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나귀님 > 코미디가 되어 버린 포크너 번역본...
음향과 분노
윌리엄 포크너 지음 / 북피아(여강)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어쩌면 정인섭의 <음향과 분노>는 이 작품의 번역서로는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유일한 작품인지 모르겠다. (*)

  • 나중에 국립중앙도서관을 검색해 보니, 정인섭 번역본 말고도 곽동벽(대양서적, 1974)과 전호종(금성출판사, 1990) 번역본이 있다. 하지만 정인섭 번역본이야말로 1958년에 정음사 세계문학전집 중 한 권으로 처음 간행된 이래, 1972년(정음사), 1972년(삼중당), 1987년(자유교양사), 2000년(민족문화사), 2006년(북피아)에 이르기까지 거의 "반세기"동안 통용된 유일 번역본이나 마찬가지이다.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으나, 번역자인 정인섭(1903-1983)이란 인물이 그야말로 무지막지 "옛날" 양반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후 1987년에 자유교양사에서 나온 <음향과 분노>나 2006년에 새로 나온 북피아의 <음향과 분노>나, 과연 번역은 제대로 되었으며 편집은 또 제대로 되었는지를 두고, 저으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자유교양사 판 <음향과 분노>를 몇 번 읽어보려다가 실패한 이후에, 뭔가 새로운 번역본인가 싶어서 북피아 판을 기껏 도서관에서 빌려왔더니, 이건 뭐 역자 해설부터가 과거의 번역을 그대로 조판만 새로이 해서 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좀 허탈해졌다. 한 가지 신기한 건 87년 판에는 빠져 있었던 "부록" (포크너가 직접 덧붙였던) 이 이번 06년 판에서는 덧붙여져 있었다는 것인데, 이건 뭐, 돌아가신 저자가 다시 살아나서 작업을 한 것이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이게 새로 번역이 가능했는지 모르겠다. (물론 일찍이 6, 70년대의 번역본에서는 실려 있었다가, 87년도 번역본에서 누락된 것을, 06년도 번역본에서 다시 실은 것일 수도 있지만.) 솔직히 난 과거의 번역이라 해서 무조건 홀대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정말로 50년, 100년이 지나도록 사랑받는 명 번역도 있을 수 있고, 세월이 지났다고 해서 반드시 번역 실력이 일취월장한다고 생각하진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야말로 "정보의 홍수" 시대인 지금은 대개 과거보다는 정보가 많으니 오류 가능성이 적어졌다는 점에서는 더 낫긴 하겠지만.) 다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수십 년 전의 번역이라 하더라도, 맞춤법을 제외한 다른 면에서는 지금까지도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원문에 충실하고 오류가 적어야 하며, 또한 이것을 새로 편집, 조판해서 펴내는 경우에 출판사에서도 혹시나 그 와중에 새로운 오류가 더 생겨나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수십 년 전에 작업한 번역원고가 아직 남아있을 리 만무하므로, 기존에 출간되어 있던 책을 새로 "입력"해서 편집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가장 흔한 실수는 입력자가 오타를 내거나, 혹은 한두 줄이나 한두 단락 전체를 몽창 빼먹고 입력하는 식이다. 그런 까닭에 입력자(타이피스트)나 편집자가 웬만한 눈썰미와 작품에 대한 이해를 지닌 사람이 아닌 경우에, 정말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실수가 개입되기 쉽다. 북피아의 이 책의 경우, 이런 점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아서 그야말로 "황당무계한" 실수를 담고 있다. 단적인 예로, 이건 내가 "정말" 우연히 발견한 것인데, 이 책의 458쪽에 보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내게는 신성한 나무가 자라고 있는 창녀리 산 언덕이 보여요." 여기서 문득 "창녀리 산 언덕"이 뭔가 싶어 어리둥절해졌다. 제4장에서 흑인교회에 온 목사가 열정적으로 설교하는 대목에서, 예수의 십자가 고난을 이야기하다가 웬 "창녀리"인가 싶어 앞뒤 문맥을 살펴보니...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집에 있던 87년도 자유교양사 판본을 꺼내 비교해보니....

...보니...

...보니...

...보니...

...보니...

