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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안부를 묻는다
박남준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0년 3월
평점 :
품절
'야..고등학교에서는 수업시간에 창밖 쳐다보면 혼난대.' 그 때는 무슨 헛소문이 그리도 많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순진하게 그런 헛소문을 다 믿었는지. 하지만 나, 그 고등학교 시절에 가장 하늘을 많이 봤는걸. 수업시간이고 쉬는시간이고 귀가시간이고 가리지 않고 그렇게, 동경하고 사모하고 기뻐하고 괴로워하는 마음으로.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 하늘을 보지 않는 날이 많아졌고, 이제는 밤하늘의 별들을 가끔씩 올려다보기만 할 뿐. 푸른 하늘보다 까만 하늘을 더 많이 보게 되면서, 해가 지고 나서야 하늘을 보는 날이 많아지면서, 나 이제는 하늘사랑이 아니라 별사랑을 시작한 건 아닌지.
그래서였을까? 서점에서 <별의 안부를 묻는다>라는 책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음이. 그렇게 만난,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겠는, 아니 굳이 구분하고 싶지 않은 인연으로 이어진 그 책과 나.
아~ 무공해 자연산의 맛. 마흔 넘은 남자가 홀로 산속에서 살아가는 이야기. 현대판 청산별곡이라고 할 수도... 법정스님의 글 같은 느낌이나 어린왕자 같은 느낌도 살포시 느낄 수가 있어 반갑다. 어쩌면 어린왕자를 화두처럼 안고 살아가기에 조금만 닮아도 어린왕자를 떠올렸던 것일지도.
하지만, 이 책의 작가는 어린왕자를 만나기 위해 황량한 사막까지 갈 필요가 없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그에겐 만물들이 속삭이는 진리가 있는걸... 오히려 그는 자동응답기라는 문명의 이기를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기까지 한다. 사람들과의 부대낌과 그 가운데 생겨나는 상처 때문에 한때 자연으로의 도피를 꿈꾸던 나. 하지만 그는 사람들을 피해 산에 간 게 아니다. 그는 산에서 삶으로써 사람을 그 자체로 보듬을 수 있는 지혜를 얻었다......
깊은 밤 하늘 문득 올려다보았습니까. 혹시 지금이 밤이라면, 맑게 개인 날이라면 어서 방문을 열고 나가 고개를 들어 보아요. 시리도록 투명한 별빛이 일상으로 인해 피로해진 당신의 두 눈을 서늘하게 해 주지 않는가요. 별들, 생각해 보아요. 그 동안 너무 잊고 살아온 것은 아니었는지. 언제인가 한 번쯤 그 별빛이 당신의 늦은 귀가길이나 혹은 막막한 삶의 어느 한 구비에서 따뜻한 등불로 비추며 작은 위안이 되어주기도 하겠지요. 그러다가 말입니다, 또 어린 날 별빛에 실어 띄워 보내던 작은 작은 사랑의 소원이 떠오르기도 할 것이고요.
......
장독대 앞에 쪼그리고 앉아 따뜻한 봄기운에 언 땅이 녹아 내리는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던가. 내 발 앞을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다가드는 것이 있었다. 노란 족제비였다. 팔뚝만한 것이 턱에 괴고 있는 손만 내려도 잡을 수 있는 코앞까지 다가와 아이들 키만큼쯤 돌로 쌓아 올린 장독대로 올라가더니 돌 틈의 여기저기를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데,몸통만 들어가고 꼬리는 밖에 나와서 춤을 추듯이 나풀나풀거리는 것이었다.
그 긴 꼬리도 보기에 여간 탐스럽고 기분좋은 것이 아니었지만 나폴거리는 그 모습이 참 다시없는 것이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하던 나는 살짝 저 꼬리를 한 번 쓰다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장독대의 돌 틈을 기웃거리던 족제비가 홱 돌아서더니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더니 쏜살같이 돌아서서 뒷산을 향해 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망아의 상태. 족제비가 내 앞을 전혀 거리낌없이 다가설 수 있었던 것은 그 때 내가 나를 잊고 있었던, 넋을 놓고 있었던 때였나. 그래, 있는 그대로 보면 되는 것을 이쁘다거니 밉다거니 한갓 찰나의 분별을 가리며 살고 있구나. 그 족제비로 인해 깨달은 바가 자못 크다.
......
-'봄볕 속에서 놀았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