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 & 니체 :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 지식인마을 37
김선희 지음 / 김영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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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 마을 시리즈로 나온 책중 하나이다. 쇼펜하우어와 니체가 지니고 있는 고통과 치료의 사상을 체계화하여 한권의 책으로 엮었다고 한다. 흔히 염세주의 철학자와 허무주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는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사상에서 저자는 치료의 힘을 발견한다. 


쇼펜하우어의 표상과 의지에 관한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희로애락의 출현은 바로 삶에 대한 의지의 긍정 원리인 개체화 원리의 실현에 있다. 개체화의 원리에 빠져 있는 삶은 개별적인 사물과 그 자신에 대한 사물들의 관계만을 인식하는데 머문다. 이와 같은 과정 속에서 사물들은 부단히 의욕에게 새로운 동기를 불러일으키고, 이것은 인간에게 끊임없는 고뇌와 고통을 야기한다. 현대 사회에도 고통의 출처는 상품 시장 속에서 공급, 유통되는 수많은 광고 속의 표상들과 이 표상의 배후에 있는 삶에 대한 맹목적 의지이다. 이것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이념에 대한 인식을 통해 개체화의 원리를 간파하는 것인데 이는 바로 자신의 표상과 의지를 지배하고 있는 원리들의 파악이자 자기에 의한 자기의식이다. 이를 통하여 개체화의 원리가 느슨해지면서 자기와 타자에 대한 이기적인 구별 또한 사라지게 된다. 그리하여 타자의 고뇌와 자신의 고뇌의 구분이 사라지고 타자의 고뇌를 자신의 고뇌처럼 대하게 되는 동고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 동고를 통해 전체 세계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는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을 통하여 이제는 인식이 의지를 좌우하게 되며 바로 이 순간 우리는 자발적인 체념을 통해 참된 평온의 상태에 도달한다. 그러나 모든 동기를 무력화시키며 모든 의욕을 가라앉히는 예술이나 정관과 같은 보편적인 진정제 역시 가장 깊은 평화를 주는 동시에 그 평화가 가져오는 무료함과 공허에 의해 부단히 배반을 겪을 운명이다. 이때 의지의 부정에 도달한 사람들이 그 경지에 지속적으로 머무르기 위해 취하는 전략이 바로 고통, 즉 고행이다. 결국 이와 같은 고통에 의한 고통 극복이라는 도식을 우리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삶을 완성한다는 도식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고통을 겪는 것 이외에 더 안전한 고통 극복의 길은 없으며, 삶을 견디는 것 이외에 더 안전한 삶의 방법은 없다.


인간에게 최상의 것은 무엇인가라는 미다스 왕의 질문에 실레노스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답한다. 니체는 낭만주의적 염세주의를 비판하며 이 염세주의에 쇼펜하우어를 포함시킨다. 니체의 허무주의 사상의 궁극적 목적은 완전한 허무주의이다. 니체의 완전한 허무주의의 기획은 허무주의를 그 끝에 이르기까지 생각해보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다. 삶을 삶으로써 제대로 구하고자 하는 그의 완전한 허무주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가치의 창조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이 순간에 출현하는 것이 바로 극도의 허무주의와 극단의 허무주의이다. 인간은 허무주의 속에서 몰락할 수도 있고 비약할 수도 있다. 우리는 세계와 그것의 가치가 지니는 가상성 앞에 절망한 채 죽어가는 '최후의 인간'이 될 수도 있고, 세계의 가상성에 대한 통찰로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시도하는 위버멘슈가 될 수도 있다. 짜라투스트라는 묻는다. 너는 살기를 진정 원하는가? 동일한 것의 영겁 회귀에도 불구하고 너는 삶을 원하는가? 이 물음은 실존에 대한 협소한 윤리적 책임의 차원을 넘어서 자신의 운명 자체에 대한 자신의 적극적 긍정, 즉 운명애를 묻는 존재론적 물음이다. 이 극단적인 허무주의 앞에서 인간을 지켜주는 것은 바로 운명애의 용기, 즉 그것이 생이라면 내가 생으로서 그것을, 최고의 긍정의 형식으로서 그것을 다시 살 수 있을 긍정이다. 이 순간은 인간 삶의 근원적인 변화의 순간이다. 짜라투스트라는 다시 한 번 말한다. "그것이 생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이라고 말함으로써 용기는 죽음을 죽이기까지 한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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