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스원 3겹 데코 화장지 30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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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격에 그 품질입니다 대박은 없는듯 잘 판단하고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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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사도가 되라
디트리히 본회퍼 / 보이스사 / 199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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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라는 말은 초대교회에서 있었던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을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위대한 전도자, 주를 위해 살았던 자들이다. 하지만 오늘날 사도라는 말은 쓰이지 않는다. 목사, 장로, 집사, 권사, 선교사, 전도사, 강도사, 평신도 라는 것이 내가 아는 신앙의 직책이다. 하지만 같은 집사라 해도 스데판 집사하고 요즘은 수많은 집사하고 또 같은 개념의 집사일 것 같진 않다. 지금의 집사는 교회 조금만 다니면 될 수 있지만 그 때는 아니었다. 사도라는 말도 당시 소수의 인물만 사도라 생각했지 오늘날, 평화의 시대에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물론 제한 된 것도 많지만)에 사도란 존재할 것 같지 않다.

 그런데 디트리히 본회퍼는 우리보고 사도가 되라고 한다. 그것도 진정한 사도가 되라고 한다. 히틀러의 대항하다 순교한 그처럼, 초대교회 신앙을 지키다 순교한 사도들처럼 우리에게 고난을 권하고 있다. 이런 설교 교회에서 한다면 정말 듣기 싫은 설교가 될 것이다. 가서 주를 위해 죽으라고 하면 죽겠다고 하겠지만, 현실적으로는 대부분의 성도들에게는 거부감이 다가올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보통때 좋은 설교, 윤리적이고, 교훈적인 설교를 주로 듣고, 값싼 은혜를 구한 것 이기때문이다.

 나도 디트리히 본회퍼처럼 믿음의 사도가 되고싶다. 하지만 현실에서 어떻게 해야 믿음의 사도가 되는 것인지는 이 책에서 나오지는 않는다. 다만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의 음성에 기울인다면 자신의 부르심이 들릴것이라고 하였다. 깊은 체험없이 겉으로만 본다면 과거 군사정권이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이었던가 생각도 해보고, 아니면 지금 곳곳에 만연한 사회부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인지 생각도 해본다. 하지만 성경의 진리는 하나이지만 각 상황마다 말씀하는 것은 다를 수가 있다.

 우리사회 기독교가 신앙으로 굳게 서고, 자신의 부르심대로 사도된 모습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죽음을 각오하고 살았던 디트리히 본회퍼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었다. 과연 이 한국에 목숨걸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본다. 물론 관념적인 것에서는 그럴 것이지만 현실에서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본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장이 떠오르는 디트리히 본회퍼다.

p.121
그러나 그들은 고통을 찾기 위해 자신들의 길을 벗어나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때 자신들 앞에 다가오는 고통만을 참고 견딜 뿐이다. 그것은 오직 그분을 위해 참는 것이다.

p.45
 수도원 운동의 치명적인 실수는 그 엄격함에 있다기보다도-비록 여기서도 예수님의 뜻이 담고 있는 정확한 내용에 대한 많은 오해가 있긴 했어도- 그 자체를 선택된 소수의 개인적 성취로 한정함에 있었다. 결국 그들은 수도원 생활을 선택된 소수의 무리에게만 주장함으로서 진정한 기독교와의 거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p.99
 예수님께서는 모든 크리스찬에게는 그 자신만의 십자가가, 하나님으로부터 정해지고 운명지어진 십자가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각자는 자기가 할당받은 고통과 거부의 몫을 견뎌내야 한다. 그러나 각자는 다른 몫을 갖고 있다. 하나님께서 최고 높은 수준의 고통을 당할 가치가 있다고 여기시는 이들에게 그분은 순교의 은총을 주신다. 반면 어떤 이들에게는 그들이 견딜 수 있는 그 이상으로 시험받는 것을 허락치 않으신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경우든 똑같은 십자가이다.

