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딸 루이즈
쥐스틴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이덴슬리벨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이 소설은 작가 쥐스틴 레비의 자전적 소설로서 엄마의 병과 죽음, 동시에 자신의 임신과 딸의 탄생 과정을 함께 그려냈다. 엄마 알리스는 종양이 전이되어 투병 중이지만, 루이즈는 애인 생일을 맞이해서 여행을 떠난다. 그 여행에서 자신이 아기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런 사실을 알리스에게 알릴 새도 없이 알리스의 병은 급속도로 나빠지고 만다. 결국 알리스는 죽음을 맞이하고, 루이즈는 곧 엄마가 된다. 이와 같은 모습은 ‘엄마-나-딸’로 이어지는 삶의 연장선을 이야기하고 있다. 어린 시절의 루이즈는 엄마가 눈앞에 있더라도 엄마의 부재를 느끼는 아이였다. 왜냐하면, 알리스는 다른 엄마들과는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다. 알리스는 거리의 부랑자라도 상관없이 세상 모든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했던 자유분방한 사고를 가졌으며 술과 담배, 마약, 예술에 심취한 보헤미안이었다. 알리스의 이러한 성향은 딸 루이즈에게 그대로 영향을 끼쳤다. 어린 루이즈에겐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이 거대한 자유가 가장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음, 이 모든 멋진 자유, 약이며 주사며 대초를 장난감처럼 갖고 노는 자유, 몇 방울 남지 않은 술잔을 홀짝 비우고, 여섯 살 나이에 우스갯소리를 하는 어른들에 둘러싸여 머리가 납덩이처럼 무거워지면서도 정신은 몽롱해지는 취기를 발견하는 자유, 원할 때 빵이든 열대과일 리치든 크라코트 비스킷이든 사탕이든 바닥에 굴러다니는 건 무엇이든 먹어도 되는 자유, 옆방에서 사랑을 나누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유, … 나는 이 자유가 끔찍하게 싫다. 그런 생각만 하면 두려워지고 몸서리가 쳐진다. 나는 오직 정해진 규범만이 좋다. 밀리미터 단위로 맞춰진 시간표,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습관, 늦었으니까 일찍 자러 가는 것, 때가 되었으니까 밥을 먹는 것, 엄마가 상냥하니까 엄마를 사랑하는 것…”

 

       이 부분만 보아도 두 사람의 관계가 애정과 희생과 같은 일반적인 모녀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루이즈는 평범함을 동경했고, 알리스로부터 부여받은 거대한 자유가 도리어 유년의 결핍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므로 루이즈가 알리스에게 갖는 감정은 ‘애정’이 아닌 ‘애증’이다. 이 책이 모녀 관계를 다루는 여타 소설과 차별화되는 이유도 거기서 비롯된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 펼쳐지는 내적 독백이 주를 이루는데, 이와 같은 서술이 자기중심적이며 냉소적이다. 바로 루이즈가 알리스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러하다. 아픈 엄마를 두고 여행을 다녀온 것도, 과거를 회상하며 엄마를 원망을 수시로 원망할 수 있는 것도, “엄마가 죽었다…그러나 나는 울부짖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손을 배 위에 가만히 모은 채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울고 싶지도 않고 주저앉고 싶지도 않다.p97 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다. 독자는 루이즈의 냉정하고도 쌀쌀맞은 자조에 충격을 받다가도 쓸쓸한 마음이 되고 만다. 자조에 깃든 깊은 슬픔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강하고 덤덤한 루이즈를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아무 생각하지 않았을까? 주저앉지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건 아니었을까?

 

      누구나 엄마가 된다. 하지만 루이즈에게 ‘엄마’라는 칭호는 마치 한 여자만의 고유한 직업처럼 여겨졌을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언젠가 엄마가 된다는 사실 이외엔 어떤 것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먼 이야기 같기만 하다. 엄마가 되어서, 엄마의 입장으로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은 경이롭고 신비한 일이지만 그만큼 두려운 것이기도 할 것이다. 루이즈는 갑작스럽게 엄마가 된 자신이 엄마가 될 수 있을지 고민한다. 엄마에게 받지 못한 사랑과 관심, 규칙적인 교육을 위해 다양한 책을 읽어 보지만, 다 헛수고이며, 제대로 엄마노릇을 못할 거라는 생각에 암담해지기 일쑤였다. 또한 뱃속에 있는 자식에게 어떠한 애정도 못 느껴서 술을 먹고, 불룩한 배를 내밀고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기도 했는데, 그 모습은 거의 엄마로서 자포자기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딸 앙젤이 탄생하자 루이즈의 마음은 이전의 것이 아니었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갈망, 앙젤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느끼게 된 것이다. 후반부에서 루이즈가 앙젤의 표정에서, 작은 시선에서 엄마의 흔적을 느끼는 장면은 내겐 마치 모녀의 불편했던 감정을 모두 내려놓고, 화해를 하는 것처럼 기적적으로 느껴졌다.

 

      소설은 자기중심적으로 서술되어 있어 마치 누군가의 일기장을 훔쳐본 것 같은 느낌이다. 과거시제와 현재시제로 종종 바뀌기도 하고, 자유화법을 사용해서 시점과 주체의 행위가 헷갈리며 모호한 문장도 눈에 띈다. 이러한 특징이 거슬리는 독자도 분명 있을 거다. 주인공의 극단적인 말투와 건조한 사고방식 또한 독자를 불편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에겐 그렇기 때문에 더욱 매력적인 소설이었다.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더라도 소설 속의 인물의 삶을 내 것처럼 공감하고, 마치 또 다른 인생을 산 것처럼 여겨져 진다면, 그만큼 가슴 벅찬 기쁨이 있을까 싶은 것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맺을 수 있는 다양한 관계 중에도 ‘모녀 관계’는 필연적이다. 루이즈처럼 엄마에 대한 불편한 기억이 가득한 사람도, 엄마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없는 사람에게도 자신을 낳아준 ‘엄마’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자명한 것이다. 나는 루이즈가 슬픔과 분노의 감정을 넘나들면서 토해낸 고통의 문장들을 읽으면서 ‘엄마’의 존재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했다. 나 또한 엄마를 떠올리면 무조건적인 애정과 사랑으로 벅차오르는 건 아니다. 도리어 섭섭하고, 미워했던 엄마의 모습도 조금씩 떠오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엄마를 절실하게 사랑함을 부정할 수 없다. 또한 엄마도 나를 사랑함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루이스와 알리스의 관계도 사실은 그렇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내가 느끼기엔 알리스가 ‘엄마’라는 단어를 내뱉을 때마다 연민이라는 희미한 테두리가 그 단어를 보호하고 있는 것만 같았으니 말이다. 물론 성인이 되어도 이해하지 못했던 엄마를 앞으로 엄마가 된 루이스가 이해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기대와 희망을 걸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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