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맞은 집중력 - 집중력 위기의 시대,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법
요한 하리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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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stolen)' 집중력.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언급하듯 이 책은 자기계발서가 아니다. 우리는 집중력을 빼앗아가는 사회에 있으며, 이런 사회를 바꾸어 나가야 한다는 글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의 노력만을 강조하는 현대 자기계발서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지적한다. 증가하는 아동 ADHD를 약물로만 처방하는 게 아니라 그 근본 원인인 교육과 사회, 음식 문화의 문제점을 찾고 해결해야 함을 말하듯이, 근본적인 원인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고등학생 시절 7시 조기 등교라는 것을 했다. 당시에는 지방 사립고의 1,2위를 다투는 학교라 그랬는지는 몰라도(그런 학교와 다르게 나는 놀기를 너무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교육열이 상당했다. 야자 시간에 떠들다가 나오면 흔히 말하는 엎드려뻗쳐 자세를 하고 발바닥을 슬리퍼로 맞아야 했다. 심지어 담임이라는 사람은 아침 공부시간에 졸고 있는 나의 목덜미를 강하게 후려치는 사람이었다. 내가 맞는 소리에 주변 친구들까지 깰 정도였으니까.


한대 세게 맞으니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나와도 이렇게 졸고 있는데.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 잠을 자거나 아침을 못 먹은 아이들은 자판기에서 가공식품을 사 먹었다. 그렇게 해서 졸업 때는 학교에 큼지막하게 서연고 입학 학생 현수막을 띄우는, 모두가 조용히 침묵하는 싸이코같은 세상이었다. 힘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해방되길 바라면서.


나도 이런 세상에서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야간자율학습이 끝나도 독서실에 다녔으며, 고3 때는 주말에도 학교에 나갔다. 좀비처럼 살았다. 학교 선생님들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들도 하는데 안 하면 두려울 것 같았다. 그리고 결과는 오로지 내 탓이었다. 나는 결과가 억울하지도 않았다. 그냥 나오면 나오는 것. 그런대로 살아가는 것이 내 성격이라 그랬으려나. 나에게 어떤 행위는 항상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가치였다. 무엇을 성취한다기보단 무엇을 알아간다는 과정. 그런 나에게 이 세상은 그저 아이러니였다.


이 상황을 압축성장의 폐해라고나 해야 하나, 자본주의적 폐해라고 해야 하나, 그저 현대교육의 실패라고 봐야 하나... 굉장히 복잡하고 골치 아픈 문제였다. 분명 피해는 확실한데 그 원인은 다양한 것. 얼마 살아보지도 않으며 내린 결론은 적어도 사람은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에게, 결론이 그거야? 할 수 있겠지만 저 3가지가 이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였고 지금도 그렇다. 그때는 몰랐지만 수많은 연구가 적은 수면이 작은 염증부터 암과 치매까지 각종 질병을 야기함을 말했고, 무제한적 소비는 환경뿐 아니라 인간의 사고방식을 포함한 정신 자체도 바꿔놓았다. 많은 물건을 인간의 건강을 즉각적으로 해치지 않는 한계까지 다다르게 만들었다. 세상은 나보다는 소비자를 위한 것이었으며, 나를 챙기는 것은 가족이나 스스로였다.


저자가 집중력을 되찾기 위해 비판한 것은 3가지다. SNS 알고리듬, 노동시간, 교육방식 이 세 가지를 바꿔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 세 가지 것들은 그 토대인 자본주의적 생산구조의 결과물이기에 저자는 결국 사람을 쥐어 짜내는 현대자본주의 성장 방식에 의문을 던진다. 물론 그가 완전히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감시자본주의의 금지와 주 4일제, 어린이들이 놀 수 있는 시간을 되돌리자와 같은, 어느정도 가능성이 있는 주장이다. (저자는 자신이 자라온 교육 방식 때문인지 급진적인 변화에 멈칫하는 모습을 보인다)


무엇인가 원하는 것을 빠르게 얻거나 성취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사고의 일환이다. 또 자본주의 사회 자체는 소비하지 않으면 굴러가지 않는다. 내가 어떤 상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으며 그저 돈으로 구매하면 된다. 나는 무엇인가 창출해 내고 생산할 수 있는가로 평가받는다.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잠을 자지 않고 끊임없이 만들어 내야 한다. 타인조차 수단으로 바라보게 된다.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동력 중 하나가 소비고, 소비의 동력은 비교라고 생각한다. 비교는 일종의 조바심, 두려움을 낳는다.


그래서 나는 우리 사회가 조바심을 조장하는 사회가 아닌가 생각한다. 타인과 비교했을 때 조금 뒤처졌다고 느끼면 두려움을 느끼고 후회할 결정을 내리거나, 그것을 극복하는 특강을 듣는다. 빼앗긴 집중력을 회복하는 것도 강의를 들어야 하는 정도다. 조바심조차 외부로부터 왔지만, 해결책도 외부로부터 찾으니 오로지 '내 것'이 없다. 자기계발로 그렇게 유명한 유튜버들조차 하는 행동이 타인의 것을 베껴서 성공하는 방식이다. 빨리빨리. 성공의 방식을 찾아서 나에게 적용해야 한다.


사회학 책에서는 이를 중산층의 계층 하락의 두려움이니 하면서 거창하게 말하지만, 앞서나가야 하지 않겠나 하는 마음이 크게 작용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조기 처방이나 조기교육을 해서 무엇 하나. 타인들보다 더 나은 위치에 오르는 것? 타인과 비교로써 만족감을 얻는 사고는 개인 내부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면 의미가 사라진다. 우리는 사회적 위치에서 개인으로 존재하지만, 하나의 주체로서도 살아간다. 남과 계속해서 비교하는 삶은 나이가 들어서도 타인을 짓밟는 것에 쾌감을 느끼고 안도를 느끼며 특정 틀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 이 얼마나 내적으로 공허한 삶인가.


나는 잠을 3시간 자면서 공부했다는 스타강사나 성공신화를 과장해서 떠벌리는 사람들을 혐오한다. 자신을 죽여가면서 성취하는 행위에 숭고한 가치 부여를 하기 때문이며 그것만이 정답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의 친구들에게 더더욱 큰 영향을 미치기에 더욱 그렇다. 그리고 그들을 책임져주지 않는다. 잠부터 많이 자라. 그래야 더욱 집중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부모님조차. 당신도 잠 없이 일만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태평하게 앉아서 배부른 철학자와 같은 결론을 내리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우리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라는 명분 하에 스스로를 죽여가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이다. 정신이 없다. 세상은 여기나 저기나 정신이 없다. 가만히 나를 돌보면서 내 방향에 대해 숙고하고, 자신감을 줄 내적 요인은 물론이요(이것은 일종의 깨달음의 영역이라 어렵다), 외적 요인조차 부족하다. 계속해서 현실에 무감각하고 무기력한 개인을 만든다. 자본과 결탁한 기술은 날로 발달하지만 인간의 속도는 그것을 따라가지 못한다. 이제는 기술이든 인간이든 정확한 이해조차 건너뛰고 특정 목표를 향해 폭주하는 세상이다. 인간은 어느새 시시각각 변화는 세상에 당연히 '적응'하고 '선두'에 있어야 하는 존재로 전락했다. 이제는 그 지위마저 위태위태하지만.


