 갇혀 끊임없이 중얼대는 백인 남자의 혼잣말들, 온갖 현란한 기교적인 실험들에 진력이 난다. 몇 번이고 중간에 책을 덮으며 이게 대체 뭘 위한 건지를 물었다. 제임스 조이스란 자의식 쩌는 예술가의 에고를 만족시켜주고 소설의 죽음을 앞당기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나? 조이스는 연구자들이 자신의 작품을 연구하려 평생을 매달려야 할 것이라고 예언하며 흡족해 했단다. 소수의 식자들에게 영원히 관심받는 것을 성취하였으니 조이스는 아마 천국에서도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으리라. 그러나 버틀러는, 자신이 더 쓰지 못하고 너무 일찍 가버린 것에 아쉬워 초조해 하고 있지 않을까? 그녀에겐 아직 쓸 것이 잔뜩 남아있었을 텐데 말이다.

 흑인 여성은 '율리시스'를 결코 쓸 수 없다. 문화적인 뿌리와 문제의식, 관심사가 모두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다. 흑인 여성에겐 고작 150여년 전까지만해도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고 노예로 살았던 선조들의 피흘리는 역사가 있다. 그 피는 아직까지 흘러 내려 종종 그들의 이마와 신발을 적실 것이다. 그녀들에겐 아직도 동등한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고 무시당하며, 저임금 일에 내몰려 빈곤에 허덕이는 현실이 있다. 그녀들은 현실을 현실로 느낄 것이다. 왜냐면 그것이 너무나 강렬한 고통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인 중산층 남자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이 역사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모두 마쳤다. 그들은 더 이상 할 일도, 새로 해 낼 생각도 없으며 새로 개발할 기법도 거의 남아있질 않다. 그리고 그들은 배가 너무 부르다. 부르고 너무 불러서 현실이 더 이상 현실로 느껴지지도 않는다. 할 일이 너무 없는 나머지 모든 게 다 가짜같은 것이다. 모든 게 가짜같아서 쓰기 시작한 소설과 모든 게 너무 진짜여서 쓰기 시작한 소설이 어떻게 같은 길로 갈 수 있으랴?

 글을 쓰는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본다. 문학의 형식은 역사적인 것이다. 어떤 식으로 글을 쓸 지 정하는 것은 곧 누구의 역사에 이입할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된다. 자신의 지정학적 위치를 제대로 보고 새로운 길을 개척할 것인가 아니면 끊임없는 마취 상태에서 서구 백인 남성들의 의식에 빙의해 역사를 함께 이끌어나가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있을 것인가? 나는 모더니즘 보다 페미니즘 SF를 더 가깝게 느낀다. 하지만 페미니즘 SF도 결국 완전한 대안은 아니다. 흑인들은 이미 '아프로 퓨처리즘' 같은 고유한 문화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한국여자에겐? 나에겐 어떤 길이 있을까? 쓰면서, 읽으면서 계속 고민해야 하는 문제다. 이걸 멈추는 순간 진부한 흐름에 비판 없이 휩쓸리게 될 것이다.



*사족2.(스포있음)

소설을 읽는 내내 다나의 남편인 '케빈'의 변화에 대해 조마조마했다. 그는 백인 남성이었기 때문에 150여년 전의 과거로 가도 딱히 큰 핸디캡이 없었다. 소유하고 있는 농장이 없긴 하지만, 현대에서도 그는 사유재산 없이 일용직에 종사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케빈이 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곳에선 자신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이 아니란 걸 깨닫고, 흑인을 착취하고 부리는데 만족을 느껴 다나와 함께 현재로 돌아가는 걸 거부할 수 있지 않을까? 150년 전 미국 남부에선 그냥 길 가던 흑인을 납치해 자신의 노예로 부리는 것이 가능했으니 말이다. 혹은 루퍼스와 결탁해서 다나를 노예화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루퍼스는 다나와 떨어져 있는 기간 동안 오히려 흑인 노예들의 탈출을 도왔고, 다나에게 끝까지 충실했다. 하지만 이게 소설 내에서 필연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오히려 이게 가장 판타지였다고 생각한다) 케빈의 선량함이 작중 상황이 너무 극적으로 비참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로 기능했달까. 만약 내가 이걸 썼다면...좀 더 비참하고 출구없이 고통스러운 지옥의 형상을 구현했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왜냐면 난 지금 남성인간에 대한 신뢰를 거의 상실했기 때문이지..

 그것 외에도, 본문에도 언급했던 묘사를 최대한 절제한 문체가 내 상상력을 자극했다. 좀 더 인물 깊숙이 들어가서 약동하는 심리를 파고들어 묘사해도 재미있었을텐데...인물의 행동과 행동 사이에, 말과 말 사이에 내면에서 수 많은 일들이 벌어졌을 거란 생각이 든다. <킨>의 한국판은 520페이지이지만, 글자크기와 간격을 매우 널널하게 배치하여 그렇고 원서는 300페이지도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가 같은 플롯으로 글을 썼다면 원서버전으로 3000페이지 정도의 대작이 나왔을 것이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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