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차 12 - 완결
요시다 아키미 지음 / 시공사(만화)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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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인간의 존재의 의미는 현재진행형인가, 아니면 과거진행형인가, 그도 아니라면, 미래지향적인가?

평범한 존재. 그리고 범한 존재. 거기에는 신이 부여한 불공평성이 있다고 생각하며, 사람들은 누구나 그 ‘불공평함’에 매달려, 자신의 현실과 존재를 부정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불공평성에 대한 인식 속에서 그나마 가슴 아프게 웃음 지을 수 있는 것은 그 ‘평범’과 ‘비범’이라는 우리의 태생적 불공평 속에 진실로는 바로 ‘그’ ‘공평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 아닐까.

그 사실이란, ‘비범’함을 타고난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 ‘누리는’ 그 ‘평범’함을 죽도록 갈구한다는 사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갖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 ‘단순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그 ‘단순한’ 진리를 ‘기나긴 고통의 경험’을 하고서야 인식하게 된다. 즉 발길에 차이는 쓰레기통마냥 무시해 버리던 ‘단순한 진리’가 바로 인생의 ‘꿀’과 같은 ‘진리’임을 깨닫게 되는 순간은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정말 기나긴 시간이 지나버린 순간과도 같다. 마치 어린 시절의 공부의 중요성에 대해 부모님으로부터 들을 때는 별로 중요치 않게 여기다가도, 공부를 하지 않고, 기나긴 인생을 돌고 돌아서 그 나이가 든 어느 순간 ‘그래, 그 때 부모님의 말씀을 들었어야 했어’라는 후회를 하듯이 말이다. 80이라는 기나긴 그리고 동시에 짧은 인생을 통해서 우리가 안고 가는 것은 결국 하나의 ‘단순한’ 지혜 또는 ‘진리’라는 것. 그렇게 생각하면, 인생은 참으로 허망하디 허망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가 결국 도달하게 되는 사실 하나는, 인생은 되도록 ‘현재진행형’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삶과 죽음,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다양한 군상과 기나긴 호흡의 스토리로 이루어진 ‘요시다 아키미’의 작품. ‘야차’. 우리는 이 기나긴 작품을 통해서 결국 하나의 사실을 알게 되는 것 같다. 우리가 삶을 대할 때,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는 그 무엇도 아닌 최선의 ‘현재진행형’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그리고 이 단순한 하나의 사실을 12권의 만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나는 참으로 안도한다.

우리의 한 명의 주인공. 세이.

유전자 조작을 통해 보통 사람보다 세 배 이상의 지능 수준을 가지고 태어나게 된 ‘인간’이되 ‘보통’ 인간을 넘어서서 태어나게 된 자. 세이. 어린 시절 그는 어머니와 함께 12살까지 오키나와의 섬에서 행복한 삶을 산다. 다만, 매년 두 차례 씩 도쿄에 있는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는 것 외에는 특별함이 없던 세이.

그러나 어느 축제가 열리던 어느 날 밤, 친구와 함께 집에 돌아온 세이가 발견한 것은 무장괴한들에 둘러싸인 어머니. 그 괴한들이 노리는 것은 ‘자신’이라는 것. 그리고 겪은 것은 자신을 납치하는 과정에서 어머니가 살해된다는 것.

이 평범함의 극치를 달리던 소년에게 발생한 이 사건을 시작으로, 우리는 점차 거대한 국제사회의 음모와 추악한 현실에 발디디게 된다.

세이는 IQ 160 이상의 정자와 난자의 수정을 통해 ‘대리모’를 통해 태어난 존재. 그의 지능, 신체, 감각 등은 정상 수준을 넘어서는 인간이되 또한 그 인간 이상의 ‘존재’. 유괴 후 약 7년간 미국의 거대 제약회사 제네틱스와의 계약을 통해 그는 분자생물학 박사이자, 노벨 화학상을 수여받을 정도의 지식을 겸비한 존재로 거듭난다.

그리고 그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다. 옛 친구들과 지인들과 다시 만나게 되지만, 세이는 옛날의 평범한 연약한 세이가 아니다. 그는 강력한 지능과 체력을 겸비한 하나의 내적?외적 무기로 무장한 새로운 ‘세이’로 나타난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존재인 ‘세이’가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순수한 인간’으로 비치는 것은 다름아닌 그의 ‘인간적인 정’에 의거한 인간관계 때문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나의 존재’를 잊어버릴 정도로 그 사람을 위해 싸워준다면, 그는 이미 ‘성스러운 존재’. 그리하여 그는 마치 사람들이 인자한 그러나 완벽한 ‘신’을 섬기듯, 스스로 아름답고도 완벽한 존재로서 그려진다.