여느 사회학 책들이 그렇듯, 이 책이 전달하는 일종의 교훈은 세상의 문제는 오로지 당신 때문이 아니며 사회로부터 비롯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개인과 사회 사이에 있다. 모든 것을 사회 탓으로 돌릴 순 없지만 오로지 개인의 잘못만을 지적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이 사이에서 사회를 개선하며 스스로를 지키며 살아가야 한다. 나는 이 개인의 최후의 보루가 잘 먹고 잘 자고 잘 노는 삶이라 믿으며, 이것이 진리라 믿는다. '잘'이라는 게 어렵지. 하지만 먹고 자는 것에는 확실한 답이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최후의 보루를 지키고, 침범하는 것들에 저항하며 변화하는 세상에 반응해야 한다. 그래야 밑바닥을 치더라도 올라갈 힘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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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2명이 퇴근하지 못했다 - 일터의 죽음을 사회적 기억으로 만드는 법
신다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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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최진영의 소설 <돌담>을 읽었다. 장난감 회사에서 일하는 주인공이 발암물질을 넣고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회사 사람들, 즉 사회의 부조리에 침묵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돌을 하나씩 쌓아 피해자를 가두는 담을 만드는 것으로 비유해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연간 800개가 넘는 담을 쌓는다. 연간 800명. 산재 사고 사망자 수다. 하루에 2명꼴로 사망하는데 세상은 아무런 일도 없듯 돌아간다. 우리가 아는 산재사망 노동자의 이름은 유가족들이 열심히 알렸기 때문에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대다수의 산재사고는 대개 간단한 단신 보도로 끝을 맺곤 한다." (p.172)


 

커뮤니티나 SNS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응이다.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피해를 입은 노동자 탓을 한다. 노동자가 조금 더 예의 주시 못한 것, 조금 더 정신 차리지 못한 것. 그런데 현실을 들여다보면 그리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후에 이야기하겠지만, 사고가 발생하면 재판장에서 회사 측 주장과 사상자 가족의 주장을 모두 듣고 판사가 결정한다. 노동자의 과실이 크다면 그것 또한 재판에 반영되고 가족들도 이해한다. 그런데 회사의 정보력이 더 좋고 노동자의 가족은 제한된 정보만을 습득하기에 재판은 애초부터 공정하지 않다. 게다가 개인의 탓만 한다면 사고는 계속해서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어쩔 수 없는 죽음으로 치부되는 것이다.

 

계속되는 사고 앞에서 드는 의문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모든 사고는 노동자의 탓일까? 개선될 수는 없을까? 단순히 일터라는 것이 시키는 일이 확실히 나뉘어 있고 노동자는 그것을 단순하게 실행하면 되는 것일까? 기업이 안전장치를 하는데 얼마나 예산을 쓰고 있을까? 어느 사회문제든 내막은 복잡하게 얽혀있다. 오로지 하나의 탓만 할 수 없는 이유다.

 

노동자는 목표 생산량을 맞춰야 한다. 기업은 이윤을 최대한으로 남기는 것이 목적이다. 그렇다면 첫 번째로 노동자는 목표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할 것이고, 기업은 이윤을 최대한으로 남기기 위해서 생산량을 높이거나 노동 강도를 높이게 된다. 기업의 목표가 오로지 '생산량', '최대한의 이윤' 그 자체일 때 사고의 위험이 커지기 시작한다.

 

SPC 사망사고 원인은? "12시간 안전장치 없이 '빨리빨리'...팔 걸려 사고"

"일터의 실질적인 우선순위를 고려하면 안전장치로 인해 일이 방해를 받거나 효율이 떨어질 때 노동자들이 안전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다. 업무량을 못 채우면 생계의 위협을 받지만, 위험하게 일하는 것은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위험한 작업 방식이 관행으로 굳어진다. 안전장치와 일의 효율이 충동할 때 관리자가 그 지점을 빨리 알아차리고 조치를 취해야 하는 이유다." (p.79)

 

실제 작업 현상과 떨어진 탁상공론식의 기업 경영도 문제다. "경험이 아닌 서류로만 현장의 필요 인력을 계산하고 배치하는 원청으로선 하청의 인력 부족 호소가 충분히 와닿지 않았던 것이다." (p.86) 비현실적인 작업량을 소화하기 위해서 노동자는 안전을 포기한다. 회사에서 비현실적인 작업량을 정해도 노동자는 반드시 따라야 한다. 권위주의적인 구조에서는 더더욱 노동자의 의견이 들리지 않는다.

 

"대규모 산재사고가 발생한 현장을 찾아가 보면 노동자들이 '이미 위험 경고를 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사측은 예측이 도저히 불가능한, 자연재해와 다름없는 사고라고 주장하는데 노동자들을 만나보면 '진작부터 위험 신호가 있었다'는 것이다. 현장에서 산재 경고음이 여러 번 울렸는데도 조직 대처가 미흡했던 이유는 대부분 소통 미흡 문제였다." (p.98)

 

사고의 디테일은 다르다. 하지만 그 '구조적' 원인은 비슷비슷하다.

우리가 이 구조에 신경을 쓰면 사고를 막을 수 있다.

 

그렇다면 기업은 왜 안전에 돈을 안 쓰는가. 저자는 우리 사회가 애초부터 안전에 배분하는 돈의 기준이 낮다고 말한다. 안전비용에 쓰는 돈, 즉 법정 산업안전보건관리비는 전체 예산의 2퍼센트에 못 미친다. 그러니까 안전에 사용하는 돈이 2퍼센트가 최저선이란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업들은 안전예산으로 최저임금처럼 딱 2퍼센트에 맞춰 사용하는 것이다. 둘째로는 안전 비용은 투자 대비 효율이 낮다는 인식 때문이다. "안전관리란 한두 가지 시설 투자로 안전사고의 원천적 봉쇄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사업장의 위험 요소를 발굴하고 개선하면서 가능한 사고의 위험을 최소화하는 과정이"다.(p.118) 한마디로 안전에 돈 쓰는 건 효율이 떨어진다는 인식이다. 노동자를 사후 처리하는 것(보상금을 지급하는 것)이 기업에겐 안전비용을 쓰는 것보다 더 싸게 먹힌다.

 

 17명 사상 광주 학동 붕괴사고 ‘정비공사 입찰담합’에 집행유예

"비용 절감 목적의 외주화", 근본적으로는 인건비 감축이 목표다. 그렇게 하청에 하청을 계속해서 이어나간다. 돈이 별로 안되는 사업은 차라리 하청을 맡기고 소개비 명목으로 소액의 돈을 건지고 책임은 지지 않으니 원청으로서는 손쉬운 해결법이다. 그렇게 하청구조를 거듭하여 전기가 흐르지 않는 사선을 주로 다루는 배전공이 전기가 흐르는 선을 다루게 되고, 건물 구조를 제대로 파악하거나 안전 수칙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포크레인 기사가 건물을 철거한다. 그렇게 무분별한 하청은 광주 학동 건물 붕괴 사고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법이 작동해야 하는 이유다. 하청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어도 몇몇 기업은 암암리에 하청 팀을 섞어서 운영한다.

