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야기는 힘이 세다. 세계는 무수히 분절된, 그러나 사실은 하나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층위에서는, 나도 이야기고 너도 이야기다. 존재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이고, 소멸은 소멸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범주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여기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이 언제나 이야기가 되기 위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모든 이야기가 힘이 센 것은 아니다. 오직 재미있는 이야기만이 힘이 세다. 재미없는 이야기(베이징에서 올림픽이 열렸다)도 이야기긴 하다. 그러나 좀 더 재미있는 이야기(베이징 올림픽에서 박태환이 금메달을 땄다)가 되고, 그보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박태환은 잘생겼다)가 되고, 마침내는 죽이는 이야기(나는 목욕탕에서 박태환의 알몸을 본 적이 있다)가 되지 않으면 그 이야기는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객관적 사실의 차원을 넘어, 주관적 사실, 주관적 감상의 차원으로 진화하고, 결국은 반 구라의 차원까지 올라온 이야기만이 영원하다.

구라, 구라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진실을 담은 이야기가 영원한 까닭은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진실이 언제나 반-구라 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진실은 메마르고 꺼칠하기만 해서 가문 논바닥처럼 짝짝 갈라진다. 거기에서는 아무 이야기도 자라지 못한다. 진실의 황무지에서 참한 이야기의 싹이 돋으려면 구라가 거기 물을 줘야 한다. 이야기 없이 진실은 전달될 수 없으므로, 구라 없이 진실은 전달되지 못한다. 진실과 구라는 항상 한 몸이다. 고로 이야기에서 사실과 구라를 해부하여 다른 접시에 담아 보려는 모든 노력은 헛되다. 필요한 것은 두 개의 접시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진실로 듣는 한 짝의 귀 뿐이다.

보험사정인들은 '사실'을 원했고 파이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들은 원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내가 읽은(들은) <파이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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