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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모험
이진경 지음 / 푸른숲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감정조절이 가능하다면 논쟁을 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다듬는데 아주 유익할 것 같다. 이 책 또한 앞서 읽었던 <talk talk 철학토크쇼>(루시 에어 지음, 웅진지식하우스)처럼 철학을 주제로 논쟁을 하는 형식의 소설이다. 하지만, 이 책은 철학자들이 자신의 철학을 설명하고 주장하는 대목이 앞의 책보다 다소 길고 어려운데, 그것은 짧은 지면을 통해 독자들에게 철학자와 그의 사상을 모두 전달하고자 하는 저자의 욕심 때문이 아닌가 싶다. 대화체로 진행되는 철학자들의 논쟁이라 아주 어렵지는 않지만, 철학자들이 평생에 걸쳐 고민하고 완성한 사상을 단 몇 페이지에 걸쳐 설명했으므로 초보자가 이 책을 읽고 철학자와 그의 사상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무리일 듯 하다.
내용은 크게 4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각의 부는 등장인물과 사건 등이 별개인 중편소설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러므로 관심있는 철학을 다룬 부분부터 봐도 무방할 것 같다. 1부에서 다루는 주제는 근세철학이다. 지상이 아닌 염라국에서, 동시대의 인물이 아닌 장자, 데카르트, 스피노자, 사르트르 등이 꿈과 현실의 경계에 대해, '나'라는 주체에 대해 논쟁을 한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생각'을 하지 못하는 갓난 아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인간은 생각을 하는가와 관계없이 실존하는 존재가 아닌가라고 하며 사르트르의 반론이 제기된다.
2부에서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노예였던 이솝이 근대에 환생하여 베이컨, 로크, 버클리, 흄 등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들과 자신의 우화를 인용하여 대화를 하면서 그들의 오류 혹은 주장을 확인한다. 저자는 이 책을 읽어봤자 전혀 이득이 없는 독서법으로 책의 우화와 재미있는 이야기만을 골라 읽는 것이라고 머릿말에서 언급했었다. 물론 나는 골라 읽지 않았어도, 나의 머릿속에는 이야기들만이 남아 있고, 나는 그 이야기들 속에서 철학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인용된 우화들을 통해서, 인간은 경험에 의해 세상을 판단하며, 그 경험은 오류에 빠질 수 있으므로 실천이 중요하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3부는 관념론과 유물론을 다루는데, 등장인물은 칸트, 헤겔, 포이어바흐, 마르크스이다.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 생각은 뇌의 분비물이 아니야', '수탉과 부엉이의 끝없는 논쟁'이라는 소제목만 봐도 이 부분이 세계는 관념과는 별개로 존재함을 강조하고 있음을 상상할 수 있다. 세계는 관념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생각한 대로 되는 것도 아니다. 닭이 울지 않아도 새벽은 온다는 것 하며, 내가 생각하는 것은 내가 발 딛고 살아온 세계를 근거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은 유물론의 핵심이다. 수탉이 볼 수 있는 하늘의 둥근 공은 해이며 부엉이가 볼 수 있는 하늘의 공은 달이지만 그것을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이야기는 지식은 검증을 통해서 증명되며, 모든 지식과 사상들 또한 실천을 통해서만 검증된다는 점들을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4부에는 정신분석학자인 융과 프로이트, 니체가 등장하는데,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이야기는 원래의 소설을 읽어보고 싶을 정도로 흥미진진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권력의지 개념이나 영원회귀사상, 초인사상에 대한 니체의 박진감 넘치는 설명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권력의지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생존하고 발전하고자 하는 의지이며, '초인'이란 '세속을 초월한 사람'이 아니라 허무주의와 부정을 극복한 사람이라는 점, '영원회귀사상'은 반복의 뉘앙스가 아니라 생성과 발전의 의미라는 점이 확인된다. 참으로 언어의 통념적 의미에 갇혀서 잘못된 철학을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니체의 초인사상이었다. 니체에 대하여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쓴, 또는 '허무주의의 주창자' 정도로 단편적인 지식만을 가졌던 나로서는 니체에 대하여 좀더 깊이있게 이해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초인사상은 변화와 발전이라는 내 인생의 프로젝트를 뒷받침할 이론으로 채택해도 좋을 것 같다. 몇년간의 자기계발서 탐독을 끝내려 하면서도 긍정의 근육을 유지강화시켜 줄 이론에 대한 필요성이 여전하던 차에 다행이다.
어쨌든, 철학하기는 사고의 심화와 확대를 교차하여 진행시키므로써 사고를 풍부하게 해주고, 삶을 풍부하게 해 줄 듯 하다. 몇권의 철학입문서를 읽다보니 철학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줄었다. 또한 철학의 주제가 세상과 인간의 관계, 역사 속에서 인간활동의 의미, 행복한 인생, 인간의 존엄성, 과학기술의 발전과 인간성의 관계 등 참으로 다양하며 심오한 만큼, 이러한 주제들을 깊이 사고하며 행동하면 개인적으로도 더 나은 삶을 살고 또 사회적으로도 더 가치있는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긴다. 지식은 알면 알수록 알고 싶은 욕구를 불러 일으키는 듯 하다. '지킬박사와 하이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어보고 싶다.
- 인상깊은 구절 -
'이처럼 영원한 변이 속의 현재, 영원한 현재를 산다는 것은 이미 익숙해진, 혹은 익숙해지고 있는 자신의 감각을 끊임없이 갱신하고, 자신의 사유와 자신의 활동을 새로운 것으로 변이시키며 사는 것이라오. 이처럼 끊임없이 스스로의 감각, 스스로의 사유, 스스로의 삶을 갱신하고 변이시키며 사는 자, 현재에서 과거로 이어지는 선을 따라 '기존의 것'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지고 멈추어버리는 모든 것을 넘어서며 사는 자, 바로 그런 자가 '넘어서는 자'요 '초인(uebermensch, '넘어서는 자'란 뜻)'이라오.'(책 후반, 니체의 말 중에서, 페이지 까먹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