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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자 사랑하기
빌헬름 게나찌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두 여자를 사랑하는 한 남자가 있다. 젊은 것도 아니고(50대의 중년이다.), 능력이 있는 것 역시 아니고(평생 일해야 먹고 살 수 있다.), 특별하게 잘 생겨서 그런 것은 더욱 아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_- 외모에 대한 이야기는 안 나온다.) 다만 조금 지적인 사람이기는 하다. 왜냐하면 강연을 해서 먹고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인간의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을 무기로 하는 종말 강연이기 때문에 사기꾼과 별다름 없다. 물론 긍정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강연을 듣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다지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다.-_-)
주인공이 사랑하는 두 여자의 이야기를 해 보자. 둘 중 한 명은 그의 아내일 것이고 다른 한 명과는 불륜의 관계일 거라는 상상은 말라. 그 남자는 결혼했다가 한 번 실패한 사람이다. 이혼 후 만난(잔드라의 경우 결혼 전부터 알던 사이지만) 두 여자와 줄다리기 사랑을 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두 여자는 그 남자가 양다리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다. 한 명은 유디트라는 예술 감각이 뛰어나고 지적인 동년배 여자다. 그와 대화가 통하고 감수성이 풍부하다는 것이 그녀의 장점이지만 다소 신경질적이고 가정적이지 못한 것은 흠이다. 또 다른 한 명은 그보다 연하인 잔드라. 가정적이면서 그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따뜻하고 편안한 여자다. 하지만 그와 지적인 대화를 나눌 수준은 못되는데다 그녀가 취미 삼아 그리는 그림을 그는 아주아주 형편없어 한다. (물론 티를 내지는 않지만)
두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양편 부모를 똑같이 사랑하는 것과 같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라고 주장하던 이 남자. (모 개그 프로에서 우스꽝스런 얼굴의 두 남자가 목이 터져라 부르짖던 짧은 문장이 생각난다.-_-) 이제 그는 선택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점점 늙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몸도 마음도 예전 같지 않다. 게다가 병을 앓고 있다. 성기능도 저하되고 있다. 모든 것이 우울한 상황이다. 게다가 그의 주위에는 이상한 사람들(대다수가 난생 처음 들어보는 직업과 인생 편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 잔뜩 있는데 그들의 행동양식과 사고는 그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 뿐이다.
그는 과연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유디트일까, 잔드라일까?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나는 흠뻑 빠졌다. 이 책은 줄거리라고 할 건 그다지 없다. 한 남자가 두 여자를 사랑하는 아주 간단한 이야기만 나올 뿐이다. 이 책을 영화로 만든다면 정말 지루할 것이다. 대사도 별로 없고 특별한 사건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문드문 블랙 코미디를 보는 거 같은 착각에 빠져 실소를 하기도 했다. 아무튼 두 여자를 사랑하는 주인공이 소소하고 일상적인 상황에 대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잔잔하게 전해주는 독백체에 가까운 책이다.
그래서 나는 남의 일기를 훔쳐 읽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것만큼 재미있는 게 어디 있을까? 게다가 문체가 매우 독특하다. 대화체의 문장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생각과 묘사와 대화가 두루뭉수리하게 엉겨 있기 때문에, 숨 쉴 틈 없이 주인공을 통해 전달되는 작가의 생각에 마구 몰입하게 만드는 힘을 느낄 수 있다.
삶은 아름답지도 안정적이지도 않다. 묘하게도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떤 선택의 기로에서 갈 길을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세상은 온통 혼란스러움으로 가득차 있다. 이 남자가 욕심이 많고 파렴치한 사람이라서 두 여자를 포기하지 않는 것일까? 나는 이 남자가 오히려 종말을 향해 가는 인류의 가치관에 대한 혼동과 종말에 대해 두려워하는 모두의 심리를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대로 가다가는 인류는 예상치 못한 때에 종말을 맞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 우리가 정상적이라고 생각할 만한 사람은 잔드라 말고는 이 책에 나오지 않는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간다고들 종종 표현하는 데 여기 나오는 인물들이 대체로 그렇다. 그들이 관심을 갖고 몰두하는 일은 터무니없을 정도다.
괴로운 마음으로 책을 덮어야 했다. 그렇지만 충분히 매력적인 책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을 둘러 쓰고는 '제대로' 문명 사회를 꼬집고 있다. 현대 독일 작가의 책은 처음이다. 개인적으로 좋은 경험이었다. 이 작가, 내 블랙리스트에 완전히 올라 섰다.
* 인상 깊었던 부분
내가 맞서 싸워야 할 인간이 한 명 있다. 그건 바로 나다.
이 순간 바지는 이상하게 설렁설렁/얼기설기/뒤죽박죽 이어져 온 내 인생 편력을 얘기하기 시작한다. 잠시 그 얘기를 듣고 있자니 기분이 상한다. 내 인생이 아주 흥미롭게 느껴지더니, 그것도 잠시일 뿐, 갑자기 지루해지는 것이다.
두 여자를 동시에 지속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적극 권장할 만한 일이다.(중략) 오히려 지극히 정상적이다.(그리고 정상으로 만들어준다.) 왜 어떤 경우에는 이중의 사랑이 가능하다고 하면서, 왜 다른 경우에는 이런 사랑을 금지해야 한다는 것인지 실로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 삼의 여자가 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 종업원과 어떻게 해볼까 하는 생각을 벌써 세 번씩이나 하고 있다.
(여행을 떠나는 유디트를 배웅하면서) 마음 속에서 연민의 감정이 생긴다. 이 감정이 다른 사람들을 향한 것이지, 아니면 나 자신을 향한 것인지 구별되지 않는다. 타인에 대한 연민을 자기연민과 명쾌하게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이 두 연민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분명한 것은, 자신을 연민하지 않고는 다른 사람도 연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중대한 사랑의 과오를 피하기 위해 나는 윤리를 위반하는 사소한 행위들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받아들인다. 내가 이런 생각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만족스럽다. 이로써 나는 불안에 떨면서도 만족할 줄 아는 사랑의 생존자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