그건 바로 "갈보리 산 언덕"이었던 것이다~~!!!! 도무지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옛날 책을 입력하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갈보"라는 말이 어느 "눈 밝은" 입력자/편집자의 눈에 띄어, 이 말의 보다 현대적(?)인 표기인 "창녀"로 둔갑했던 것이다. 솔직히 이런 코미디가 어디 있나? 이 책의 출간에 관여한 그들 중에 하다못해 초딩 때 부활절 계란 얻어먹으러 친구 따라 교회 한 번 가 본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이런 멍청한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아니, "갈보"가 "창녀"의 옛날 말이라는 건 알면서, "갈보리"가 Calvary 의 번역어이며 예수의 십자가가 세워진 처형장소라는 건 전혀 몰랐던 것일까? 책을 읽기도 전에 황당한 실수 먼저 발견하고 입맛을 쩍쩍 다시며 맨 앞면을 펴보니, 얼씨구, 꼴에 미국 랜덤하우스와 정식 계약을 한 번역본이 아닌가. 결국 다른 출판사에서 제대로 된 번역에, 제대로 된 책을 내기는 한동안(최소 5년간) 틀렸다는 뜻이 된다. 이건 참... 뭐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다. 무식이 용감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황당의 극치라고나 할까. 하여간 출판사가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있고, 지각이라도 있으면 부디 제대로 다시 만든 책을 펴냈으면 좋겠다. 실력 있는 포크너 전공자에 의한 완역본이 완전히 새로 나왔으면 가장 바람직하겠고, 그게 아니라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오류는 좀 잡아보라는 거다. 기왕에 우리나라에 영문학을 한답시고, 그리고 포크너를 전공한답시고 하는 자칭 "전문가"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엉터리에 코미디 번역본이 서점에 나돌아다니도록 그 사람들은 도무지 뭘 하고 있었는지, 정말 머리 박고 반성해 마지않을 일이다. 이건 뭐, 뻑하면 무슨 번역이 좋네, 나쁘네, 어쩌네, 남이 기껏 고생한 것 트집만 잡으려 하지 말고, 전공자면 전공을 좀 살려서 제대로 좀 먼저 번역이나 해보라는 거다.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만 해도 1987년에 나왔던 책이 2006년에 다시 나오기까지 무려 20년의 공백이 있었고, <압살롬, 압살롬!>은 장왕록 선생의 번역이 1983년에 학원사에서 나온 후, 무려 20여 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새로운 번역본은 나오지 않고 있다. 포크너가 진정으로 미국 최고의 소설가이고, 20세기 미국 문학의 대표자이며, 자신들이 평생 그것만 파고서도 먹고 살 만한 위대한 작가라면, 어디 한 번 포크너의 작품을 한 권이라도 더 번역해서 대중화시켜보라 이거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검색해 보면 1990년부터 2006년까지 전국 대학의 영문과 대학원에서 심사를 통과한 석, 박사학위 논문 가운데 포크너에 관한 것만 100여 편에 달하고, 그중 <음향과 분노>인지 <소리와 분노>인지 <고함과 분노>인지에 대한 개별연구만 20여 편에 달한다. 어째서 그렇게 중요한 포크너 작품의 번역본을 한낱 코미디로 전락시키는가? 이런 식의 엉터리 번역본이 판을 치는 한, 개념 없는 출판사나 무관심한 전공자나, 독자로부터 날카로운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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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호밀밭 > 푸딩처럼 촉촉하고 맛있는 음악
Pudding - If I Could Meet Again
푸딩(Pudding) 연주 / 스톰프뮤직 / 2003년 10월
평점 :
품절



봄에 카페에서 차를 마시다 조금 지루해졌었는데 그때 귀를 열고 음악을 들었다. 나는 지루한데 음악은 참 평온하고 발랄했다. 연주곡이 왠지 외국 음반일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안녕>이 흘러나오고 저 음반이 뭘까 생각했었다.

카페를 나올 때 기어이 음반 이름을 알아 가지고 돌아왔었는데, 그때 티슈에 적어 온 음반 이름은 pudding이었다. 순간적으로 그 스펠링 조합을 읽지 못했는데 알고 보니 푸딩이었다. 아, 그 먹는 거. 어 왜 이름이 그럴까 생각했었다. 아마도 촉촉하고, 달콤한 음악이라는 뜻이었을까. 난 그렇게 받아 들였다. 주로 후식이나 간식으로 먹는 음식, 위에 부담을 안 주면서도 맛있고, 모양도 예쁜 음식이 푸딩이다. 음식과 음악은 닮았다는 생각도 든다. 위를 채워 주거나 마음을 채워 주거나 배부른 건 마찬가지이다.