p.193
 삶에 절제의 요소가 없고, 육신의 욕망에 고삐를 풀어놓는다면, 우리는 자신이 그리스도에의 봉사를 위해 훈련되기에는 힘든 사람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육신이 만족 상태에 있을 때 기쁨에 차 기도하거나 자기 포기를 많이 요구하는 봉사의 삶에 자신을 바치기는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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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 - 거룩한 삶의 은밀한 대적
김남준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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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에 일어나는데 벨소리 2번이나 들어도 일어났다 다시 자고, 어머니 몇번이나 오셔서 겨우 일어났다. 조금 늦은 것 같아 아침을 거르고 갈려다 겨우 끼니만 때우고 지하철을 탔다. 피곤에 쩌든 많은 사람들이 위로해준다. 다 같은 모습으로 앉아있는 사람은 그나마 잠으로 피로를 풀고 서 있는 사람은 겨우 남은 체력 언제 자리가 빌지 온 힘을 다해 준비한다. 왜 사람은 이렇게 피곤하면서 꾸벅꾸벅 겨우겨우 대충대충 사는듯 마는듯 살아야 할까? 꽤 심각하게 생각하면 살았다. 조금 벌어도 잠 많이 자고 아침도 여유롭게 먹으면서 지하철도 사람없을때 타고 신문도 읽고(지하철 무료일간지 말고) 살면 안될까? 그러나 대답은 뭔가 이유가 있으니 이 사람들이 이렇게 살겠지라는 것이었다.

 게으름이다. 어떻게 보면 게으름을 구하는 것이다. 인생의 가장 본능적인 수면욕을 통한 행복을 다른 것들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보다 더 높이 구하는 것이다. 조금 더 잔다는 것에서 인생의 행복을 느낀 내 자신이 불쌍해 보였다. 여기서 그 동안 읽고 싶었는데 왠지 통속적일 것 같아서 시대영합적인 기독교서적일 것 같아서 망설였던, '게으름'을 읽었다. 이 책에서는 단순하다. 그래서 더욱 좋은지 모르겠다. 게으름은 죄성이고, 그 게으름 영적이고 육적인 게으름을 없애기 위해서 우리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단순명료하고 감동적인 글이란 말인가. 이 책에서는 글자글자를 보지 않고 내 자신의 나태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촉매제로써 이미지를 봤다.

 남보다 게으르다는 것은 세상 경쟁에서 지고, 약육강식의 시대에 먹히기 쉬운 좋은 먹이가 되고, 신자유주의 시대에 퇴출 1순위의 사람이 되기 싶다. 게으름은 곧장 실력과 반비례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저자가 게으름에서 벗어나라는 의미는 세상에서 실력을 쌓아 잘먹고 잘살라는 의미만은 아니다. 기독교인이라는 독자들에게 왜 게으름이 죄가 되고, 게으름이 영적생활에 왜 나쁜 것인지, 쉬운 예화들과 더불어 설명해준다. 그리 대단한 책은 아니다. 없는 이론을 소개하는 것도 아니고 탁월한 기독교의 진리를 설명해주는 책도 아니다. 기적을 소개하는 책은 더욱더 아니다. 하지만 오직 이 책을 통해서 내가 게으름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나에게는 그것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20세기가 이념논쟁으로 싸운 캐피탈리즘과 맑시즘의 시대라면, 21세기는 게으르티즘의 시대같다. 나뿐만 아니라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이 이념을 가지고 살아간다. 러셀같은 사람이 나와서 게으름을 찬양한다고 하지만 게으름 그를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피에르 쌍소가 나와서 느리게 산다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말하지만, 게으름은 삶의 여유가 아닌 오히려 속박되고 쫒겨사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이 근면성실을 강요한다고 하지만 무엇보다 기독인이라면 하나님께서 주신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아야 하고 특히 영적으로 열심히 살아야함은 당연한 것 같다. 근면성실의 목적이 무엇에 있느냐에 따라 그 평가는 달라질 것이다.

