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무, 만지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소통의 기술
야마구치 하지메 지음, 김정운 옮김 / 프로네시스(웅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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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들은 왜 이토록 큰 가슴에 집착하는 것일까? 미국식 포르노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라고 폄하하는 것은 너무 단순하다. 미국식은 큰 가슴이외에도 정말 많은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땅의 사내들은 그중에서 유독 큰 가슴만 집착한다.

사는 게 재미없기 때문이다.
삶 에서 어떠한 즐거움도 찾을 수 없는 이땅의 사내들에게 나타나는 첫번째 현상은 큰 가슴으로의 퇴행이다. 아무리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기 떄문이다.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하고 살지만 정작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아무리 둘러봐도 없다. 게다가 세상은 갈수록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변화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어 무기력해질 떄가 한두번이 아니다. 내가 정말 잘 알고있다고 생각했던 상황이 온통 뒤바뀌어 황당했던 경험이 반복되면 오히려 스스로를 의심한다.
의 사소통의 문제다. 진정한 의사소통행위에는 정서공유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서로의 정서를 공유하는 과정이 박탈된 논리적 의사소통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이러한 소통의 부재로 인한 불안으로 한국 남자들은 큰 가슴을 그러워하는 것이다. 그 큰 가슴에 머리를 깊이 처박고 울고 싶은 것이다.

소 통이 어려워질수록 극복하기 위해서 지극히 원초적인 방식으로 나타낸다. 어머니의 가슴에서 완벽했던 정서의 소통 경험에 대한 기억이 큰 가슴에 대한 열광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아기가 자라나게 되면 어머니이외의 사람들과 또 다른 정서공유의 소통 경험으로 놀이를 한다. 의사소통의 원형이 확대되는 과정이다. 결국 철없는 중년들의 가슴에 대한 열광은 소통 부재의 불안과 재미없는 삶으로부터 도피하려는 퇴행적 현상인 것이다. 키워드 : 상호주관성

마라톤 열풍. 건강을 위해 할 수 있는 스포츠가 셀수없이 많은데 왜 하필 그 재미없고 고통스러운 마라톤에 열광하는 것일까?
존 재를 확인할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과 더이상 소통할 수 없을 것같은 불안에 시달리는 이들이 할수있는 가장 쉬운 존재 확인방식은 자학이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고통을 통해 존재를 확인하려는 것이다. 사회적 관계와 소통을 통해 더이상 확인되지 않는 자신의 존재를 자신의 몬에 가해지는 고통을 통해 느끼고 싶은 것이다.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 뛰었다. 그러나 나 자신은 싸워서 이겨야 하는 대상이 절대 아니다. 나 자신과 소통하는 행위를 철학에서는 자기반성이라 한다.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듯, 자신과 마주보며 스스로 이야기하는 행위가 자기반성이다. 그러나 이따의 사내들은 자신과 마주 대하며 이야기하기 보다는 자신과 싸워 이기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내 진정한 존재가 회복되지는 않는다. 소통 행위의 부재로 야기된 불안은 소통의 회복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폭탄주...술이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세계관을 공유하면서 정서를 공유하려고 마시는 것이다. 그런데 서로 정서를 공유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두려워 빨리 취하려고 마시는 술자리가 어찌 정상적이라 할수 있을까

피부자극결핍증후군(안마방, 스포츠마사지 등등) - 근원적인 소통 부재의 불안을 치유하기 위해 나타난 자본주의적 해결책
모든 포유류는 본능적으로 피부접촉을 통한 정서적 안정을 추구하게 되어있다.
만지고 만져지는 자연스러운 스킨십을 통한 의사소통 과정이 박탈당하면서 에로티시즘의 왜곡이 나타났다. 온몸으로 느껴야 하는 상호관계성이 성기에만 집중되어 나타나는 왜곡된 남근중심주의적 포르노물의 범람이 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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