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는 사회학 - 인문학적 사회학의 귀환 현대의 지성 161
정수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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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김경만 선생의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 대척점에 서있는 책이 정수복 선생의 '응답하는 사회학'이다. 김경만의 지적도발 이후 정수복 선생은 비판사회학회의 경제와 사회라는 저널을 통해 김경만의 주장에 대해 약 40여 쪽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정수복 선생은 로컬 지식장을 강조한다. 한국적 사회학의 특수성이 세계적 사회학의 보편성의 외연을 넓히는 작업을 해야한다고 주장하며, 한국 현실에 관여하고 동료학자들(로컬 지식장)의 지적 결과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정수복 선생이 생각하는 한국 사회학에 대한 해답은 주변의 삶에, 사회에 '응답하는 사회학'이다. 정수복 선생은 작년 12월에 있었던 한국사회학 대회 중 문화사회학회 세션에서도 '사회학회가 너무 사회에 유리되어있다. 아무리 높은 학문적 성과가 있어도 그것이 대중들에게 읽히지 않고 몇몇 사회학자들에게 읽히는 것은 안타깝다.'는 논지의 이야기를 했고 또 사회학자들이 글을 너무 못쓴다는 지적도 했다.

정수복 선생의 책은 크게 1부에서는 예술로서의 사회학, 즉 실증주의 이후의 사회학, 사회에 응답하는 사회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2부에서는 사회학자로서의 자기분석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 동시에 피에르 부르디외의 삶에 대해 서술한다. 또 3부에서는 한국 사회학자들의 저서를 평가한다.

이 책에서 정수복 선생의 주된 논지는 사회학이 전문성에만 매몰되어 대중성을 잃은 현실에 대한 비판과 함께, 사회학이 그 연구 대상인 사회적 사실(Social Fact)을 사물처럼 다루는데 몰두하고 과학으로서의 사회학, 근대적이고 실증적인 사회학이 아닌 보통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삶을 가능케하는 인문학-해석학적 사회학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정수복은 실재의 사회적 재구성이라는 현상학적 사회학으로 유명한 피터 버거의 말인 "좋은 사회학은 좋은 소설과 유사하다"을 인용하면서 결국 사회학은 사회에 말을 건네고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정수복 선생은 책에서 사회학은 복수 패러다임의 학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정수복 선생은 절대 과학주의 사회학을 무시하는 입장이 아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부분은 정수복이 피에르 부르디외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다. 정수복은 피에르 부르디외, 미셸 푸코, 롤랑 바르트, 자크 데리다, 밀란 쿤데라 등이 교수로 있었던 프랑스 고등사회과학연구원(EHESS)에서 박사학위를 한 분인데, 그래서 그런지 그의 부르디외 서술은 꽤 재밌다.

정작 정수복은 당시 프랑스 사회학계를 4등분 했던 네 가지 전통, 피에르 부르디외의 발생론적 구조주의, 발랑디에와 알렌 투렌의 동태적 사회학, 레이몽 부동의 방법론적 개인주의, 크로지에의 전략적 접근 중에서 알렌 투렌의 지도로 학위를 했고 의외로 EHESS안에서도 부르디외와 대척점에 있는 투렌의 제자로서 프랑스에서 부르디외를 만나본 적은 없다고 한다.

정수복은 2000년 초반 방한한 부르디외와의 인연에 대해 설명한다. 그리고 부르디외는 2002년에 타계한다. 그 이후 정수복은 프랑스에 가서 20세기 최고의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삶의 궤적을 추적하며 그에 대한 글을 써내려간다.

구체적인 서술도 재미있지만 여기서 정수복이 이야기하는 바는 이렇다. 글로벌 지식장에서 사회과학 피인용지수 2위를 차지하며 최고의 상징자본을 축적하고 상징권력을 가진 부르디외의 학문적 작업도 결국 그의 '삶'에서부터 시작됐다는 것이다.

정수복 선생은 아마도 삶과 주변자리에서 유리되어 단지 더 권위있는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는 일에 몰두하고 전문성에 함몰된 사회학을 삶과 주변자리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최고의 학자가 된 부르디외를 통해 '응답하는 사회학'이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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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 - 한국 사회과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
김경만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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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크게 1부에서 한국 사회과학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이야기하고, 2부에서는 학자로서의 자기 경험을 서술한다.