 피곤하기도 하고, 잠처럼 평안한 것에서 나가기도 싫지만, 게으름에서 벗어나고 싶다. 사람들마다 게으름에 대한 개념도 다르고 의견도 다르다. 그 중에 나는 게으름은 나쁜 것라고 명확히 말하며 삶에서 내 자신의 말을 실천해 가면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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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국민은 없다 - 촘스키의 신자유주의 비판
노암 촘스키 지음, 강주헌 옮김 / 모색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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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세계적인 지식인을 만났다. 그의 이름은 노암 촘스키다. 그는 먼저 세계적인 석학이었다. 언어학자로써 큰 공헌을 했다고 하는데 언어전공자가 아닌 나로서는 큰 감명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언어학자로 유명한 것이 아니라 심리학, 정치학, 철학, 인지과학 등에 영향을 끼친 석학이다. 그의 지식은 한 분야에만 편중된 것이 아닌 통합적인 지식이다. 그리고 그가 지식인의 사명을 다하는 것은 그와 상관없는 세상사에 대한 관심이다. 그리고 올바른 목소리를 내려고 한다. 지식인이라는 사람이 침묵할 때 그는, 동티모르의 인권유린과 베트남전쟁 반대, 니카라과 내전 개입 반대, 그리고 지금 이라크 전 반대에 누구의 목소리보다 앞장서고 있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의 지식인이라고 하는 교수, 박사님들은 자신의 분야에만 편향된 지식을 가지고 있고, 오직 다른 분야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정치적인 분야에서 출세에만 관심이 있는 듯하다. 고위관료, 국회의원, 정당인 등에 교수출신, 박사출신 등이 많지만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들의 지식인의 소수의 기득권을 위한 어용이론으로 쓰일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인지 우리나라 학계도 상당히 썩어있고, 그런 물이 고여 있다. 이런 상황에서 촘스키 같은 사람을 알게 된 것은 지적인 자극이 되었다.

촘스키의 글을 읽으면서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이고 이 세계가 어떠한 패턴에서 흘러가는지 조금 알게 되었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에 반대하는 노암 촘스키의 글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신자유주의로 인한 해고와 비정규직 문제, 그리고 세계화를 중심으로 한 다국적 기업에게 고통받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미국은 우리의 영원한 우방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때론 그의 글 중에 일제 식민지하의 한국이 일본과 같이 성장을 하기도 했다고 주장하면서 나의 마음을 아쉽게 하지만, 그 또한 인간이라 그가 가진 지식에서 그나마 목소리가 큰 일본경제사학자들의 의견을 무분별하게 수용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 치하때 한국의 경제성장이 이뤄졌는지 지금도 많은 논쟁거리라고 한다. 하지만 태평양전쟁등으로 인해, 식민치하로 인해 받은 우리 민족의 피해는 물적, 인적, 정신적으로 수치로 말하기 힘들 정도로 크다. 그의 글이 미국을 중심으로한 쿠바, 멕시코 등지로 한정된 것도 그가 가진 지식이 한정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물어본다면 '이익'이라는 것으로 나아간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우리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비단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나라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왜 미국을 영원한 우리의 우방이라고 하는 것일까? 과거 미국이 한국 근대화에 이바지 하고, 해방도 시켜주고, 먹을 것도 주고, 6.25로 부터 지켜주고, 민주주의에 도움을 준 고마운 나라라서 그런 것일까? 어느정도는 맞고 또 어느정도는 틀리다. 그건 그들이 선한 마음을 가지고 한 것 보다는 자국의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미국인의 냉철한 미국비판도 도리어 보면 엄연한 미국사랑같은 모습같다. 그가 원하는 사회는 이런 사회가 아닌데, 그가 원하는 국가는 지금 미국같은 나라가 아닌데 하는 느낌이다. 미국도 정말 해야할 일이 많은 것 같다. 특히 그가 말한 파수꾼들의 역할이 클 것 같다. 파수꾼처럼 세계화에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네트워크 게릴라'즉 우리의 네티즌들이 힘을 써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이미 그 힘은 우리도 알고 있다. 앞으로는 왠지 한국이 미국보다 더 민주적인, 사람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 같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만, 앞으로는 더 많아질 것 같다.

