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섬 ㅣ 그르니에 선집 1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199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까뮈를 사랑한다면 피해갈 수 없는 이름 중 하나, 그리고 그 정점에 서 있는 것이 그르니에다.
그런데 오묘하게... 계속 피해갔다.
여기저기서 걸리고 스치는데도 묘하게 손이 가질 않아서 거리를 두고 있다가
얼마 전 친구와의 통화에서 그르니에 이야기가 나왔는데 서점에 가게 되었고 그러다가 집어왔다.
그리고 읽기 시작했는데...
일단 서문, 까뮈의 서문에서 '아아~♡' 팬심을 발휘하며, 그래 완소 까뮈가 좋다고 이렇게 칭찬하는데 좋겠지... 거기다 김화영 선생님의 그 소녀스런 추천글이라니...(웃음) 어쨌든 잔뜩 기대하며 책을 펼쳤다.
책에 실린 산문들의 첫 문장들은 정말 하나 같이 매혹적이었다.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 있다.
-공空의 선택
특히 고양이 물루의 첫 문장은 어찌나 직격하는지 몇번이나 반복해서 읽었을 정도였다.
짐승들의 세계는 침묵과 도약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런데 고양이 물루를 정점으로 부활의 섬까지 읽으면서, 굉장히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는데, 그것은 결코 好의 감정이 아닌 분명한 거부감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기술해나가는 시선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그러다 글을 마무리 짓는 결론에서 섬뜩함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실험체' '잘 벼린 칼날' '깨진 크리스털' '금속성' '차갑고 미끈한 파충류' 대략 이런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이제 땅 속에 누워 있었다. 바로 그날 저녁부터 떨어진 낙엽이 그 위를 덮었다. 나는 발길을 재촉하여 허둥지둥 내 방으로 올라갔다. 그 다음날 출발할 예정이었는데 이사 준비가 아직도 채 끝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 고양이 물루
나는 지금, 아직은 희미한 의식이 남아 있을 때의 백정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곧 의식을 잃었고 그 다음 일은 그 어느 누구와도 상관없는 일다. - 부활의 섬
그래서 '아,까뮈는 좋지만 당췌 그르니에는 안맞는구나'는 결론에 이르렀고 뒤에 남아있는 상상의 인도, 사라져버리는 것들을 읽지 않고 내버려두었다가 이게 참 인연인지(글 자체의 가독성은 상당히 좋다) 몇 개 안남은 거 다 읽어치.우.자.는 마음으로 다시 읽었다.
그런데... 이거 참, 마지막 이 두 편을 읽고나니 이 작가의 시선에 대한 호/불호와는 상관없이 관통하는 하나의 맥락이 이해가 되면서... 나도 모르게 다시 책 맨 앞을 펼쳤다.
그렇게 까뮈의 서문을 읽으면서 한 순간 읽었던 그르니에의 글들이 하나로 꿰어지고, 그래서 그 힘에 끌려 맨 첫 산문인 '공의 매혹'까지 다시 읽게 되었고, 그때의 느낌은 맨 처음 책을 펼쳐 읽었을 때 받았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굉장히 신기한 경험이었다).
보통 까뮈의 문학을 논할 때 상당히 자주 듣는 말이 있다. '부정을 통한 긍정' '실존주의가 끝나는 곳에 내가 있다.' 등등.
그르니에를 읽고 나니 소위 말하는 까뮈의 '부정'의 기법이 어디서 잉태된 것인지 눈에 들어왔고 '왜 실존주의가 끝나는 곳에 내가 있다'고 까뮈가 말한 것인지, 그리고 두 사람이 공통으로 택한 '부정'의 기법의 본질적인 차이, 그리고 마지막 도달한 완전히 다르고 또 그렇게 다르지도 않은(등을 맞대고 있다고나 할까.) 종착점(?) 또한 확연하게 다가왔다.
그르니까^^;; 그르니에의 부정은 '인간'이었다.
그래서 그 카데고리에 속한 나는 부지불식간에 거부감을 느낀 것이다. 그러나 늘 생각해왔던 '부정'의 의미와는 달리 그르니에의 '부정'은 자연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연으로서의 인간을 위해 인간으로 만들어진 인간을 부정했다. 그리하여 우리를 황홀하게 만들고 벅차게 만드는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 들어있는 '생존'을 위한 '살육'을 일깨운 것이다.
예전에 내셔널 지오그래픽스에서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날갯짓으로 강을 향해 뛰어드는 물수리, 그리고 그 물수리가 성공적으로 낚아채 사냥한 숭어, 눈부신 햇빛에 반짝이는 사방으로 튄 물방울과 싱싱한 비늘의 펄떡거림이 그대로 드러나는 숭어의 몸부림, 웅장한 산맥들 사이로 사라지는 물수리, 다시 화면에 남은 곳은 찬란하리 아름다운 자연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대로 흐르는 강물, 여전히 푸르름을 잃지 않는 녹색의 들판, 만년설을 모자처럼 쓴 커다란 산맥, 모든 '비극'(인간의 시선에서)은 사라지고 평온함만이 남은 '침묵'이었다.
그르니에의 끝은 이렇게 '침묵' 더 나아가 '무無'였고 아이러니하게 '실존'이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내가 느낀 것은 확실히 감동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가졌던 내 것과는 확연하게 다르지만, 그르니에가 도달한 그것이 주는 매혹은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까뮈의 서문을 읽었을 때, 까뮈의 시선(그러니까 내것과 유사한 시선)으로 바라본 그르니에가 고스란히 다가왔고, 까뮈가 느꼈던 감동, 차이를 통한 충격적인 깨달음(비슷한 데서는 공감과 발전을 느낄지언정 머리를 후려치는 깨달음을 얻기란 어렵다)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리하여, 그르니에의 다른 글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과연 그가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잔혹함을 내가 견딜 수 있을지... 는 차치하고라서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