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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짐승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9
모니카 마론 지음, 김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우리는 우리가 어떤 모습인지도 알지 못한다. 거울에 비친 우리 모습을 알고 있고 사진에서, 또는 영화에서 우리를 인식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44)
프란츠에 대한 사랑과 열정, 그것이 집착으로 변한 이후에도 지속될 수 밖에 없는 사랑을 빙자한 사랑에 대한 염원. 비록 마지막장에서 밝혀진 프란츠의 죽음에 대한 원인이 무엇이었든, 그것조차도 사실 나의 사랑에 대한 집착이었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 기이한 시대와 그 시대의 변두리
‘기이한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얼마나 많이 우려먹을지 모르겠습니다. 독일 작가들이 바라보는 ‘기이한 시대’. 그런데 앞으로 또 얼마나 더 많은 글이 쏟아질지 알 수 없습니다. 개인의 사유가 얼만큼 확장해나갈 수 있는지, 이 소설은 그 끝을 도전하는 듯 담담하게 기이한 시대 끝무렵에 벌어진 나와 프란츠의 사랑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기이한 시대-정확하게 말하면 1990년, 독일 통일이 이루어진 직후 이겠지요. 나는 프란츠와 만나게 됩니다. 기이한 시대를 서로 다른 배경에서 보내온 두 사람이 겪는 갈등은, 사실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동독시절에 베를린에서 읊던 노래를 프란츠에게 불러주는 나를 보며 프란츠가 경멸하는 눈빛을 보낸다거나, 프란츠가 고향인 울름에서 쓰던 시골스러운 서독 독일어를 쓸때 내가 생각하는 둘 간의 차이점이라거나. 이런 것은 언어에서 드러나지 않을지라도 작가가 염두하고 썼을 두 독일간의 차이점을 묘사하는 장면입니다. -우리라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남북한이 통일했다고 생각해보면, 우리는 아마 엄청난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게 될 것입니다.- 나와 프란츠는 이 ‘기이한 시대’를 다른 곳에서 보내 온 사람들입니다. ‘기이한 시대’의 직후는 종종 ‘자유’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그 자유가 자신을 속박하는 계기로 작용했다고 말하는 모순을 보이기도 합니다. 왜.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작가 자신도 동독 베를린에서 서독 베를린 사람들이 갇혀 있으면서 하늘에서 물자를 공급받는 것을 지켜보며 컸습니다. 실제로 작가는 동독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들에 몸서리 치며 서독에서 낼만한 책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기이한 시대가 끝나고 나니, 자유가 오는 듯 했을 것입니다만. 그 자유가, 모순없이 오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유로운 생활을 꿈꿔온 나도, 기이한 시대에 일상적으로 행해졌던 여행규제와 비교하면 규제가 해제된 것이 기분좋은 정상적인 일로 여겨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것을 잘못된 생활방식이라고 생각(101)하고 있습니다.
동경의 시간이었을지 모르는 기이한 시대의 최후, 동경의 장소였을지 모르며 기이한 시대에는 가볼 수 없었던 ‘플리니 무디’.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지금은 대체 몇 살인지 모를 나는 읊조립니다.
내가 플리니 무디의 정원이라고 부른 그 장소는 갑자기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다. 그곳은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목적지, 어쩌면 전 세계에서 오는 여행단을 위한 하나의 정거장이 되었던 것이다. (71)
#. 프란츠를 만들어 낸 나, 나를 만들어 낸 프란츠
프란츠는 이 소설 전반을 지지하는 인물이지만, 여기서 함정은 사실 그의 이름이 프란츠인줄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프란츠는 나와 작가에게 하나의 상징과 같은 것이죠. 집착, 열정, 사랑의 상징, 경멸의 대상. 그 모든 것이 포함된 것이 바로, 프란츠라는 인물로 구현된 것입니다. 그러고 나니 궁금해졌습니다. 프란츠는 정말 존재하기는 했던 걸까? 혹 프란츠라는 인물 자체가, 나에 의해 꾸며진 허구는 아니었을까. 예전에 일요일 아침에 하는 MBC 서프라이즈에서, 어떤 남자를 그저 ‘좋아해서’ 사귄다고 생각했고 상상임신까지 했던 여자의 이야기를 본적이 있습니다. 마치, 프란츠는 나에게 그런 존재가 아니었을까. 사랑하지 않으면 내가 미쳐버릴 것 같은, 그런 존재.
기억, 사람의 기억 말입니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이야기 하듯,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은 내가 이것이 실제로 존재했는지 모를 정도로 내 뇌 속에서 편집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쪽으로만 기억을 하고, 내 기억을 편집해서 그랬던 것처럼 생각하고. 그 생각이 나를 지배해 내 뇌는 나의 허구가 내 기억을 관장해버리도록 두고. 만일 프란츠가 그런 존재라면 말입니다. 나는 프란츠를 상징화 시켜두고, 무엇인가 거기에 내가 존재했음을 밝히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내 존재의 의미를, 프란츠를 통해 찾고 싶었던게 아닐까요? 동독을 지내고 엄청난 혼란기를 겪고 있는 작가와 내가, 사라진 동독의 물건들, 화폐들, 정치 사상들, 이 모든 것이 마치 존재했던건지 존재하지 않았던 건지도 기억해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아닐까요. 그리하여 나라는 존재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음을 기억해 내기 위해, 그 혼란기에 프란츠라는 인물을 내세워 그것을 기억해놓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자기 나이가 일흔인지 아흔인지도 잊어버린 노년기의 여자. 왜 작가는 이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걸까요. 모든 것이, 갑자기 너무 늙어버린 후에 인생을 회상하는 것 처럼 바뀌어버린 세상을 이야기 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요? 물론 모두, 제 상상력에서 나온 이야기일 뿐입니다.
#. 슬픈 짐승과 브라키오사우르스
슬픈 짐승이 눈을 반짝이며 식육식물사이에 여기저기 흩어져있고, 그들이 무섭지 않은 나는 그들 가운데 누워있는 한 마리 짐승입니다. 나는 유일무이한 브라키오 사우루스의 전공자이며, 그저 누워있는 슬픈 짐승일 뿐입니다. 집착, 욕망, 사랑, 열정, 절망, 이별. 이 모든 것을 겪은 나는 한 마리 슬픈 짐승이 되어 그들과 함께 식육식물 사이에 내 자리를 찾을 뿐입니다. 한 마리 공룡이 남긴 발자국처럼. 브라키오 사우루스는 프란츠와 나를 만나게 했고, 프란츠와 나를 이어주었으며, 프란츠의 부인이 나를 알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프란츠와 이별하고 나는 브라키오사우루스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곳으로 인사발령이 났고, 나에게 공룡의 발자국처럼 프란츠는 나를 짓이기고 떠났습니다. 내가 사랑에 울부짖는 것, 프란츠가 마지막에 보여준 울부짖음, 나의 나아갈 수 없음에 대한 울부짖음, 기이한 시대를 향한 울부짖음, 기이한 사회를 향한 울부짖음, 이념을 향한, 세상을 향한, 미래를 향한, 울부짖음. 크고 작은 짐승들이 내 집의 식육식물사이 여기저기 반짝이고 있는 것은 그런 울부짖음에 대한 해답이자, 또 다른 질문이자, 그리고 나 역시도 그 흔적을 남기고 떠날 한낱 짐승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매개체입니다.
사랑만 집착이겠습니까.
세상도 집착이며 사는 것도 집착이며 나에 대한 집착도, 집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