김경만 선생은 사회학자로서 한국의 로컬 지식장이 아닌, 글로벌 지식장에 참여하는 학자이다. 즉 그의 학문공간은 한국의 로컬 지식장이 아닌, 글로벌 지식장이고 그가 경쟁하는 학자들은 윗세대에서는 위르겐 하버마스, 피에르 부르디외 같은 학자들이고 현 세대에서는 로익 바캉, 제프리 알렉산더와 같은 학자들이다.

김경만은 책에서 한국사회학에 원로인 김경동, 한완상, 강신표 등을 비판한다. 또 중견학자라고 할 수 있는 조한혜정, 강정인 등의 학자들도 비판한다. 나는 이 비판에 동의한다. (비판에 대한 세부내용을 그리 중요한 것 같지 않고, 다만 그중에 한국적 사회(과)학이라고 이야기되었던 유교전통과 사회과학의 콜라보레이션이라든지 탈식민담론등, 민중사회학 같은 전통들에 대한 입장은 아직 보류하고 싶다.) 김경만은 이런 논지를 이어나가면서 결국 '한국적 사회학' 내지는 탈식민담론에 대해 일축한다. 위르겐 하버마스와 피에르 부르디외의 사회이론은 사회이론일 뿐이지, 독일의 사회이론이라든가, 프랑스의 사회이론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김경만은 한국적 사회학과 로컬 지식장이 아닌 글로벌 지식장에 나가 상징자본을 가지고 싸우자고 주장한다. (김경만의 주장을 이해하려면 피에르 부르디외의 장 이론에 대한 선이해가 있는 것이 좋다고 본다.) 한국적 사회학이 아닌 글로벌 지식장에서 학문적 경쟁을 통해 피에르 부르디외, 위르겐 하버마스와 같은 상징자본을 축적한 학자가 되고 한국적 사회학이 아닌 글로벌 사회학을 추구함으로써 한국 사회학의 세계화가 가능하다는 판단이다.

김경만 선생의 이러한 작업들은 꽤 유의미한 결과물을 내어놓고 있다. 김경만 선생은 '담론과 해방'이라는 저서를 통해 피에르 부르디외, 위르겐 하버마스 등의 비판이론을 정교하게 읽어내고 이 이론가들의 이론을 정교하게 독해해냄으로써 이들을 치밀하게 비판해내며 자신의 이론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 책은 현재 미국의 몇몇 주요대학의 교재로 쓰이고 있다고도 한다. 또 김경만의 주장에 관심을 갖게된 신기능주의이론으로 저명한 사회학자 제프리 알렉산더와도 작년 새로운 작업을 했다고 알고 있다.

cf. 담론과 해방은 아직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다. 김경만 선생은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에서 피에르 부르디외의 수제자인 로익 바캉과의 언쟁을 싣고 그 언쟁을 모더니스트와 포스트모더니스트의 논쟁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김경만 선생은 사회변동에 대해 포스트모더니즘의 맥락을 가진 것 같다. 리처드 로티를 강조하는 측면도 그렇고. (이 부분은 아직 확실치 않고 조심스럽다.)

김경만이 한국 사회학에 내어놓은 해법은 사회학의 한국화, 한국적 사회학이 아닌 글로벌 지식장에서의 사회학이고 이를 통해 한국 사회학이 세계사회학의 장에서 인정을 받고 그를 통해 한국 사회학의 식민성을 극복하자는 처방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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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 재보선이 치러졌다. 이에 관한 기사를 찾아보았다. 기사의 대강은 이렇다. 이 재보선은 4곳에서 시행된다. 특히 이목을 끄는 선거구는 광주 서구을 지역과 서울 관악을 지역인데 이곳에서는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이 소속이 아닌 야권 후보가 각각 선거구에 나왔다. 그래서 기자는 정치란 무엇인가의 저자인 모리스 뒤베르제의 전략적 투표(Strategic Voting) 개념으로 선거 판도를 예측하기 어렵다는 기사를 썼다.(호남의 전략적 선택 D-1, 그 결과는 과연? - 오마이뉴스) 다시 말해 유권자들은 개인의 후보 선호도가 아닌 선거 결과에 따른 고도의 정치 판단으로 투료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야당 성향의 후보가 양분된 정치 토양에서 유권자의 선택에 대한 물음을 한 것이다. 이와는 부가적으로 우리나라는 선거구 개편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이에 대해서도 일명 '뒤베르제 법칙'으로 선거구가 정당지형에 미치는 영향을 말하고 있다. 뒤베르제 법칙이란 단순다수대표제에서는 양당제 구도가 이루어질 확률이 높고 비례대표제는 다당제 정당 구조가 이루어질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이렇든 지금 우리사회에 여러 밀접한 영향을 주고 있는 정치학자 모리스 뒤베르제의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게 된 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었다.

