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5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199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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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는 서구, 도시, 현대 문명의 화려함도 알고 있지만, 그 뒤에 숨은 어두운 모습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막상 우리 자신이 삶을 선택할 때는 도시의 어두운 것을 '외면'하면서라도 도시의 삶을 선택할 때가 많다. 방드르디 자신은 몰랐을까? 백인들의 배를 따라가 보았자 자신은 차별 받으면서 하층의 생활을 할 것이라는 것을, 방드르디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로빈슨과 함께 사는 것이, 화려한 생활은 없어도 마음 편하게 사는 방법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방드르디는 위험한 모험을 택했다. 시골 청년들은 도시에 가면 시골 보다 훨씬 고생할 것을 알면서도, 오히려 먹고 살기에는 시골이 더 좋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울로 몰려들었다. 내가 만약 글 후반부에 나오는 방드르디였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아마 나는 화이트버드의 생활을 택하였을 것 같다

역설적으로 배에서 가장 천대받던 수부가 로빈슨에게 찾아오는 장면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도시, 서양, 현대 문명에 살지 못했던 사람들은 그것을 동경한다. 하지만 그 속에서 살던 사람들은 그것에 환멸을 느끼고, 로빈슨과 이 수부(나중에 목요일이라는 뜻의 '죄디'로 불리는)와 같이 근대화되지 않은 곳을 찾아 나선다. 어떠한 것이 바람직한 삶의 태도일까? 정말 어려운 문제이다. 이 소설은 서구인의 삶을 비판하고 비 서구인의 삶을 옹호함으로써 다른 시각으로 문명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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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현대사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연 / 소나무 / 198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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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윈을 보면서 박정희와 상당히 유사한 점이 있다고 느꼈다. 2인자에 대해서 철저히 배격하고, 반상회 등을 통해 국민의 입과 귀를 통제하려고 애쓰며, 중앙 정보부를 통해 엄격한 감시체제를 만든 것은 너무나도 흡사하다. 장기 집권을 시도한 것과 정부 중심의 경제 정책을 운용한 것도 비슷하다. 대부분의 지배층이 부정 부패를 통해 재산을 축적하는 것을 용인하면서도 정작 네윈과 박정희 자신은 부정 부패가 적었다는 것도 눈에 띄는 일이다.

그러나 네윈은 박정희와 달리, 자신의 국가의 독립을 위해 싸웠고 그것이 초기 집권 시의 정통성을 보장해 주었다. 물론 두 명 모두 친일을 했지만, 한국과 미얀마의 친일의 의미는 다르다. 네윈은 영국을 견제하는 의미에서, 일본의 도움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이 두 지도자를 보면, 식민지였던 국가, 제3세계 국가에서 자본주의 사회주의의 구분이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한 명은 미얀마식 사회주의를 표방했고, 한 명은 한국식 민주주의를 표방했다. 그러나 통치 방식은, 독재의 형태로 비슷하였다.

제3세계에서 야심찬 엘리트 청년들이 군대에서 자신의 꿈을 펼치려 하였다. 그리고 정치가들의 무능과 부패는 이들에게 기회를 주었다. 이들은 집권 초기에는 군인 다운 패기와 추진력으로 국가를 부흥시키려 노력하였고, 실제로 이들에 의해 제3세계의 근대화가 이루어진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의 몰락은 비참하였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민중의 요구에 군부는 비참하게 몰락하였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군인'이었지 '정치가'는 아니었던 것이다.

조금 나라가 늦게 부흥되는 단점이 있더라도, 민주적인 방법으로 통치하는 것이 결국은 옳지 않았을까? 미얀마에서 계속되는 공산당의 반란과 소수 민족의 갈등, 한국에서 고착화된 분단의 문제 등을 살펴 볼 때 네윈과 박정희는 너무 자신을 과대 평가한 측면이 있다. 조금 나쁘게 말하면, '국가'와 자신의 통치를 동일시하였다. 민중들의 지탄을 받아 가면서도 자신의 집권을 조금이라도 연장하기 위해 애쓰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 어리석고 불쌍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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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죄와 망언 사이에서
카또오 노리히로 / 창비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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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평화헌법 폐기 주장은 우리가 양면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미국의 내정 간섭을 비판하고 일본 자신의 주체성을 찾는 행동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는 평화 헌법 주장을 통해 역사에 대한 사죄 없이 자신들의 무장화와 군국주의를 정당화하려는 움직임이다. 침략의 피해 당사자인 한국은 일본의 군사대국화 움직임에 결코 동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이 일본에 대한 감정적인 비난으로 그치지 말고, 합리적으로 대응해야 할 것이다.

