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남자는 없다 - 혐오사회에서 한국 남성성 질문하기 질문의 책 15
손희정 외 지음, 연세대학교 젠더연구소 엮음 / 오월의봄 / 2017년 9월
평점 :
품절


이 책의 제목이 가리키는 '그런 남자'는 어떤 남자인가? 들어가는 말에서 기획자는 이 책이 남자다움에 대한 여러 규범을 구현한 '그런 남자는 없다' 는 의미에서, "남자다움 자체가 일종의 판타지로 구성된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고, 다만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으로 다양한 차이들이 있을 뿐' 이라고 기획의도를 설명한다. 그러나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그런 남자는 없다' 라는 주제로 남성성 규범을 해체하기보다 '한국 남자'라는 특정한 집단의 '남성성'을 규정하려는 뉘앙스가 강하다. '한국 남성의 남성성'이 어떤 식으로 형성되고 유지되어왔는가를 분석하기 위해 광범위한 사회문화적 맥락을 훑어보고 그것을 정의내리려는 시도로 보인다는 것이다.

 제목과 기묘하게 불일치하는 책의 내용은 내게 
'한국남자의 남성성'의 특수함에 대한 새로운 통찰이 아닌, 한국 사회에서의 젠더 연구 방법론에 대한 고민을 던져주었다. 서구권에서 남성성을 분석할 때는 '서양 남자'에 대한 분석이라는 토를 달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이브 세즈윅은 미국의 영문학자이지만 남성간의 유대를 설명한 '호모소셜'이론에서 상정한 대상 남성을  '영문화권의 남성' 으로 한정짓지 않았다. 그건 서양인들이 자신들을 '보편'으로 상정하는데 너무 익숙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생략이었을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의 젠더 연구자들은 연구를 할 때 '한국'이라는 국가적 특성을 과도하게 인식하는 면이 있다.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측면이 강한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흐름에 대한 언급과 연구를 통째로 생략한 채  '한국'만의 특수한 현상인 것 처럼 앞에 국가의 태그를 붙이는 것이다. 이 책 또한 그런 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보편적 남성성'과 '한국남자의 특수한 남성성'을  명확하게 구별하여 정의내리지 않고 논의를 전개하는 내내 혼동하여 사용한다. '(보편적)남성성'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한국 사회의 문제를 이야기 하는가 하면 '한국 남자의 특수한 남성성'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보편적인 남성성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식이다.(대한민국의 남성성을 논의한다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공적영역/사적영역의 철저한 분리 문제를 예시로 드는 식이다.) 논의의 주제를 "한국 남자의 남성성"으로 잡았다면, 일단 '보편적 남성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까? 어떤 특성이 전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남성성' 인지에 대한 충분한 연구가 뒷받침 되어야 그것과 구별되는 '한국남성의 남성성'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더 납득하기 힘든 지점은 그들이 한국 사회의 남성성을 설명하는 기반으로 삼는 것이 서구의 이론이라는 것이다. 저자들은 정신분석, 헤게모니, 수행성 이론 등을 끌고 와 한국 사회에서 드러나는 여러 현상들을 비평한다. 그 현상들은 그들이 끌고 들어온 이론적 틀에 아주 잘 맞아떨어지는 동시에, 한국 사회의 '특수한' 현상으로 설명된다. 이상하지 않은가? 분석대상으로 삼은 특수한 사례가 보편적인 이론에 너무나 잘 맞아 떨어진다면, 어떻게 그것이 이 사회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공통적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있는가?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이런 의심이 들어 괴로웠다. 이들이 말하는 '한국 남자의 남성성'이 정말 '한국' 남자들에게서만 나타나는 특성인지, 아니면 보편적인 특성인지에 대한 답을 전혀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연구는 대체 무슨 쓸모가 있는 것일까? 서구 이론을 기반으로 한국의 문화를 비평하는 것은, 사회문화적인 인상 비평 작업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비평이 주장하는 바가 "한국문화에서도 드러나는 보편적 남성성 신화"가 아니라, "한국이라는 사회에만 드러나는 특수한 남성성 신화"라면, 그래서 여기 수록된 글들이 "한(국)남(성)론" 이라는 담론을 뒷받침 하기 위해 쓰여진 글들이라면, 나는 방법론 자체의 부실함과 오류를 지적할 수 밖에 없다.