모리스 뒤베르제의 정치란 무엇인가(배영동 역, 나남출판)란 책을 최대한 줄여본다면 "정치란 투쟁과 통합을 내포하는 양면성을 가진다."로 줄여볼 수 있지 않을까? 뒤베르제는 정치를 야누스의 두 얼굴이라고 명명한다. 야누스란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문(門)의 수호신이다. 두 얼굴을 지난 신으로서 역설적이게도 야누스는 전쟁과 평화를 상징한다. 뒤베르제는 정치를 이런 야누스의 양명성과 함께 유추하려고 하는데 전쟁과 평화는 투쟁과 통합에 대응한다. 기존 사회적 상태나 질서에 대한 모든 유․무형의 도전으로 대변되는 일종의 투쟁들은 진보된 사회적 상태나 질서를 목표로 한다. 안정을 위한 불안정인 것이다. 이런 정치적 모순성에 정치(政治)의 본질이 있다고 뒤베르제는 말하고 있다.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뒤베르제는 크게 정치에 관한 서론과 투쟁의 요인과 형태, 투쟁에서 통합으로의 변화, 결론을 다루고 있다. 투쟁의 기초적인 요인을 뒤베르제는 권력의 특권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책에서 그는 투쟁의 요인을 생물적, 심리적, 인구적, 지리적인 요인 등의 비교적으로 가치함축성이 낮은 요인부터 사회경제적, 문화적 요인까지 비교적 가치함축의 정도가 높은 요인까지 다루며 설명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인종주의 이론이 나치즘의 학살을 이끌었다는 점이다. 나치즘의 독일은 우생학적 관점으로 유대인을 살해하고 제국주의로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는 정치적 변동을 가져왔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과학적으로 밝혀진바 인종의 차이는 색소나 신장 등의 생물학적인 것 말고는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진리가 아닌 사회적 통념이 한 사회를 얼마나 잘못 이끌 수 있는가에 대해 알 수 있는 항목이었다. 또한 생물적 요인에서 사회․문화적 요인까지 투쟁의 요인은 확대되지만 그 기저(基底)에는 권력에 수반되는 특권이 깔려있었다. 다음으로 투쟁의 형태에서는 투쟁의 구조는 바로 사회의 문화라고 이야기 한다. 보통 이 부분에서는 정치 체제 즉 구조적 측면에서의 투쟁의 형태를 살핀다. 특히 저자가 정당론(政黨論)에 대가인 만큼 정당 체제에 관한 내용을 면밀히 주시했다. 특별히 실제 유럽정치를 예시로 투쟁 형태를 풀어나가는 서술을 흥미로웠다. 뒤베르제는 투쟁 구조를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 정치사회학자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데올로기나 가치체계에 대한 논의도 빼놓지 않는다. 이것은 정치학을 단순히 방법론이나 데이터에 의존하는 과학적 정치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우연의 과학이라 지칭했고 책에서 뒤베르제가 지적한 바와 같이 직관과 비합리적 정치에 대한 정치에 대한 관심으로 다루는 것에 의미가 있다. 끝으로 투쟁의 한계를 언급하면서 민주체제와 독재체제의 투쟁을 말하는데 민주정에서의 투쟁은 결국 우연적 상황을 감안해도 주기성의 한계를 내포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통합에 대한 장에서는 통합의 이론과 기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투쟁에서 통합으로라는 소제목에서도 뒤베르제가 먼저 언급하는 것은 투쟁에서 통합으로의 이행을 필연적이 것이며 양자는 불가분(不可分)의 관계에 놓인 것이라고 천명(闡明)한다. 책에서 언급하는 통합에 관한 내용은 이론적인 부분에서 투쟁에서의 폭력적 방법에 대한 한계, 타협의 실현, 연대관계의 발전 등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연대관계의 발전에서는 인류가 거시적으로 보면 근본적으로는 조화의 공동체를 추구하며, 애타주의나 박애주의로 결속될 성향과 가능성을 희박하지만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통합의 기술에서는 규칙과 절차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규칙과 절차는 제도적 측면에서만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호체계 즉 문화코드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하고 있다. 이 외에도 사회의 조직화나 시민의 교육, 사회의 강제력으로도 통합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그 다음 통합과 의사통합의 장에서는 통합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어서는 통합과 발전수준에 대해 논하고 통합이 가지고 있는 성장이라는 부분에 대해 말하고 또한 완전통합은 신화라고 지적하며 통합에서의 투쟁의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황금시대의 신화라는 목차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 기술의 발전이 사회의 통합을 증가시키는 것은 맞지만 사회의 전적인 통합을, 마르크스주의의 이상사회인 공산국가와 같은, 불러온다는 것은 신화(Myth)에 이르지 않음을 주장한다. 투쟁은 인간사에 제거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끝으로 뒤베르제는 비교정치적 방법론으로 사회주의의 동구와 자본주의의 서구가 기술적으로 동질성을 갖지만 결국 동일한 체제의 통합을 이루기는 힘들다는 주장을 하며 책을 마친다.