 

기업들이 법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는 현실과 최대한 남겨먹으려는 하청을 주는 관습 때문에 공사 금액에 하한선을 두자는 주장이 나온다. 그것은 적정임금제로 나타나는데 업계가 공정별로 필요한 최소 인건비를 산출해 공사 금액의 하한선으로 삼는 것이다.

건설현장 적정임금제 해봤더니…‘생산성ㆍ안정성’ 두마리 토끼 잡았다

 

정부는 대응을 하는가?

물론 정부 차원에서 안전지침이 내려진다. 그러나 형식적인 이야기는 실제 노동환경과 동떨어져 있다. "노동자가 자신이 하는 일의 위험성을 스스로 알고 조심하는 것" 산재 예방의 핵심 요건이지만 현실에서는 사용자(기업)도 그 위험성을 모르고 노동자는 당연히 모른다. 위험 표지판도 형식적이다. 노동자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위험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기업들은 작업장의 위험 요소를 능동적으로 파악하고 고민하기보다 수동적으로 법을 따르는 쪽을 택한다. 법이 느리면 똑같이 느려지는 것이다. 법적으로 정해진 사업주나 노동자 대상 교육자료도 업무 현실에 맞춰 제작되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시간도 부족하다. 저자는 결국 업주의 눈높이에 맞는 교육과 인식을 바꾸는 것, 정부의 적절한 지원과 동반자적 관계 형성. 정책의 지속성과 질적인 향상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특히 50인 미만의 작업장이 사각지대다. 대부분의 사고와 사망자가 여기서 나온다. 파쇄기 근처에서 일을 하고, 파쇄기에 낀 이물질을 직접 치우기 위해 기계 위로 올라간다. 이게 가능한 곳이다. 법 제정을 조금 더 세심하고 융통성 있게 정책을 펼쳐야 한다. 그리고 지키게 해야 한다. 계속해서 산재사망자가 나오고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는 한, 기업 측에서도 사망자가 나오니 부담이다. 해결하지 않으면 모두가 피해를 본다. 대체로 그 피해를 노동자가 짊어지지만 말이다.

안전수칙 위반 상황을 한데 뭉뚱그려 '노동자 과실'이라고 비판하기는 쉽지만 그것이 현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반대로 행동의 구체적인 원인을 찾고 대안을 마련하는 것은 어렵지만 산재 감축에 더 효과적인 길이다.

p.155

많은 법령의 취지는 사업자가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 관점에서 바라보지만 현실은 반대로다. "노동자의 자기 보호 의무는 수없이 강조되지만 사업주가 노동자를 보호할 의무와 그것을 이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은 거의 거론되지 않는다." (p.157) 지금의 관점은 "구조는 눈 감은 채 '어떠한 상황에서도 노동자가 안전을 우선시해야 한다'고만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책임은 노동자에게 떠넘겨지는 인식이다.

 

물론 법과 원칙을 어겨가며 위험하게 일하는 노동자가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못 하도록 막는 것 또한 법과 구조의 역할이다. 우린 관점 자체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일의 효율과 안전 수칙이 충돌할 때 회사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그 지점을 해소하지 않으면 노동자는 작업을 완수하기 위해 안전수칙을 포기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p.81)

 

김용균씨 사망사건에서 피해자 의견서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이를 읽으면 우리 사회의 노동조건이 그대로 드러난다. 시정요구는 묵살당하고 회사에 위험을 알려도 묵살당한다. 재판에서는 노동자의 잘못이 강조되고 2차 가해를 당한다. 죽은 작업장에서 또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와 일한다. 운 좋으면 살고 운 나쁘면 죽는 것이다. 사고가 나면 회사에선 사고 현장의 증거를 지우고,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다. 이게 현실이다.

 

밑의 주소는 "고 김용균 사망사고 진상조사결과 종합보고서"다. 앞부분 요약본만 읽어도 충분히 이해가 가능하다http://www.safedu.org/files/report_KimYoungKyun.pdf

 

회사는 왜 그렇게 급급하게 사건을 지우는가. 저자는 "위험 자체를 드러내기 두려워하는 조직 문화가 존재한다." (p.176)고 말한다. 위험을 잘못이 드러나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어떤 위기감이 위험을 밝히는 데에 소극적으로 만든다. 무결한 안전 목표를 추구한다. 재해 수 0건을 달성하기 위해 사고를 감추는 것이다.

 

저자는 안전관리를 특정 부서에만 맡기는 것 또한 비판한다. "개별 부서 업무의 산재 위험을 가장 잘 아는 주체는 안전관리부서가 아닌 그 부서의 직원들"(p.187)이기 때문이다. 모든 부서가 제 일처럼 챙겨야 하는 것이다. 현실은 안전관리조차 외주로 맡기고 있다.

 

산업재해 재판에서 어떤 기업은 굴착기에 깔렸던 사람을 그저 산에서 굴렀다며 신고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당시 피해자는 살아있었는데 초기 대응을 놓쳐 상태가 악화됐다. 산재 은폐도 쉽게 이뤄진다. 구급차를 부르지 않고 직접 병원에 싣고 가다 사망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면 개선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먼저 재해가 발생하면 우리가 볼 수 있는 자료를 보자. "재해가 발생했을 때 근로감독관과 안전보건공단 직원이 함께 작성하는 '재해조사의견서', 그리고 각종 수사자료를 토대로 해당 사고에 대해 사법적 결론을 낸 법원의 판결문이다. 이 두 자료는 산재가 왜 발생했으며 거기에 회사나 노동자의 책임이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파악하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p.269)

 

"재해조사의견서는 사건의 기본적인 얼개를 파악할 수 있는 핵심 자료지만 현재는 비공개다. 노동부와 안전보건공단은 자료 제출의무가 있는 국회의원실을 제외하고는 재해조사의견서를 일반에 공개하지 않으며, 정보공개 청구를 해도 거절한다. 재해조사의견서가 "수사에 쓰이는 자료"라는 게 주된 이유다. 앞서 짚었듯 수사기관의 수사가 재해에 관한 사회적 소통을 통째로 잠식하는 예다." (p.272)

 

"판결문은 재판이라는 사회 공공 인프라와 비용을 들여 대한민국 재판부가 특정 사건에 대해 결론을 낸 결과물이다. 그 결과를 사후적으로라도 일반 시민에게 공개하는 것이 맞지만, 현실은 사회적으로 논란이 된 극히 일부 사건을 제외하면 판결문 원문이나 재판 경과를 알 수 있는 사건번호조차 구하기 어렵다. 사건번호가 없으면 사건 당사자를 제외한 제삼자는 판결문을 찾을 수 없다. 동료의 죽음을 알고자하는 노조나 지역의 산재활동가들이 사건 내뇽을 알 수 없다는 뜻이다."(p.275)