 진중권은 이전에  <호모 코레아니쿠스> 라는 책에서 한국인의 특성에 대한 사회문화적 분석을 시도하면서, 자신의 연구가
'한국인'이라는 특정한 인종의 종족 특성을 밝히려는 것이 아니라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개념에 입각하여 특정한 사회 문화에서 그렇게 습득될 수 밖에 없었던 특수한 '습속'을 밝히려는 것임을 몇 번이나 강조하여 명시한다. 그리고 그가 논의를 진행할 때 한국인의 특정한 습속을 밝히기 위해 대조군으로 삼고 있는 것은 그가 유학시절 경험했던 독일인들의 습속이다. 대중서로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엄밀한 통제 아래서 분석된 것은 아닐지라도, 그는 적어도 비교를 위해 '독일인'이라는 대조군을 설정하고, 직접 경험에 의해 느꼈던 차이점들을 실례를 들며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남자는 없다>의 글들은 '한국남자의 특정한 습속'을 밝히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게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대조군도 설정하고 있지 않다. '보편적 남성성'과 '한국남성의 남성성' 개념을 구별하는 이론적 기초작업을 통째로 생략한 학문적 게으름에, 그 두 개념을 구별하여 '한남론'을 형성하려는 강한 의지가 더해져 기묘한 책이 만들어 졌다. 

 궁금증이 계속 든다. 왜 저자들은 '한국 남자'의 특수성에 집착한 것일까? '남자'도 아니고 '아시아 남자'도 아닌 '한국 남자'에 말이다. 아마 저자들은 '한국 남자'들이 그 어떤 다른 국가의 남성들과도 다른 특수한 남성성을 지니고 있다는 가정에 입각하여 연구를 해 나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일까. 그들은 왜 다른 나라의 이론가들과는 달리 '보편적 남성성'이나 '특정 문화권의 남성성'이 아닌 '한국'이라는 한 국가의 남성성이라는 한정된 대상을 연구 주제로 삼을 수 밖에 없었나. 그리고 왜 그 한정된 연구대상의 선정을 이론적 사전 작업이 필요하다고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여겼나. 이건 그들 또한 갖고 있던 식민성 때문이 아닐까? 서양 사람은 세계에 대해 말할 수 있지만 한국 이론가는 오직 '한국'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는 한계를 스스로에게 부여한 채 좁은 범위 안에서 작업하는 식민성 말이다. 이들에게 남자는 오직 '한국'남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보편적 남성성과 한국남자의 남성성이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게 느껴졌던 것이 아닐까. 어차피 이들이 말할 수 있는 남성성은 오직 한국 남자의 남성성에 대한 것 밖에 없기 때문에.

 재밌는 것은, 이들이 한국 남자의 특수성으로 수시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한국의 식민지 경험으로 인한 식민지 남성성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그들은 자기 집단 안의 식민성에 대한 어떠한 검토 없이 자신을 객관적/보편적 주체로 사정하고서 '한국 남자'라는 집단을 타자화 시킨 뒤 그들이 가진 식민적 특수성을 지적할 수 있게 된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13명의 저자 모두가 서로의 작업에 대한 어떤 비판 의식도 없이 이런 보편주체의 환상에 함께 빠지게 된걸까? 이것이야말로 분석해 볼만한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맹점은 그것 뿐만이 아니다.
 내가 이 글이 담고 있는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하지 않고 방법론 자체를 비판한 것은 이 책의 부실한 구성탓이 크다. '한국 남성의 남성성'이라는 공통 주제를 갖고서도, 이 책은 단 한 권에 담기에는 너무나 넓은 스펙트럼을 다루고 있다. 300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 책 안에서 무려 13명의 저자가 각자의 관심사에 따라 소재를 선택하고, 그마저 가지각색의 방법론을 사용하고 있다. 아기장수나 우투리 설화 등 한국 고전 민담에 반영되어 있는 남성성에 대한 정신 분석을 시도하는가 하면 해방기와 군사독재 시절을 거치며 형성된 군사주의적 남성성을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보고, 문학과 미디어에 반영된 남성성을 비평하기도 하며, 수행성 이론에 기초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남성들의 행동양식을 분석하기도 한다. 신화의 영역부터 현대의 온라인 커뮤니티까지라는 방대한 영역을 가지각색의 사회비판론으로 훑어보는 것이다.