뒤베르제의 정치란 무엇인가를 관통하는 하나의 개념은 투쟁(鬪爭)과 통합(統合)이다. 한국의 역사도 끊임없는 투쟁과 통합의 역사였다. 이것은 한국뿐만 아니라 인류사 전반에 걸친 일관적 현상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전에도 그러했듯이 앞으로의 인류사 또한 수많은 투쟁과 통합을 반복할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바이니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이를 유념하고 대비하며 살아야하는 사명을 안고 있다. 투쟁은 불가피하며 필연(必然)적 속성을 가진다. 또한 그 투쟁은 통합을 수반한다는 데에 맹점이 있다. 투쟁과 통합은 모순적이지만 수반된다. 투쟁과 통합의 긴장 속에 정치의 본질이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사회는 불안정성을 내포하고 이에 따라 사회는 언제나 통합에 대한 담론이 형성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주체자적 입장에서 또 좁게는 사회과학도인 나로서는 투쟁적 속성의 비판과 통합적 속성의 대안을 함께 생각하고 숙고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의미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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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 정의를 꿈꾸다 주니어 클래식 5
장영란 지음 / 사계절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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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정치사상에 들어가기 앞서 그의 철학에 대해 알아보겠다. 우선 플라톤의 인간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플라톤에 철학에 있어 덕은 탁월성이다. 플라톤은 인간의 존재가 다른 존재에 비해 탁월한 점이 ‘이성’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이런 플라톤의 관점은 대화편 국가 7권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인간의 육체는 어두운 동굴에 사슬에 묶인 상태에 비유된다.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은 동굴 밖 세상이 아닌 동굴 안에 비춰진 그림자의 세계에 살고 있다. 동굴 밖에는 생존하는 존재들이 있다. 그러나 사슬에 묶인 육체는 그 존재들이 동굴의 벽에 투영하는 그림자들 밖에 볼 수 없으며 여기서 얻어진 지식은 이러한 이유로 참된 사유로 볼 수 없다. 보통의 사람들은 이 동굴에서 탈출할 수 없다. 그러다가 어쩌다가 사람들이 일부 그 사슬을 끊고 자유롭게 되어서 동굴 밖의 세상으로 나가게 되면 태양이 비추는 진정한 세계로 진출할 수 있게 된다. 동굴 밖으로 나온 것은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고 밝은 지식의 세계로 나아간 것이다. 태양이 비추는 동굴 밖의 세계는 진리의 세계, 다시 말해 이데아의 세계이다. 그 이데아 중에서는 가장 높은 이데아는 태양에 비유되는 선의 이데아이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해 자신의 이성주의, 이상주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전개시켜나간다고 볼 수 있다. 플라톤에게 있어 영혼은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플라톤은 영혼이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영혼불멸설과 상기설을 주장한다. 인간은 전생에 영혼으로 존재하며 그 영혼은 참된 관념들을 소유한다. 그러나 영혼이 육체와 결합하는 순간 참된 지식은 망각된다. 그래서 현실세계에서의 인간은 살아가면서 사물들을 관찰하고 지식을 쌓으며 망각했던 참된 지식을 상기시킨다.