 

산재에 관한 정보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기에 기자들은 유일하게 검색이 가능한 일산 법원도서관에 가서 검색하고, 직접 피해자 가족을 찾아가 묻는다. 현재는 공공기관을 대상으로만 최근 5년 내 산재 현황 정보를 볼 수 있을 뿐이다. 사망자가 많이 나온 기업들 리스트는 시민단체나 노동단체가 가공하여 제공하고 있다. 이와 달리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은 모두 형이 확정된 기업의 과거 사고 이력과 확정된 형의 내용을 홈페이지에 공개한다."(p.281) 국가가 일을 안 하니 시민들이 일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어두운 소통 구조는 결국 산재사고를 최대한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가려는 쪽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투명한 정보 공개, 피해자의 정보수집지원, 정부의 융통성 있는 기업 지원, 기업의 사고 전환, 국민적 관심 이 모두가 필요한 현실이다. 사고의 대부분은 막을 수 있으며, 오로지 노동자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은 또 다른 억울한 나를 만드는 과정일 것이다. 우리는 사용한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적어도 어릴 땐 그렇게 배웠다.

 

산재 조사란 사실 노동자가 일터에서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마음 다해 찾는 일이다. 죽은 이를 추모하는 부고장인 동시에 또 다른 죽음을 막겠다는 산 자의 다짐이다. 산재를 연구하는 이들이, 나아가 평범한 시민들이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죽음을 그토록 알고자 하는 이유일 것이다

p.292

 

“해외 출장” 국감 출석 거부한 DL·SPC 회장...노동계 “국민 우롱” 청문회 요구

지금도 이어지고 있지만, 최근 각종 기업에 대해 불매운동 붐이 일었던 적이 있다. 그 불매운동은 일종의 소비자의 응징이기도 했지만, 국가나 사회가 직접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결과물이기도 했다. 결국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주체는 국가였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지시를 내린 관계자는 집행유예 정도로만 처벌받을 뿐이다. 책임 소재는 나뉘어 확실하게 구분 지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노동자는 더욱 답답할 노릇인 것이다. 피해는 분명한데, 원인은 작게 나뉘어 보이게 만드는 것.

 

먼저 나섰던 것은 동료들과 유족들, 또 노조였다. 유족은 매우 열심히 사건 일지를 만들었다. 노동자가 감정적이라고 하는 비난과 다르게 사실을 입증하고 구조적 결함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매우 이성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했다. 또한 피해 사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는 노조를 통해야 했다. 노동자는 노조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래야 같은 처지에서 현실적으로 대응할 방법을 알려주었다. 노조를 죄악시하고 모든 노조가 사라지고 조합원이 모두 사라져 간다면 결국 남은 것은 무엇일까. 노동자는 누가 지켜주며 사고 사실을 누가 알리냐는 말이다.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면 회사가 망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정작 전체 매출에서 엄청난 부분을 차지하지도 않음과 더불어, 끼임 장치나 간단한 장비 지급조차 안 하는 곳이 많은데 말이다. 어두운 석탄 공장에서 휴대용 전등도 자비로 사야 했던 노동자의 모습을 아는가.

 

현실은 복잡하다. 기업은 이윤을 추구해야 하고 수지타산에 맞아야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다. 이것을 노동자 가족이나 법정이 무시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기계의 덮게라든지 사고 발생 시 바로 알리거나 멈출 수 있는 체계가 무리한 요구로 들리는가? 만약 해야 할 일의 양이 늘어나면 노동자를 쥐어짤 것이 아니라, 노동자를 더 투입하거나 고용해야 하는 일이다. 기업이 오로지 막대한 이윤창출에만 눈이 멀어있을 때 사고도 그만큼 늘어나는 이유다.

 

자본을 추구하는 것이 기업이라면, 노동자인 한 개인을 지키는 것은 헌법에 근거한 국가일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가 기업에 개인의 권리나 존엄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이것이 기업의 이윤을 뺏는다고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 둘 사이에서 융통적으로 정책을 운영하고 억울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다. 적어도 헌법을 중요시하는 국가라면 말이다. 자본보다 사람과 정의가 우선하는 국가라면 말이다.

 

지금도 어디선가 비용을 내고 목숨을 내걸고 노동을 하고 있다. 우리는 목숨 돌리기를 하고 있다. 어디가 걸릴진 모르지만. 운 좋게 안 걸리면 그만이다. 그렇게 피해자 주위에 돌담을 하나하나 쌓아나간다. 누군가의 노동에 의해 사회가 굴러가고 있음을 망각하는 그 자만이 우리 사회를 곪게 한다. 인간을 소모품으로 여기고 사용해서 도달하고자 하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하니포터활동으로 한겨레출판에게 도서를 지원받았습니다.

책은 전반적으로 문제점과 해결점까지 충분한 근거를 바탕으로 연결되어 굉장히 유익하고 설득력까지 갖춘 책이라 서포터즈 활동을 떼어내더라도 강력히 추천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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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사람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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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나무 이야기로 시작한다.

마주 보며 자라나던 두 나무가 있었는데, 한 나무가 인간에 의해 잘려나간다. 다른 나무는 잘린 나무가 다시 자랄 수 있도록 햇빛을 가리는 자신의 부분을 죽여나갔고, 결국 그루터기에서 움튼 싹은 작은 나무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내 사람들이 그 큰 나무마저 베어버렸다. 자라난 작은 나무는 잘려나간 나무를 살리려고 했지만 힘이 없었고, 잘린 나무는 썩어 흙으로 돌아갔다.

 

"되살아난 그는 되살리는 존재, 그는 그 자리에서 사람에게 파괴된 적이 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사람을 파괴한 적이 있다." (p.21)

이어지는 것은 장미수와 신복일, 그리고 그들의 5명의 자식 일화, 월화, 금화, 목화, 목수 가족의 이야기다.

