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게
정영욱 지음 / 부크럼 / 202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구원에게』 사랑의 그림자가 지나간 자리에서, 끝내 나를 바라보게 되는 기록

🔺저자: 정영욱

🔺출판사: 부크럼


🎯 나는 오랫동안 정영욱이라는 이름을 위로의 문장과 함께 기억해 왔다. 『편지할게요』로 데뷔한 뒤 매해 수필을 펴내며, 『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될 것이다』 같은 책으로 많은 사람의 지친 마음에 다정한 말을 건네던 작가였으니까. 그래서 『구원에게』를 펼치기 전에도 어딘가 따뜻하고 부드러운 언어를 예상했다. 그런데 그 기대가 조금씩 흔들렸다. 위로의 결을 잠시 거두고 사랑의 상처와 균열, 지나온 관계의 어두운 잔여를 담담히 기록했다는 설명 앞에서 나는 이 책이 다정함보다 더 깊고 습한 내면을 보여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오래 붙들고 있었던 장면은 ‘운명’이었다. 정영욱은 사랑을 처음부터 설계된 서사처럼 말하지 않고, 셀 수 없는 우연이 겹쳐 뒤늦게 그렇게 불리게 되는 감정으로 바라본다. 바다가 생기고 생명이 태어나듯 사람의 마음도 그 순간에는 설명되지 않은 채 되어 간다. 그래서 누군가를 만나고 놓치고 다시 살아내는 일까지도, 당장 이해되지는 않지만 훗날 돌아보면 운명이라는 이름으로만 겨우 붙잡히는 것 같았다. 


🔖 사랑, 접촉, 관계를 닿음이 아니라 서로를 밀어내는 힘으로 해석하는 시선은 꽤 차갑고도 정확했다. 우리는 마주 잡고 얽히며 하나가 되었다고 믿지만, 실은 각자의 삶이 끝내 저항하고 있었다는 문장은 사랑의 본질을 낭만보다 물성에 가깝게 끌어온다. 찬란하다고 믿었던 감정이 왜 무채색으로 바래는지, 왜 함께 있는 동안보다 어긋난 뒤에야 관계의 실체를 보게 되는지 이 단락은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 


🔖 인간의 본능을 방황이라고 말하는 문장은 사랑과 삶을 동시에 설명하는 듯했다. 정영욱은 오랫동안 사람의 마음과 관계를 문장으로 붙들어 온 수필가답게, 흔들림을 실패가 아니라 성장의 퇴비처럼 바라본다. 길을 잃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럼에도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태도는, 이 책 전체에 짙게 깔린 상실의 정조 속에서도 미세한 숨구멍이 된다. 다정에게로, 행복에게로, 사랑에게로 


🔖 언젠가의 일이었다, 아니 어제였을 수도 있고 오늘이나 내일일 수도 있다는 문장들은 사랑의 기억이 시간 속에서 결코 한 방향으로만 멀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 번 손을 놓은 것은 물리 법칙처럼 돌아오지 못할지라도, 기억은 전혀 다른 법칙으로 되돌아온다. 그래서 이 책은 사랑했던 사람을 회상하는 기록이면서 동시에 사랑하던 나 자신을 복원하는 산문이 된다.


📌 『구원에게』는 사랑의 가장 빛나는 순간보다 그 뒤에 남는 잔향과 균열을 오래 바라보는 책이다. 이전 작품들에서 위로의 언어를 건네던 작가가 이번에는 그 다정함을 잠시 접고, 어둡고 습한 속내를 그대로 펼쳐 보였다는 점에서 분명한 결의 변화가 느껴졌다. 그래서 이 책은 누군가를 잊는 법보다, 사랑 이후에도 스스로를 어떻게 견디고 바라볼 것인가를 묻는 산문으로 남는다. 사랑의 폐허를 지나온 사람, 혹은 아직 지나가는 중인 사람에게 쉽게 지나치기 어려운 문장을 남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