 끝으로 이 책의 편집 상태가 상당히 불만이었다. 이렇게 좋은 지식인의 글을 동화책처럼 편집해놨다. 억지로 분량채울려고 글자 크기 키우고, 행간늘리는 이러한 행태 비판 받아야한다. 좋은 책을 망쳐놓은 듯하다. 이런 책 사기 정말 싫어진다. 차라리 노암 촘스키의 블로그나 방문해서 그의 따끈 따끈한 글이나 읽어야겠다.
http://blog.zmag.org/t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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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인가? 정부인가?
김승욱 외 지음 / 부키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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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경제학에서 가장 주된 논점인 주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아니 이것이 거의 현대 경제학의 대부분일 수도 있다. 주류경제학에서 케인즈주의 인가 신고전학파인가? 시장인가 정부인가? 진보인가 보수인가? 평등인가 자유인가? 이 책에서 논하는 것은 이렇게 다양하게 나눠질 수 있다. 이것을 두 가지 대립이라고 가정했다. 물론 사회를 2분법적으로 나눈다는 것 자체는 불가능하다. 수많은 변수들과 수없이 많은 다른 예외사항들이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구는 경제적으로는 시장주의를 옹호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진보적인 사상을 옹호하기도 한다. 유시민처럼 말이다. 누구는 어떤 사항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어떤 사항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세상을 2분법적으로 특히 경제정책을 나눈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련지 그것 또한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지만 학문이라는 것이 다 그렇듯 조금 유사하게라도 정의해서 사용하려고 하니 문제가 많지만 경제학자들의 강한 무기 '가정'을 사용해 보자! 즉 우리 사회는 2가지로 나눌 수 있다라는 가정하에 시작해보자.

경제학원론 책중에 3인공저라고 흔히 부르는 책이있다. 방대한 양과 그리고 빠짐없이 꼼꼼한 개념정리와 서비스로 연습문제까지 들어있는 책이다. 누구는 이 책을 보고 경제학을 싫어지게 만드는 책이라고 하고, 누구는 이 책의 명확한 개념들에 반했다고 한다. 이 책이 조금 그와 비슷한 모습이 있어 보인다. 4인공저 저술이다. 그리고 책 규모에 비해 방대한 자료들과 내용들을 제시한다. 각 파트 마지막마다 도표로 간결하게 요약도 서비스로 넣어준다. 때로는 이렇게 방대한 양에 놀라기도 하지만 그 간결성과 현실정책과의 비교를 통해서 2가지 시점에서 보여준다. 신문보면 나오는 많은 경제, 사회 문제에 관한 통찰력을 늘려준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보는 신문도 어떻게 보면 편향적으로 자신의 색채에만 맞게 쓰곤 하지만 그에 반해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2시점 대해서 자세히 소개해주지만 무엇이 옳다 그르다는 판단하지 않는 아주 중립적인 책이다. 이 책을 읽다가 황희정승 일화가 떠 올랐다. 집안의 다툼에 누가 옳으냐는 말에 '개똥이도 옳고, 소똥이도 옳고, 당신도 옳고.'라는 예화다. 그 말처럼 어떻게 보냐에 따라서 모두가 옳을 수 있다는 것 같다. 이 책에서 답은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독자에게 이제 자신도 왜 그런 정책이 나오는지, 또는 당대 사회문제에 대해서 읽을 수 있는 눈을 길러 주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선택을 해야한다. 선택하지 않고 모두다 옳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선택하는 기준은 당신이 무엇을 더 가치있게 두느냐에 달려있다.

경제학이라는 학문은 명확하지가 않다. 절대로 옳은 것이 없다. 다만 가정할 뿐이다. 이 책을 보면서 많은 사실들을 더 알게 되었지만 판단을 내리지 않고 우리에게 판단의 몫을 돌린 저자들이 조금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은 누가 읽어야 할까 생각해봤다. 현실경제를 조금더 이해하기 위한 경제학도나 경제학을 교양으로 더 쌓고자 하는 사람이 좋을 듯 싶다. 경제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이 책을 읽은 다면 다소 어렵고 지루할 듯 싶다. 경제도 미술품처럼 아는 만큼 보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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