 

5남매는 어릴 적부터 누가 누구 편인지 나누며 '우리'란 무엇인가를 배워갔다. 월화는 백일장에서 1등을 할 만큼 글을 잘 썼고 음악과 노래를 좋아했고 인기가 많았다. 일화는 운명을 노력으로 이기고 싶어서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열심히 공부했다. 금화는 이런 잘난 가족들을 닮고 싶었다. 그러나 엄마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라고 말했다. 그 사이에서 금화는 외로움을 탔다. 다른 가족과 달리 홀로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금화와 쌍둥이 동생인 목수와 목화가 산을 올랐는데, 나무가 기울어 금화가 깔려버렸다. 놀란 쌍둥이 동생들은 어른을 찾아서 도와달라고 요청하지만 어른과 함께 돌아오니 금화가 사라져 있었다. 사람들은 쌍둥이의 증언을 비현실적이라 생각해 믿지 않았고, 이후에 온 가족은 금화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쌍둥이가 말한 사실은 "나무가 쓰러졌고 금화가 깔렸고 다시 나무가 쓰러졌고 목수가 깔렸고 그사이 금화는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목화는 꿈이면서도 현실 같은 일을 계속해서 경험한다. 사람들이 투신을 하고 교통사고를 당한다. 그리고 어떤 목소리가 그들을 구하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죽음의 순간에 있었다. 목화는 그들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사람만 구할 수 있었다. 그 공간은 "어떤 틈과 같은 것. 꿈과 현실의 균열, 어긋나는 지점 또는 미세하게 맞닿은 선, 증명할 수 없으나 존재하는 세계, 가능성으로 남아 인식 너머에 존재하는 사건"같은 것이었다. 목화는 계속되는 이런 상황 속에서 금화를 찾아내서 금화를 구하고 싶었다. 금화는 죽지 않고 어딘가에 존재하며 살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목수를 그 사건 당시에 누군가 자신처럼 살린 게 아닐까 생각했다.

 

목화가 이 꿈같은 상황에서 울면서 깨어났다. 그 모습을 본 엄마 장미수가 다가왔다. 목화는 엄마에게 그런 꿈을 꾼 적이 있냐 물었고 엄마는 그 능력이 무엇인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장미수는 15살부터 사람을 구했고 목화와 같은 일을 계속해서 겪었다.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는 일. 그중 단 한 사람만을 살릴 수 있는 일. 그보다 더한 지옥이 있을까?" 명령을 무시하고 사람을 구하지 않으면 매우 큰 두통이 일어났다. 그녀는 계속해서 소환당하면서도 열심히 공부해 간호사가 되었고 남편과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 그런데, 아이를 갖고 있는 동안에는 그 소환이 멈췄다. 그렇게 다산은 오히려 고통을 멈추고자 하는 의지의 산물이 되었다. 하지만 출산 후에 다시 소환이 이어졌다.

 

그녀 또한 엄마인 임천자에게 이야기했지만, 그녀는 뒤늦게서야 그 사실을 말했다. 다른 자식들은 이 일을 겪지 않았다. 선택받은 사람만이 이 일을 겪는 것이었다. "왜 나인가" "어째서 나인가" 미수도 계속해서 소환되고 있었다. "미수는 소환될 때마다 절절매며 신에게 빌었다. 내 딸을 찾아달라고, 생사라도 알려달라고", "신은 부당했다."

 

"이제 중요한 이야기는 바로 이것이다. 임천자의 기적장미수의 악마신목화의 목표인 신은 무엇인가."

미수는 금화의 실종에 신이 관여했다고 믿었다. "목화는 첫 소환부터 목소리와 동시에 나무를 느꼈다" 미수는 이 셋의 경험이 전부 다르며 명령하는 존재가 하나가 아닐 수 있음을 말한다.목화는 세 가지 목표가 있다고 한다. 첫째, 알아내는 것, 둘째 통과하는 것, 셋째 증명하는 것이다.

 

소환하는 존재가 무엇을 원하는지, 또 사람을 살리는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왜 자신이 선택된 것인지를 알아가려는 것이 아닐까. 이 소설에서 관통하고 있는 주제는 분명 생과 사의 경계다. 이것이 신적인 존재란 무엇이며 살린다는 능력이란 무엇인지를 물으면서 다양한 주제가 엮인다.

 

누군가는 살려진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그 존재는 다시 누군가를 살리는 존재가 되는 것일까. 만약 목화가 살려진 존재라면 그는 누군가를 또 살릴 수 있을 것이다. 목화는 나무를 느꼈다. 자신을 소환하는 대상을 나무로 느낀 것이다. 그것이 금화를 덮쳤던 나무일지도, 우리가 어떤 한 사람을 향해 바치는 인생이 그런 모양일지도 모르겠다. 무엇이 됐든 생명은 선택받은 것의 결과다.

 

인간이 나무를 잘라냈고, 나무는 그 인간에게 저주를 내린 것일 수 있다. 앗아가는 만큼 살릴 수 있게 하는 것, 그럼으로써 배우게 하는 것. 모든 생명체에겐 자라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가져갈 때 생각 없이 앗아가려는 그 사고를 비판하는 것일까. 고유한 인생은 인간에 의해 하나하나 베이는 숲속의 나무의 모습과도 겹친다. 다른 나무를 키워내는 것도 또 다른 나무의 의지이듯, 이 소설에서는 연결된 인간의 모습이 보인다.

 

"수많은 죽음 앞에서는 살아 있음 자체가 비정상이었다."

수많은 죽음 앞에서 한 사람만 구할 수 있다는 것, 누군가는 분명 선택받은 존재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것이 죽음에서 구해졌다는 것으로 대표되지만, 그 상황은 다른 곳에도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구하거나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축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인의 죽음 앞에서 특정 인물을 골라야 하는 것이라면 그 의미는 달라진다. 그것의 무게는 어떻게 짐작하며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까. 저자가 어떤 의미의 생과 사를 말하고 있는 것인지 곱씹어 본다.

 

나무의 이야기와 그 나무를 인간들이 베어가며 숲이 사라지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단순히 인간의 탐욕이나 잔인함을 보여주는 것인가 생각하게 했지만, 그 이후의 내용을 읽으면서 고유한 생명과 죽음, 또 한 생명을 위한 사랑과 보살핌, 인간의 관계란 무엇인가 묻게 되며 다양한 상상을 하게 했다.


* 서포터즈 활동으로, 가제본 도서를 제공받아서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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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무삭제 완역본) - 현대판 프로메테우스 현대지성 클래식 37
메리 셸리 지음, 오수원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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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프랑켄슈타인>은 로버트 월턴이 누나인 새빌 부인에게 쓰는 편지로 시작된다. 월턴은 항해 사업을 하기 위해 배를 빌리고 선원들을 모집해 북쪽으로 항해를 떠난다. 그는 항해하는 과정에서 한 이방인,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을 만난다. 윌턴은 평생 진정한 친구를 찾아 나섰는데, 그 이방인이 자신이 꿈꾸던 친구의 모습에 적합했고 그와 나눈 이야기를 새빌 부인에게 편지 보내면서 내용이 전개된다.

 

"프랑켄슈타인"이라고 하면, 보통 얼굴에 못이 박혀있고 때론 초록색 피부를 가지고 있는, 흉측한 모습을 한 괴물의 이미지로 묘사된다. 하지만 이는 와전된 프랑켄슈타인 이야기인데, 메리 셸리의 원작 <프랑켄슈타인>은 과학자 프랑켄슈타인이 이름 없는 괴물을 만들어내고 그 괴물이 인간을 위협하는 내용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미지는 프랑켄슈타인이 아니라 그가 만든 괴물을 형상화 한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은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지에 따라 굉장히 다른 해석을 낳는다. 먼저 과학자의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고, 괴물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출 수 있으며, 여성의 삶이나 전체적인 틀에서 바라볼 수 있는, 정말로 다양한 관점을 통해 다양한 분석을 할 수 있다.