일본 정부는 평화헌법 폐기 주장을 하기 전에 먼저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과 일본 민중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독일이 끊임없이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일본은 오히려 침략을 정당화하고 있다. 독일 정부가 히틀러의 침략 행위를 비판한다고 해서, 독일의 정체성Identity이 손상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일본 정부는 침략 행위의 과오를 인정하고, 그것을 '시대가 그러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오히려 아시아를 서양으로부터 해방시키지 않았느냐'라는 식의 감정적이고 궤변적인 주장을 그만두어야 한다. 패전 후의 군국주의자들과 그들의 후계자인 자민당 세력에게 이런 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너무 무리한 요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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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불리 일본을 말하지 말라
후카사쿠 미쓰사다 / 서울기획 / 199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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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보면서 저자가 일본의 문화를 너무 미화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어느 나라나 그 나라의 환경에 맞는 문화를 가지게 마련이다. 쌀이 다른 잡곡류보다 영양상태가 월등히 뛰어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집을 여름 중심으로 지어서 겨울에는 춥게 지낸 점, 고기를 잘 안 먹고 밥으로 영양을 보충한 것이 '자랑'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일본 문화의 모습들을 건축술이나 생산력의 부족으로 설명하지 않고, 미화만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저자는 일본 문화를 소개하면서 은연중에 우월감을 내비치는 듯한 모습을 보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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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문화론의 변용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30
아오키 다모쓰 지음, 최경국 옮김 / 소화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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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경제 성장을 하고 있을 때에는 일본인의 특수성과 일본인의 집단주의적 문화가 세계적으로 본받을 만한 가치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막상 그러한 것들이 미국을 비롯한 세계에서 적용시켜 본 결과, '비민주적이고 차별적인' 경영이 이루어졌다. 게다가 1990년대에 들어 일본의 경제 불황이 심해지면서 일본적인 특성에 관한 근본적인 회의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한국에서도 80년대 까지는 일본을 본받으려는 움직임이 많았지만, 지금은 그런 논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저자는 지금까지의 일본문화 담론이 가진 한계를 잘 지적하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의 사회 구조는 무척 다르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유럽 문화'라는 이름으로 하나라고 부르는 오류를 범하였다. 일본인들이 집단적이라고 하지만, 독일의 집단주의적인 모습을 보면, '오직 일본만이' 집단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번 학기에 다루었던 '축소 지향의 일본인, 일본인과 일본 문화, 일본인과 집단 주의' 등 수많은 책들이 이러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였던 것 같다.

재미있었던 것은, 향후 일본에서의 국제화 논쟁이, 한국에서의 국제화 논쟁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것이었다. '쇄국적'인 입장에서는 일본과 외국과의 문화적 차이를 강조하여 일본의 국제화에는 한도가 있고, 외국인이나 이문화와의 상호 교류도 어디까지나 일본 문화의 특질에 입각하여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 나라도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국제적인 것이다.'라는 주장을 한다. 그래서 전통적인 것을 현대화한 서편제 같은 영화를 예로 들어, 우리 전통적인 것을 잘 살리면 세계에서도 인정받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보편성이 결여된 전통 문화의 세계화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일본의 현대 음악은 해외에서도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하지만, 가부키 같은 연극이 해외에서 받는 반응은 단지 '매우 특이하다'는 것일 뿐, 외국인들의 감성을 이끌어 내지는 못한다.

'개방적'인 입장에서는 지금과 같이 국제 사회 속에서 일본이 외국과 상호 교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에서는 제도나 조직도 개방하여 외국인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고 외국어와 일본어를 병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치 우리 나라에서 한참 논의되고 있는 '영어 공용어 사용' 문제를 보는 것 같다.

사실 민족이라는 것이 비록 허구적인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음이 많이 밝혀지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민족 혹은 민족성의 구분을 완전히 뛰어 남는 국제화가 있을 지 의문이다. 청나라가 한족을 점령한 후, 청나라 고유의 문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지배층인 만주족이 오히려 피지배층인 한족에게 흡수되고 말았다. 영어를 많이 써야 세계화, 국제화에 대비할 수 있다는 주장은 한국 혹은 일본이 미국에 흡수되는 것을 바라는 은근히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의 일본 문화론은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단순히 일본 대 서구(미국)의 비교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기 쉽다. 또한 일본을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반대로 비하해서도 안 된다. 역사적인 사실과 사회 경제적 자료를 통하여 일본의 문화에 관한 담론은 더욱 체계화되고 정교해져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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