 기획단계에서 구체적인 연구 주제와 방법론을 정하지 않고  그저 '한국남성성 분석'이라는 컨셉만을 정해주고는 연구원 각자에게 에세이를 쓰게 한 다음 거칠게 엮어낸 책이란 느낌이 강했다. 각 글에 주어진 분량도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의 주제가 짧은 페이지 안에서 진행되다 보니 주장하려고 하는 바에 대해 충분한 논의가 펼쳐지지도 못한다. 자신이 주장하려고 하는 바에 전제가 되는 기존 연구에 대한 소개도 아주 간략한 요약으로 언급될 뿐이고, 그 이후에 전개하는 고유한 주제도 대상을 깊이 있게 파고들지 못하고 인상 비평에 그칠 뿐이다. 소재가 워낙 제각각이기 때문에 앞선 글에서 언급되었던 주제가 다음 글에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단편적인 정보와 아이디어만이 난무할 뿐 어떤 논의도 뚜렷하게 와 닿는 것이 없고 산만할 뿐이다.  이렇다 보니 이 책의 수신인으로 상정된 집단이 과연 누구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중을 설득할 수 있을 정도로 친절하게 쓰여진 것도 아니고, 학계에 의미있는 담론을 제기할 정도로 참신하고 엄밀하지도 못하다. 같은 문제의식과 전제를 공유하고 있는 어떤 특수한 집단 내부에서나 읽힐 만한 텍스트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남자다움의 안과 밖>이라는 글에서 인용한 1970년대의 한 글이다. 서울대 의대 한동세 교수가 학술지에 발표했다는  <한국인의 성도착증>이라는 논문을 언급하면서, 저자는 한 교수가 한국인이 서양에 비해 "성도착"이 훨씬 덜 나타나는 이유 중 생물학적인 요인을 설명하는 글을 인용한다.

"서양인은 "정력이 넘쳐흘러" "변태"가 많은 반면 한국인은 "초식"을 위주로 하고 "기생충"이 많아 "정력이 남아돌"지 않으므로 "변태"가 적다고 설명했다. 이를 바탕으로 저자는, 한국의 성에 "음양"이 분명한 점을 자랑스런 전통, "태극"이라 말하고 글을 마무리했다." 120p

나는 이 인용문과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이 취한 방법론이 그다지 다를바 없다고 생각한다. 학적인 방법론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 대상집단의 특성에 대한 어떤 심층적인 연구와 통계 조사도 없이 자신의 의견(편견)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제멋대로 나열한 인상 비평,  종족 특성에 대한 단정적 정의, 전통 문화를 끌고 들어와 국가적 특성으로 단정짓기, 자신 또한 속해있는 집단에서 홀로 객관적 위치를 담보하고 있다는 태도로 대상을 타자화 한 뒤 비평하기 등등..

이런 식으로 쓰여진 글은 한정된 시대 안에서 한정된 이해를 공유하고 있는 집단의 사람들만이 수긍할 수 있을 뿐이지, 전혀 다른 시대에서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힘은 전혀 없는 글이다. 그렇다면, 이런 글의 효용이 뭐란 말인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끼리 공감하고 자위하는 것 이상의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 사유하기 위해선, 사유의 발판부터 제대로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단순한 인상분석을 나열할 단계는 이미 지난 것이 아닌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전략적으로 '한남'이란 용어를 쓴다고 해도, 학계에서는 좀 더 엄밀한 태도로 접근해서 사회학적 분석을 해 보아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대상을 섣불리 분석하기에 앞서 학자로서 자신의 방법론에 대해 고민하고, 조금이라도 학적으로 엄밀해지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배움을 얻기 위해 펼쳐든 책에서 의심과 답답함만을 느끼게 되었다.
여러 국가에서 나온 책을 찾아읽을 수록 '한남'이라고 흔히 지칭하는 집단의 특성이 우리나라 남자들만의 특성이 아니라 대부분 전 세계 남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특성이라는 걸 알게 되는데, 이런 점을 제대로 짚어주는 이론서를 이 나라에서 찾을 수가 없다.
공부할 수록 벽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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