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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서울, 극장도시의 탄생 - 서울올림픽이 만든 88년 체제의 등장과 커튼콜
박해남 지음 / 휴머니스트 / 2025년 6월
평점 :
한국식 정상적인 삶의 한 기원, 『1988 서울, 극장도시의 탄생』
이 책, 『1988 서울, 극장도시의 탄생』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중심에 두고, 오늘날 한국 사회의 다양한 문제 연원을 추적합니다. 이 책은 서울올림픽을 군사독재 정권의 우민화 정책이나 국위선양 프로젝트로 보는 기존 시각을 벗어나 올림픽을 국가가 연출한 거대한 공연으로 재정의하며 이 공연이 ‘국민의 습속 개조’와 ‘도시의 경관 개조’라는 사회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기획이었음을 밝힙니다. 이로 인해 한국은 공연계약에 기초하게 되었고,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며 끊임없이 정상적인 삶을 연기하는 사회가 되었다고 분석합니다.
이 책의 저자 박해남 선생님은 사회학자로 현재 계명대학교 사회학과에 재직 중입니다. 연구 분야는 역사사회학, 도시사회학, 종교사회학, 스포츠사회학 등이며, 이 책은 박해남 선생님의 박사 논문을 단행본으로 만든 작업으로 박사 논문을 개작한 만큼 밀도 있는 내용과 풍부한 자료를 특징으로 합니다.
주요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다른 내용을 다루기 전에 알아야 할 것은 “군인”이라고 표현되는 집단입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군인은 한국을 주조한 가장 주요한 세력이었죠. 발전국가에서 군인 집단은 단순히 국가를 기획하는 것을 넘어 사람을 훈계하고 계몽하고 도덕을 함양하는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 배태된 지배 엘리트가 중심이 되어 서울올림픽이라는 메가이벤트는 일종의 ‘드라마투르기(dramaturgy)’, 즉 공연을 기획하고, 무대를 만들고, 배우를 훈련시키고, 전체 극을 연출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진행됩니다.
군인에 의해 올림픽은 하나의 거대한 국가적 공연이 됩니다. 박해남 선생님은 이를 통해 국가와 시민 사이에 암묵적인 ‘공연계약’이 체결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는 근대적 사회계약을 대체하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합의로 이 계약에서 시민은 권리를 가진 주체가 아닌 ‘건전하고 근면한 배우’로서의 역할을 부여받으며, 이들의 주된 의무는 국가가 제시한 각본에 따라 자신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는 것이 됩니다.
또한,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도시로서의 서울 자체가 전 세계라는 관객을 향한 거대한 무대로 재편됩니다. 극장도시가 된 것이죠. 올림픽 경기장 건설과 같은 물리적 변화를 넘어 도시의 모든 경관과 질서 자체가 무대 장치로 기능하도록 세심하게 연출되게 된 것입니다. 도시라는 공간 자체가 그 안을 사는 시민의 터전이라기보다는 외부의 시선을 염두에 두고 전시되기 위한 공간으로 계획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탄생한 것이 바로 이 책의 핵심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88년 체제’이고 제가 이 책에서 가장 주목하는 부분입니다. 88년 체제는 과시와 연출이 일상화되고 외국인 혹은 세계라는 가상의 타자를 상정해 그들의 시선을 내면화하여 스스로 끊임없이 검열하고 연기하는 사회 질서를 말합니다. 7년 동안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상정한 ‘외국인의 시선’은 사라지지 않고 사회 구성원 내부에 자리 잡으며 새로운 감시자가 됩니다. 이 내면화된 시선은 개인의 삶을 외부의 평가와 인정에 종속시키는 역할로 작동하죠. 무질서, 선진적이지 못한 것, 보여주거나 자랑할 수 없는 것으로 무대 밖으로 쫓겨난 삶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하게 됩니다.
그렇게 “한국사회는 소수만이 차지할 수 있는 ‘괜찮은 일자리’를 ‘보통’ 내지 ‘평범한’ 일자리로 가정하고, 산술평균에 따랐을 때 넉넉히 평균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 중 대다수는 자신의 삶을 평균 이하로 인식”(324p.)하게 되는 겁니다.
주요 내용 이외에도 책에서는 군인이 사회의 질서 확립을 목적으로 진행한 다양한 캠페인과의 연속성에서 서울올림픽을 위치시키고, 이러한 군인의 연출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또한 서울올림픽 바깥에서 진행되었던 빈민올림픽, 남북공동올림픽과 같은 또 다른 연극, 엑스포와 같은 다른 메가이벤트와의 관계 등 다양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책 자체가 흥미로운 내용으로 가득해서 독서 자체를 재밌게 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이 책은 한국의 문제로 꾸준히 지목되는 정상적인(사실상 너무 높은 기준의) 삶의 기원을 추적하고 있기 때문에 무척 적실하다고 생각하고, 또 이전까지 민주화, 정치체제의 변화를 중심으로 개념화되었던 87년 체제와 함께 사회의 변곡점을 조망할 수 있는 렌즈를 제공하고 있기에 큰 기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관심 있는 독자께 진심으로 추천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