플라톤은 영혼 3분설을 주장한다. 이것은 즉 각 개인의 영혼은 이성, 기개, 욕망으로 이루어져있다는 이야기이다. 플라톤에게 있어 이성은 헤아리는 능력이다. 이것은 이성적 분별이나 사유를 가능하게 하고 합리적인 덕목이다. 기개는 갈등하는 능력이고 즉각적으로 반응되며 합리성과 비합리성을 모두 내포한다. 또한 욕망은 헤아릴 줄 모르는 것이고 욕구는 충족시키는 것이며 비합리적인 적이다. 플라톤은 지적 수련을 통해 이성, 기개, 욕망을 각각 지혜, 용기, 절제의 덕으로 발현할 것을 주장한다. 이 주장은 국가철학에 적용된다.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또는 장인)의 세 신분이 있다. 플라톤은 이 세 신분이 각자 자기 역할을 하고 다른 신분을 침해하지 않을 때 국가는 가장 국가다운 면모를 갖추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기능주의(functionalism) 관점의 효시(嚆矢)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플라톤에 있어서 국가의 정의는 국가의 구성원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자기의 기능을 다하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가 정의롭기 위해서는 개인들이 자기 본분을 다하는 정의의 덕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개인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자기 본분을 다하면 국가는 저절로 자기의 기능을 다하는 국가, 정의로운 국가가 됨을 의미한다.

플라톤은 국가를 통해서 세상의 정치체제를 5개로 구분한다. 최선자정체(aristokratia), 명예지상정체(timokratia), 과두정체(oligarchia), 민주정체(dēmokratia), 참주정제(tyrannis)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정치체제 속에서도 최선자정제(aristocracy)를 최고의 정치체제로 주장한다. 여기에서는 최선자란 귀족을 의미하고 플라톤에게 최선자는 철인왕(philosopher king)이다. 플라톤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나라를 구성하는 계층을 세 개로 분화했다. 통치자 계층은 머리의, 수호자 계층은 가슴의, 생산자 계층은 배의 덕을 잘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3주덕과 연관성이 있고 이 3개의 덕이 조화를 이룰 때 정의라는 덕목이 실현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통치자는 개인의 미덕으로 지혜와 용기, 절제의 미덕을 고루 갖춘 정의의 덕을 지녀야 한다. 국가이성으로는 지혜의 덕을 요구한다. 또한 수호자 계층은 국가의 보호와 질서를 필요로 한다. 용기의 덕을 지녀야한다. 또한 생산자(또한 장인) 계층은 절제의 미덕을 필요로 한다. 이 계층은 보통 대중에 해당되는데 이들에게는 물질적 요구를 충족시켜 쾌락을 누리는 것이 최상의 가치가 된다.