 

어린 학생이었던 프랑켄슈타인은 무엇이든 배우는 것을 좋아했다. 많은 것을 배우며 자연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불멸의 묘약"이었다. 그는 현대 과학에 흥미가 없었다. 그가 유학을 가서 만난 크렘페 교수는 그런 그를 비판했지만, 포용적인 발트만 교수를 만난 후 화학 연구에 매달린다. 어느 정도의 지적 경지에 오르자 그는 인체와 동물의 신체구조에 관심을 갖게 되어 생리학 연구에 몰두하며 죽음을 연구한다. 본격적으로 불멸의 대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불멸을 위한 광기를 가지고 연구한 끝에 프랑켄슈타인은 생명 발생의 원인을 알아낸다. 생명 없는 물체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프랑켄슈타인은 인간의 신체능력을 뛰어넘지만 매우 흉측한 모습의 괴물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괴물이 탄생한다. 흉측한 괴물을 마주한 프랑켄슈타인은 도망간다.

 

어느 날 동생 윌리엄이 죽었다. 그리고 그의 목걸이를 가지고 있었던 하녀 유스틴이 범인으로 지목되어 유죄판결을 받는다. 억울한 유스틴은 결백을 주장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후에 밝혀지지만 이 모든 것은 괴물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이 벌인 일이라 확신하고 괴물을 없애버릴 것이라 다짐한다.

 

2부는 괴물에게 초점이 맞춰져 진행되면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의 특징이 부각된다. 괴물은 이름조차 없는 존재였으며 존재 그 자체로 존중받지 못했다. 그렇기에 '정체성'에 대한 질문들이 잇따른다. 산에 오른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만나게 되는데, 프랑켄슈타인은 윌리엄을 죽인 괴물에게 분노를 쏟아내고 괴물은 그동안 겪었던 일과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나는 당신의 아담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타락한 천사가 되어버렸소"

 

둘의 대화에서 자신의 창조물(괴물)을 비난하는 창조주(프랑켄슈타인)의 모습이 나타난다. 여기서 존재의 악함과 추함을 배격하고 처벌하려는 신앙관이 겹쳐진다. 존재의 근원이 악할 수밖에 없는 기독교적 인격관으로도 볼 수 있다. 인간이란 추하고 악함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인가? 창조주에게 복종하고 평생 악을 배격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인 것인가. 괴물의 삶을 비난하기엔 그에게 삶은 너무나 가혹했고, 잘 살고자 노력했지만 사람들에게 차별과 상처를 받았다.

 

괴물은 방황을 거듭하다 한 마을에 도착해 오두막에서 몰래 살게 된다. 그곳에서 가난하지만 사랑하며 사는 한 가정을 보게 되고 그들을 몰래 도우며 언어와 문화를 배운다. 이후에 용기를 내어 눈이 보이지 않는 노인과 말을 섞지만, 이내 들어온 그의 가족에 의해서 쫓겨나게 되고 그 가족은 괴물을 피해 마을을 떠나버린다. 괴물은 더욱 슬픔에 빠져 방황하다 사람들을 돕지만 되려 총을 맞는다. 순수할 거라 믿었던 아이마저 자신을 욕하는데, 그 아이가 프랑켄슈타인의 가족인 것을 말하자 흥분해 죽인다. 그리고 지나가던 아가씨의 옷에 아이의 목걸이를 넣는다. 그 아이는 프랑켄슈타인의 동생 윌리엄이었고, 이것이 윌리엄 사망사건의 전말이었다.

 

괴물이 방황하면서 읽은 책들이 언급되는데, 그 책들은 <실낙원>,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창조주에 의해 태어난 괴물이라는 존재가 타락하는 과정을 실낙원에 빗댄 것으로 보인다. 괴물이 살아가는 곳은 낙원이 아니라 지옥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속에서의 비극의 주인공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다양한 이야기 속에서 공정하고 정의로운 인물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을 포용해 줄 세상을 원했을 것이며, 베르테르의 슬픔과 외로움, 고뇌의 감정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또다른 이성에 대한 욕망을 갖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저주스러운 창조자! 어째서 당신조차 역겨워 등을 돌릴 만큼 흉악한 괴물을 빚었습니까? 신은 연민을 갖고 자기 모습을 따라 아름답고 매혹적인 존재로 인간을 창조했소. 그러나 내 모습은 당신의 추악한 부분을 닮았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끔찍하오. 사탄에게는 그를 숭배하고 격려해줄 동료 악마들이 있었지만, 나는 고독할 뿐 아니라 혐오의 대상일 뿐이오." (p.166)

 

이 발언에서 <프랑켄슈타인>만의 차별점이 부각된다. 보통은 조물을 외적으로도 아름답거나 과학적, 효율적으로 완벽한 이상향으로 만들지만 여기서의 조물은 그저 불사의 특성만을 투여시킨, 흉악하게 생긴 괴물의 형상이었다. 이 발언에서는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선천전 특징으로 차별받은 인물이 자신 그대로 인정받고 하는 욕망이 나타나며 그런 그의 마음은 인간과 다르지 않음이 나타난다. "신의 추악한 부분을 닮았"다는 발언은 인간의 추악한 내면을 외적으로 형상화한 것을 암시할 수도 있다. 그런 내면을 가진 인간은 숭배 받을 사탄이 존재한다.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을 만나서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이성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다. 이성을 만들어주면 먼 곳으로 떠나 평화롭게 살겠다고 약속한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창조한 나는 힘닿는 한 그를 행복하게 할 의무가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며 고민한다. 흥미로운 것은 기존의 지배적인 기독교관과 상충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여기서의 창조주, 즉 신은 조물주는 벌주고 타박하는 존재가 아니라, 조물을 행복하게 하고 즐거운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창조주는 조물을 아끼고 사랑할 의무가 있는 것인가.

 

"유대와 사랑이 없다면 내게 남은 몫이란 증오와 악덕 뿐이오" (p.180)
괴물의 호소에 마음이 흔들린 프랑켄슈타인은 괴물 여성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한다. 

프랑켄슈타인은 스코틀랜드의 외진 곳에서 괴물과 약속한 일을 하는데, 첫 실험 때는 광기에 눈이 멀어 끔찍한 실험의 실체를 보지 못했으나 지금은 그 과정에 메스꺼움을 느끼며 작업한다. 옛날에 호기심 가득 찼던 모습은 사라지고 스스로 "벼락을 맞아 말라 죽은 나무"가 되었다고 말한다. 새로운 존재를 창조하기 직전 주인공은 생각에 빠지는데, 괴물 여성을 만드는 것이 옳은 행위인지 고민한다. 괴물은 그 존재로도 무섭고 해로운 존재이기도 하지만 둘이서 종족을 번식하여 인간을 위협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괴물과 약속한 것이 얼마나 사악한 것인지 깨달은 프랑켄슈타인은 새로운 존재를 찢어버리며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그 모습을 본 괴물은 분노하며 프랑켄슈타인에게 찾아가 왜 그랬는지 묻는다. 그러자 프랑켄슈타인은 분노하며 자신은 괴물을 창조했고, 괴물은 노예며 자신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괴물은 맞받아치며 프랑켄슈타인을 저주하고 협박하며 복수를 다짐한다. 괴물은 결혼식 날 밤에 그를 찾아갈 것이라 말하며 사라진다.