음반을 사고 속지를 보니 다섯 명의 멤버들이 고마운 사람들을 죽 나열해 놓았다. 사진은 없었지만, 부모님과 친구들을 챙기는 글들을 보니 아직 풋풋한 청년들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가만한 음악이 있다. 뭔가 카페인이 섞인 듯한 중독성 강한 음악도 매력있지만 듣고 있다는 실감보다는 듣는 동안 마음이 먼저 알고 느끼는 음악도 좋다. 시원한 생수같은 음악이라고 해야 할까. 

첫 번째 곡은 아주 조용히 시작된다. 요란하지 않은 왈츠곡이 흐르는 듯하고, 가만히 누군가 손을 내미는 듯하다. 정말 춤을 출 수 있는 곡은 아니지만 발이 살짝살짝 움직여지는 곡이다.
긴박감이 느껴지는 도입부가 지나가면 한없이 편안해지는 두 번째 곡, 다양한 느낌이 섞인 듯하다. 중간에 통통 튀어서 강약을 주는 음악이 세련되게 들린다. 급박하게 끝나는 느낌도 성급하면서도 젊게 느껴져서 좋다.

세 번째 곡 <안녕>은 익숙한 가사인 <안녕, 귀여운 내 친구야>로 시작된다. 그리고 곧 편안한 연주로 넘어간다. 친구들 전학 갈 때 부르는 노래처럼 알려져 있지만 이 노래는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에서 보물섬이 죽었을 때 나오는 노래이다.
신나는 기분, 달리는 기분이 느껴지는, 콧노래가 나오는 듯한 네 번째 곡을 가장 좋아한다. 흥얼거리는 듯한 노래, 가사 없이 이어지는 곡, 그렇다고 랄랄라는 아니지만 즉흥적인 듯한 코러스는 참 편안하다. 들으려 하지 않아도 되는 목소리의 조화가 매력있다.
신나게 항해하던 배가 잠시 숨을 고르듯 다섯 번째 음악부터는 느낌을 달리 한다. Ave Maria란 제목 때문일까. 고요한 숨소리가 들리는 듯한 음악이다.

일곱 번째 곡은 슈베릴라라라고 들리는 코러스가 재미있다. 난 내가 모르는 외국어를 들을 때는 노래를 듣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이 음반에 있는 코러스들이 그렇다. 경쾌함도 좋고, 그 가벼운 느낌이 좋다.
아홉 번째 곡은 쉬어 가는 분위기로 마음을 한 번 눌러 주는 듯하다. 원래 피아노는 흘러가는 물소리 같기도 하고 마음을 콕콕 찍어 주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 곡에서는 두드리듯 찍어 주기 보다는 그냥 스치듯 지나간다. 바람소리같은 피아노 소리가 쉬엄쉬엄이라고 말하는 듯한 곡이다.

소풍을 가는 듯한 가벼운 코러스가 매력적인 열 번째 곡은 둘둘랄라식의 코러스가 나오는데 통통 튀는 듯한 음악이 좋다.
열세 번째 곡은 어린아이가 노래를 한다. 그리고 아이들의 합창이 이어진다. 의외의 곡인데 아이들의 노래는 천사들 목소리 같다. 천사들이 Don't worry, be free라고 또박또박 말해 주니 세상 일이 다 잘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곡이다. 그런데 제목을 보니 레퀴엠이다. 아마도 죽은 자를 위해 부르는 노래인듯하다.

전체적으로 참 촉촉하게 느껴지는 음악들이다. 아침에 들어도 어울릴 듯하고, 자기 전에 들어도 좋은 꿈을 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곡들이다. 푸딩과 같이 달콤한 맛, 하지만 푸딩에 들어가는 설탕에는 중독이 되지만 이 음반 속에는 그런 단맛은 없다. 입안을 상쾌하게 해 주는 향이 들어있는 것처럼 상쾌한 맛이 난다고나 할까. 중독되지 않는 음악들이 좋다. 착해지는 기분이 드는 음악들, 만든 사람들도 아주 착할 거라 생각된다. 음악을 듣는 나도 조금은 착해져야지라고 생각하게 되는 음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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