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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k talk 철학토크쇼 - 굳어버린 머리가 말랑말랑해지는 기상천외한 철학실험
루시 에어 지음, 유정화 옮김, 김영건 감수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어느 철학자가 무슨 주장을 했고, 그 주장의 근거는 무엇이고, 그것을 어떤 철학자가 어떻게 비판했는지를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이 책이 적당하지 않다. 이 책은 '철학사'도 아니고 '철학개론서'도 아니기 때문이다. 철학자와 그의 주의주장이 명쾌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은, 소설책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현상과 실재', '존재와 인식', '마음과 물질', '자아동일성의 문제', '행위와 도덕적 평가의 문제', '언어와 개념의 문제', '도덕적 보편성과 상대성의 문제', '자유론과 결정론의 문제' 등 8가지의 철학적인 기본 주제들을 등장인물들의 논쟁을 빌어 독자가 함께 생각하게끔 한다. 소설이라는 쟝르가 독자의 감정이입과 간접경험을 목적으로 한다면, 이 책의 효과도 예외는 아니다. 논쟁이 주된 내용이라 그 논쟁들을 따라가다 보면 읽는 사람도 함께 질문하고 대답하고 정리하게 되는데, 이 점은 철학적인 사고를 유도하고자 하는 이 책의 목적에 부합하는 듯 하다.
이미 죽은 철학자들의 세계인 이데아월드에서 '철학이 삶을 더 낫게 하는가'에 대한 내기가 시작되고, 이 내기의 실험 대상으로 현실 세계의 벤 워너라는 15세짜리 소년이 채택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소년이 가진 호기심이 많고, 독창적인 사고를 조금이나마 할 수 있고, 다양한 상황 속에서도 열린 태도를 가질 수 있는 자질은 철학적인 사고를 하기 위한 필요조건임을 암시한다.
독자로 하여금 현상과 실재에 대하여 좀 더 깊이 있게 사고해 볼 수 있도록 저자는 각각의 철학적 주제에 대해 두 명의 등장인물이 논쟁하게 한다. 예를 들어 저자는 어떤 등장인물 한쌍이 '우리의 감각이 믿을 만하다는 증거는 뭘까? 우리는 실재의 본질을 알 수 있을까?'라는 대화를 하게 한다. 그리고 현실세계의 소년 벤이 그 논쟁에 참여하게 하고, 벤을 이데아월드로 안내하는 라일라는 그 대화를 함께 듣고 보충설명도 하므로써 벤이 더 집요하게 사고를 확장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러한 과정은 인식론이니 경험론이니 하는 용어를 들이 대지 않아도 철학적인 사고를 하게 한다.
예를 하나 더 들면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때에야 죽음이 있다'라는 말과 '죽음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존재하니까. 죽음은 지금 존재해. 왜냐하면 그것은 내 미래의 일이고 나는 그 미래를 의식하고 있어서야'라는 대화를 통해서는 삶과 죽음, 사후 세계, 삶의 가치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나의 삶이 가치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 삶의 가치는 어떻게 해야 제 빛을 발하는 것일까. 사후 세계는 존재하는 것일까.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 하다 보면 철학도 쓸데없이 어려운 학문만은 아닌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철학이 삶과 죽음의 문제, 혹은 인생의 목표와 같은 심오하고도 거대한 사항에만 연루된 것은 아니다. 책에서 나오는 것 처럼, 철학은 누군가가 남의 지갑을 훔쳐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나 나 한사람의 희생으로 많은 사람을 구해낼 수 있을 때 나는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와 같은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또한 식인종(문화적 차이로 인한 도덕관념의 차이)이나 집단학살(상황논리에 의한 정의의 부재)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행동해야 하는가와도 철학은 상관이 있다. 나에게는 나의 삶을 통제할 자유의지가 있다 혹은 내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식의 삶 전반을 관통하는 논리 또한 철학이고 말이다. 이렇듯이 철학은 삶의 문제이고 실천의 문제이다.
책 속의 소크라테스가 증명하려고 했던 '철학이 삶을 보다 더 낫게 한다' 는 사실을 깨닫고자 한다면, 철학자 누구의 주장이 무엇이라는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뒤로 미뤄야만 한다. 그 전에 이 세계의 다양한 현상들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며, 그것들과 나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에 우선 집중해야 한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아니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더 나은 삶과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더 나은 삶 혹은 더 나은 세상이란 무엇인지 등을 생각해야 한다. 철학은 그러한 생각을 돕는 과정이고, 철학자들은 그러한 생각들을 명료하게 정리함과 아울러 사고의 틀을 확대해 나가는 사람들이다. 지금까지의 어려운 철학책들이 철학을 하는데 있어서 오히려 훼방꾼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누구나가 몰입할 수 있는 철학적인 주제들을 삶의 문제가 아닌 것인 양, 등 따숩고 배부른 자들의 지적인 허영심을 충족시키는 도구일 뿐인 양 어려운 전문용어로 치장했기 때문이다. 철학책은 독자로 하여금 철학적인 주제들을 제대로 사색하도록 이끌어 줄 때 가치가 있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 인상깊은 구절 -
"어떤 생각을 하느냐는 너 스스로 찾아나가야 할 것 같아. 난 그저 네 곁에서 몇몇 개념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줄 뿐이야. 처음 철학을 접했을 때에는 그럴듯한 주장을 들으면 번번이 마음이 흔들린단다. 그러다가 점차 자신의 의견이 다르다고 깨닫게 되는 지점에 다다르지. 그리고 의견이 다른 합당한 이유를 스스로 생각해 낼 수 있게 되면 그때는 자신이 잘해 나간다는 걸 알게 될 거야"(p.167, 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