 

프랑켄슈타인은 꿈에 그리던 엘리자베스와의 결혼식을 올린 후 여행을 가지만 그날 밤 엘리자베스는 괴물에 의해 살해당한다. 충격받은 프랑켄슈타인의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사망한다. 동생 윌리엄, 하녀 유스틴, 친구 클레르발, 연인 엘리자베스, 아버지 모두 자신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한 프랑켄슈타인은 큰 분노와 슬픔에 빠진다. 프랑켄슈타인은 복수를 다짐하며 계속해서 괴물을 추적한다. 그렇게 북쪽으로 계속해서 괴물을 쫓다 위급한 상황에 빠지자 월턴에 의해 구출된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쫓으며 건강이 매우 나빠졌고, 병상에서 월턴에게 그동안의 이야기들을 한다. 자신이 광기로 분별을 잃은 상태에서 이성적인 존재를 창조했고, 이제는 '이성'과 '미덕'의 관점에서 괴물을 없애달라고 요구한다. 프랑켄슈타인은 결국 숨을 거두고, 괴물은 몰래 죽은 그를 보러 오지만, 월턴은 그를 불러 세우고 대화를 나눈다.

괴물은 이제 최북단으로 가서 스스로를 태워 죽이겠다고 말한다.

그렇게 사라지고 소설은 끝이 난다.

 

존재 자체로 고통인 삶은 죽음으로써 해방되는 것일까? 차별을 조장하는 사회는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해답으로 여긴다. 환영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대응할 힘이라도 있는 존재는 타락하고, 일말의 힘조차 없는 존재는 소멸한다. 이들이 차별받았다는 이유로 그 사회에 해를 끼친다면 그들은 이해받을 수 있을까. 만약 괴물에게 유대와 사랑이 존재했다면, 이런 결말에 다다를 수 있었을까. 괴물이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던 생물은 인류 환대의 또 다른 형상일지도 모르겠다. 유대와 사랑이 없는 사회에서 괴물이 된 이들이 존재한다. 그는 외로웠다. 육체 이전에 정신적으로. 마음으로.

 

해제에서는 저자 메리가 당시 산업혁명의 주제인 "과학적 에너지 활용", 특히 갈바나의 생체전기 실험에 큰 관심을 보였다고 말한다. 그래서 <프랑켄슈타인>은 "당시 과학자들의 생명 창조에 대한 고민을 배경으로 하는 셈"이다. 그러나 그가 단순히 인간을 넘어선 능력을 가진 존재를 탄생시키는 현대의 관점의 SF 소설을 구상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조물을 흉악하게 만들어 미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 욕망을 충족시키지 않았음과 더불어 괴물 그 자체도 감정이 없이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프랑켄슈타인>은 낙관으로 가득 차 희망차게 발걸음을 내딛지만 결과물에 대해 버거워 하는 현대 과학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과학자는 괴물에게 생김새가 비슷한 이성을 만들어 준다고 말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인간의 무조건적 낙관과 영악함, 결과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무책임함을 비꼬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과학의 끝, 생리학과 공학의 끝은 인간 불사인가 물을 수 있다. 박사 프랑켄슈타인은 죽음을 극복하고 창조의 지위에 오르려는 인간 욕구의 대변인이었다. 신이 되려는 욕망과 미래를 낙관하는 인간의 특성까지 모두 담겨있는 인물이다. 자신이 만든 생명체를 되려 두려워하고 악마화하며 책임지지 않는다.

 

괴물 개인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자신을 부정하고 차별하는 세상에서 사회적 소수자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 아무리 선의를 가지고 노력해도 사람들은 외관을 보고 차별한다. 그 자체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란 어떤 세상을 살아가는가. 그의 타락은 세상이 만든 것이었다. 감정을 느끼는 존재는 최소한의 보살핌을 요구했고, 인간은 창조한 것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했다.

 

존재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면 그것을 만든 신 혹은 창조주의 역할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기존에 지배적인 기독교관은 죄를 갖고 태어난 인간이 죄를 씻어내며 구원을 받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바탕에서 기본적으로 신이란 인간에게 벌을 주며 인간의 잘못을 고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먼저 신이란 분노하고 벌주는 존재인지 사랑하고 보살피는 존재인지 의문을 가질 수 있고, 신의 모습에 다가서려는 인간이 만들어낸 조물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인간의 '창조관'은 어떤 것인가. 조물은 노예의 모습을 띄고 모든 욕망을 억제해야 하며 스스로를 탓해야 하는 걸까. 창조주는 자신의 책임을 지워버린다. 창조주의 책임이라는 것이 애초에 지배와 복종이라는 구조 아래서 굉장히 모욕적인 단어일지도 모르겠다.

 

괴물의 외모를 두려워하는 인간의 모습은 인간의 미와 추를 구분하는 사고 혹은 본능으로 이어지는데, 소설 속 인간들은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 존재로 묘사된다. 어린아이조차도 괴물을 끔찍하다 여겼다. 괴물의 모습은 생리학적 이상의 실현이었지만 미적 실현은 아니었다. 과학자가 맞춘 초점은 불멸이었다. 미와 추를 나눠 차별하는 인간은 본능적 두려움조차 극복하지 못하면서 어떤 이상을 추구하고 성취할 수 있을까. 이 모습은 이성을 만들어 달라는 괴물의 요청을 들으며 동정과 위로를 느끼다가 흉측한 몸집을 보고 두려움과 증오심을 느끼는 프랑켄슈타인의 모습에서 잘 나타난다. 눈먼 노인은 괴물을 한 인격으로 대했다. 눈을 뜬 사람과 눈이 먼 사람이 대비된 것이다. 인간의 그 잘난 미적 해석의 능력은 존재의 가치를 정확히 평가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

 

인간은 한계를 갖고 있는 존재다. 물리적으로든 이성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물리적 불멸을 꿈꾸는 인간에게 한편으론 감정적인 한계는 왜 극복하지 않으려 하나 질문하기도 한다. 감정을 없애는 것이 이상적인 것일까?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관점에서 봤을 때 감정을 극대화하는 것 또한 인간 이상에 다가서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인간 본연의 특성이란 무엇이며 인간의 부족한 특성을 극대화해 완벽한 존재를 만드는 것에 필요한 조건이란 무엇인가. 감정적인 요소를 넣은 조물의 모습은 소설의 한계라고 봐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기술적 '완벽'의 산물은 아니었다. 괴물은 감정까지 느낄 수 있는, 인간 대부분의 특성을 공유하면서도 그 신체적, 물리적 특성을 극대화 한 '인간을 닮은' '완벽한 조물'을 만들고자 하는 인간 욕구를 나타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메리 셸리가 질문하는 것 중 하나가 인간의 감수성이란 무엇이며 어떤 역할을 하느냐다.