그런 그가,

일본에서 또 하나의 ‘자신’을 발견한다.

‘린’.

실험실에서 행해지던 유전자 조작에 의한 인간 프로젝트에서 하나의 수정체가 ‘신의 장난’인이 아니면 ‘신의 섭리’인지도 모르게 두개로 분열된다. 그러나 그 분열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란성 쌍둥이’ 이상의 ‘동일한 분열’이었다. 99%의 동일한 유전자 조직. 그리고 한 사람의 감정이 다른 한 사람에게 전이되는 관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으로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고, 다른 사람이 한 사람의 눈으로 한 사람의 삶을 바라보는 것.

다른 장소와 다른 시간 대에 존재하는 둘은 그러나 ‘동일한’ 감정을 갖을 수 있다는 이 설정은, 인류의 과학기술이 빚어낸 하나의 ‘실수’이되 또한 하나의 ‘영광’이었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둘의 어린 시절은 아주 상반된 삶을 보여준다.

오키나와의 섬에서 대리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햇빛 쏟아지는 바닷가에서 순수한 삶을 살았던 ‘세이’는 그 ‘비범’함에 의해 추악한 세계에 발을 디디지만, 그 내적 순수성을 지켜 나간다. 비록 자신의 존재가 특이성을 가질 지라도, 그냥 세계에 받아들여지고 녹아드려 하는 것이다.

반면,

대리모와 연인이었던 양부하에서 컸던 ‘린’은 양부의 아버지 즉 양할아버지의 성적 학대와 폭행 속에서 암울하고 분노에 휩싸인 거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그리하여, ‘린’은 자신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부정당하고, 스스로 부정함으로써, 세상에 대해 예리한 복수의 칼날을 갈았던 것이다.

세이와 린의 형제간의 만남은 린의 감추어진 음모 속에서 불안한 ‘우애’ 속에서 이루어졌으나, 그 음모는 이내 나타나고 만다.

치사율 90%의 바이러스 확산을 통해, 인간대량살상을 일으키려 하는 것이다. 바로 다름 아닌 ‘린’이.

‘세이’는 이를 저지하려 한다.

린과 세이는 형제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형제가 아니고,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형제다. 동일한 외모. 비슷한 능력. 그리고 감정의 일체적 교감. 그리고 자라온 환경이 두 사람의 기질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었다. 마치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갈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 양.

서로를 비판하고, 서로를 공격하고, 서로를 미워하되, 그러나 그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서로를 사랑한다.

애증 속에서, 가장 친밀해진 순간, 가장 서로를 느끼고, 가장 서로에 대해 ‘형제애’와 ‘피의 진함’을 느낀 순간, 그러나 한 존재가 사라지게 된다. 죽음으로써.

그리고 이 순간, 우리는 가장 절망하는 슬픔을 느끼게 된다.

단순히 ‘죽음’에 의한 슬픔이어야 하는가?

우리가 ‘죽음’에서 느끼게 되는 슬픔은 우리가 앞으로의, 미래의 ‘추억’, ‘아름다운 경험’을 쌓아가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단순히 그 사람이 살아있음에 의함이 아니라, 살아있는 동시에 함께 교감함으로써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함에 의해, 경험을 만들어 가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결국, 현실에, 현재에, 바로 지금에 우리의 경험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어떤 실천도, 그 어떤 생각도, 그 어떤 노력도, 그 무엇도 바로 지금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진실되고 진정으로.

‘세이’와 ‘린’이 호흡을 맞추고 교감을 하며 서로의 인간애를 느꼈을 때, 그들은 ‘평범한’ 형제로 돌아간다.

평범함. 그것은 평범한 자에게 내려진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 아닐지. 

‘진정’ ‘비범하게’ 태어난 자는 스스로의 ‘비범함’을 자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비범’함에 의해 군중 속에 묻혀 평범하게 살아가지 못하고, 그 ‘비범’함을 이용하려는 자들의 손에 의해 자유롭지 못하게 살아가는 것에 분노하게 된다. 그리고 그 ‘분노’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책망하게 된다.

평범함 속의 자유로움과 비범함 속의 속박 사이에 우리는 그 어떤 것을 소망하는 것일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평범함 속의 자유로움’을 바로 지금 진실되게 느끼고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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