플라톤은 또한 철인(哲人) 정치를 주장했다. 여기서의 철인은 단순이 지혜로운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현상을 초월해 이데아를 인지할 수 있는 자’를 뜻한다. 플라톤은 많은 저작들에서 주지주의적 사상을 표현한다고 한다. 이렇듯 통치자 또한 ‘정치’에 대해 아는 자만이 정치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초기 플라톤의 저작에서 철인왕은 보통 일방향적인 통치자이다. 이런 면에서 엘리트주의를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후기 저작에서는 정치가에서 법률로 넘어가며 피통치자에 대한 소통도 전제하고 있다. 플라톤이 철인정치에 대해 논한 것들을 상당히 진보적인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모든 사람의 평등한 교육권이나 공정한 인재선발 등 당시 시대적 상황과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플라톤은 또한 국가에서 공직자 윤리에 대한 부분을 지적한다. 플라톤에 있어 통치계급은 사유재산을 소유할 수 없다. 그리고 자식에 대한 사적 교육도 금지될 뿐 아니라 공동양육은 주장하기도 하고 아내를 공유하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지배계층을 일종의 공산주의적(communism) 제도로 운영해 사적이익이 공적인 영역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다. 이것은 당시 시대적 정황으로 보았을 때 매우 급진적인 사상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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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바이어던 - 국가라는 이름의 괴물 e시대의 절대사상 2
김용환 지음 / 살림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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홉스는 근대를 연 철학자라는 평가와 같이 영국의 경험 철학자인 프란시스 베이컨처럼 과학과 철학의 실질적 유용성을 강조한다. 홉스는 사물들의 가장 기본적인 근거가 물질적이며 기계적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하부구조인 물적인 토대가 상부구조인 정신을 생성한다는 유물론(materialism)을 주장하는 것이다. 홉스는 인간의 사유의 기본요소가 감각이라고 말한다. 사유의 근거가 감각이라는 경험론적 관점을 대변한다. 또한 홉스는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규정한다. 홉스에게 있어 인간은 잔인하고 이기적인 존재이다.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한 것이다. 이런 성악설은 홉스의 자연 상태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된다. 일단 홉스는 인간은 잔인하고 이기적이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보존을 위해 노력하므로 서로 투쟁 상태에 이르게 된다.

홉스는 자연권과 자연법 사상을 제시한다. 홉스가 말하는 자연권이란 자기의 보존을 위해 실력(實力)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이런 인간은 자연권을 이기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the war of all against all) 상태 되어버린다. 이것은 혼란의 상태이며 전쟁의 상태이다. 이런 상태에서 자연법이란 이성으로 이기적인 자연권적 상태를 통제하는 힘이다. 홉스에게 자연권은 자신의 이기적 욕구를 추구하는 권한이고, 자연법은 이성에 의해 복종하게 하는 힘이다.

홉스는 자신의 사상을 전개하기 위해 ‘자연 상태’를 상정한다. 자연 상태란 하나의 사고의 실험이다. 이것은 실증적인 것은 아니다. 홉스의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국가를 형성하게 된다. 이것은 서로에 대한 서로의 투쟁 상태인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이성의 명령은 크게 3가지 정도의 형태로 나타난다. 우선 이성은 불안과 공포의 상태에서 자기보존을 위해 안정과 평화를 추구하도록 한다. 또한 이성은 평화와 안정을 위해 인간의 이기적인 권리인 자연권을 일부 양도하도록 명령한다. 여기서 이성에 따라 자연권을 양도하는 것이 하나의 계약이다. 마지막으로 이성은 이렇게 합의된 계약에 대해 이행할 것을 강제한다. 자연 상태의 개인이 불안과 공포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권리들을 한 사람에게 양도하고 결합한 것이 홉스의 국가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홉스는 국가를 리바이어던이라고 불렀다.

홉스는 국가의 형태 중 가장 뛰어난 것은 군주제라고 주장한다. 특히 홉스는 절대왕정을 지지한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절대 권력자가 불안과 공포의 자연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일관되고 강력한 의사를 관철해야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군주의 통치권은 절대적이다. 군주는 시민의 저항도 용납할 수 없다. 군주의 권력은 사회 구성원의 합의의 산물이고 그 군주의 권한에 저항하는 것은 곧 자신의 이성에 대항하는 것이고 자연 상태로의 회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민의 저항권은 인정되지 않는다.

홉스에게 있어서 법은 곧 군주의 명령이다. 시민들은 그들의 자유권은 군주에게 양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은 절대 군주에 의해 발현된다. 홉스는 불공정한 법이 없다는 주장을 하며 절대왕정의 권력을 더욱 공고화하였다. 그는 불공정한 법이 없는 근거로 2가지를 제시한다. 먼저는 아까 언급한 바와 같이 법에 복종하는 것이 정의이고 이성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시민의 권리를 양도받은 군주가 법을 제정하는 것은 곧 시민들이 법은 제정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군주가 시민의 안전을 해하는 악법을 명령하는 가능성을 이야기하지만 결과적으로 시민은 저항할 수 없다. 홉스는 군주가 정의에 반하는 시행이나 명령을 내려도 결국 그것은 군주와 신과의 문제이지 군주와 시민의 문제는 아니라고 이야기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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