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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고의 숲
로버트 홀드스톡 지음, 김상훈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좋아해서 자주 가는 까페 앞에 아주 커다란 밤나무 숲이 있다. 까페와 숲 사이에는 아주 작은 도랑이 있고 길고 예민한 잎으로 감싸고 있는 밤나무 숲은 손에 닿을 듯 하면서도 멀리 있는 이질적인 느낌을 준다. 밤나무 아래 빽빽히 들이차 있는 강인한 초록의 덤불 숲과 여리지만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있는 풀들. 고요하고 차분하고 정적인 심상. 주된 생명의 주체가 식물이기 때문일까. 살이있음을 끊임없이 보여주고 확인하는 동물과 달리 그저 그곳에 존재하는 나무의 느낌. 하지만, 존재감만은 어느 생물보다 확고해 그저 보고만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다. 마치 땅 속 깊이 굳건히 박고 있는 뿌리와도 같이.
미사고의 숲은 친숙하게 늘 옆에 있는 현실의 숲과 심상에 의해 더욱 존재감을 확고히 하는 신화의 숲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황홀하게 깨워준다. 현실에 머물러 아버지와 형을 통해 미사고의 숲을 의식한 후 잠깐 엿보던 스티븐이 귀네스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통나무 집을 일종의 경계지역으로써 이용하며 환상과 현실의 세계 양쪽에 자신을 걸친다. 이 때만해도 스티븐은 귀네스를 자신의 현실로 데리고 올 생각을 할 뿐 자신이 그 경계를 넘어 환상의 세계로 갈 생각은 하지 않는다. 결국 이들의 운명에 의해 미사고의 숲으로 들어간 스티븐은 자신이 만들어 낸, 혹은 자신의 형이나 아버지가 만들어 낸 세계 속에서 그들이 또 다른 환상(전설)임을 깨닫는다.
전개가 어찌나 치밀하고 과학적인지 마치 스티븐이 미사고의 숲을 이상하리만큼 자연스럽게 인식하게 된 것처럼 읽는 이로 하여금 미사고의 숲에, 스티븐의 세계에 그대로 빠져들게 한다. 가히 저자가 Sci-Fi라 주장할 만한(저자는 이 소설이 환상소설이 아닌 Sci-Fi라고 했다고 한다) 탄탄한 구성과 전개력을 가졌다. 과학자들이 단계 단계 실험을 통해 인식을 확장하고 새로운 모험에 뛰어들어 커다란 발견을 하는 것처럼.
한가지 안타까운 점이라면 영국 토착민 이나 켈트족의 신화에 대해 워낙 무지하다보니 저자가 다루고 있는 의미있는 많은 것들을 놓쳤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영국의 수많은 신화와 신화의 인물들, 문화인류학, 융의 집단 무의식에 이르기까지 아우르는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이들을 융해해 미사고의 숲에 녹아내리는 능력은 그저 어안이 벙벙해지게 만든다.
사실 서평을 쓰고는 있지만 이 책을 단순한 감상으로 적어서 나열하기에는 너무 힘들다. 직접 읽고 작가가 보여준 신화적 심상에 함께 빠져드는 것. 이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