 

"아아! 대체 왜 인간은 짐승보다 감수성이 우월하다고 뽐내는 것일까요. 그것때문에 더 의존적인 존재가 되었을 뿐인데 말입니다. 인간의 충동이 배고픔과 목마름과 성적 욕망에만 있다면 다른 것에 의존할 필요가 거의 없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텐데요." (123p)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을 통해 인간과 괴물의 차이는 무엇인가 묻는다. 괴물에게 이름이 없었던 것은 인간 그 스스로를 지칭하는 것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괴물이라고 지칭하는 모습은 인간 스스로의 추한 모습을 비난하는 것일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추함을 타자화하고 형상화하여 그것을 비난한다. 욕망을 한가득 집어넣고, 예쁘지 않다고 그저 버리는 괴물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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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의 몸 - 일의 흔적까지 자신이 된 이들에 대하여
희정 글, 최형락 사진 / 한겨레출판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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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 어떤 분야에 오랫동안 종사하여 기술이 뛰어나거나 노련한 사람] 

사전적 정의다. 우리가 장인, 전문가라 부르는, 자신의 분야에서 경지에 오른 이들이다. 베테랑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까. 노동을 거듭한 몸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또 어떤 이야기를 닮아 변해있을까. 작가 희정은 그들을 인터뷰한다. 베테랑이란 무엇인가를 물으며 대화한 기록을 남겼다.


세공사 김세모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어릴 적 지인 소개로 작업장에 들어간 김세모는 작은 통나무 위에서 노래를 불러야했다. 그렇게 신고식을 치렀다. 배우는 것은 알아서, 눈치껏 배워야 했다. 남들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며 버티며 결국 기회를 얻어 일을 시작했다. 하루 15시간 일을 했다.

 

귀금속에 광을 낸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업계에서는 누가 한 지 알 정도다. 날카롭게 돌아가는 휠에 금속을 갖다 댄다. 힘 조절을 잘해야 한다. 마지막 단계인 광 작업에서 불량이 나면 앞선 모든 작업들도 날아가는 거다.

 

기계의 발전으로 이제는 더욱 복잡하고 세밀한 작업을 해야 한다. 손가락 서너 개로 휠의 회전력을 감당하는 손목은 휘고 어깨는 말려있다. 허리 디스크가 있지만 그러려니 한다. 세공작업에는 유해 물질이 가득하지만 건강을 생각할 틈이 없다.


"열심히 하면 되니까요. 열심히 하는 걸 못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가 하는 말이다. 열심히, 꾸준히. 그게 쌓여 몇년, 십수년이 넘는다. 열심히 하는 것, 쉽게할 수 있는 것일까? 베테랑들에게는 나름의 자부심과 즐거움이 있었다. 다들 어쩌다 보니 오래 일하고, 베테랑이 되었다고 말하지만 그 순간순간을 그저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조리사 하영숙은 초등학교 급식실에서 일했다. 2000명이 넘는 사람의 밥을 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옛날에는 기계도 없었다. 당연히 몸은 천근만근이지만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보람을 느낀다. 음식 하나하나에는 고려할 것이 많고 계산해야 할 것이 많다. 먹는 사람의 취향, 특성까지 고려한다.

 

하영숙은 살아남기 위해 노조도 가입하며 정말로 열심히 살았다. 육아를 하며 자격증을 땄다. 이는 그 시절 어머니들의 몫이었다. 우리는 베테랑이라는 단어로 삶을 단순히 짐작할 수 있을까. 그녀는 회계 일이 하고 싶었지만 타인을 위해 고생하며 살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래도 잘 살았다" 말한다. 자신만의 가치를 쫓는 의지가 보인다.​

 

로프공 김영탁은 대학 졸업 후 돈을 벌기 위해 청소 업체를 차렸다. 젊으니 줄을 타보라는 권유에 연고 없는 대전에서 먹고 자며 3개월을 배웠다. 지금은 실리콘 보수 작업을 한다. 로프공들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추락을 생각하지만 떨어지지 않을 거라 믿는다. 로프공들의 추락사 소식이 들려온다. 그것을 듣는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심지어 주민이 방해된다고 줄을 잘라버려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놀이 기구도 무서워 못 타는 그는 어쩌다 보니 로프공이 되어있었다. 어쩌다 보니, 먹고살기 위해. 그것이 베테랑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었다.


세신사 조윤주는 월 300이라는 당시로선 큰 금액을 준다는 말에 시작했다. 물에 불은 손이 때수건과 계속해서 비벼졌다. 목욕탕에 자릿세를 내고 사람들의 때를 벗긴다. 안마사의 역할도 한다. '시원하게'밀어줘야 한다. 손맛에 따라서 인기가 판가름 난다. 처음이라면 눈물을 머금고 배워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

 

어부 염순애와 박명순, 조산사 김수진, 마필관리사 성상현, 수어통역사 장진석,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전시기획자인 전포롱, 연극 배우 황은후, 식자공 권용국은 몸을 던진다. 노동에 의해 몸이 변화한다. 보이지 않는 노동이 아름답게 보이는 세상을 만든다. 참 모순적이다.

 

베테랑의 삶은 스스로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삶이었다. 어쩌다 보니 일했고, 살아야 하니 계속했고, 그저 재밌어서 했다. 그들은 자신만의 삶과 기술을 만들어갔다. 기술자의 세계에선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그들의 직업은 안전뿐 아니라 안정을 보장하지 않았다. 우리가 베테랑을 바라볼 때 노동의 위대함을 보지만 그 뒤에는 그들이 버텨왔던 시간과 고통, 또 변화하는 몸이 있었다.

 

세공, 급식, 외벽청소 전문교육과 법의 보호가 없는 일들. 위험과 함께한 세월을 느낀다. 세상은 좋아졌을까? 1년동안 2천명 이상이 산재로 사망한다. 베테랑들은 오히려 위험을 감내하고 피곤을 참아낸,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은, 어찌보면 운이 따랐던 삶을 살았다 말할 수 있다.

 

베테랑이 되어가면서 같이 사는 방법을 배운다. 세신사들은 인기에 따라 모든 것이 정해지지 않도록 돈을 똑같이 나눴고, 경마장에서는 성과금의 일부를 모아 서로의 월급에 보탰다. 어촌에서는 서로 돌아가며 그물을 던졌다. 결국 ‘같이 사는’ 일이다. 이것이 베테랑들의 삶이 전해주는 또다른 지혜가 아닐까.


"늘 인터뷰 마지막엔 베테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물었는데, 그럴 때면 그들은 각자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관계, 성실, 연대, 인간다움, 가능성. 그걸 듣는 순간이 좋았다." (P.330)


가치를 잃지 않고 사는 삶, 그것이 베테랑이 되는 자리까지 이끌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선 땀 냄새보다는 몽글몽글 피어나는 희망과 세월과 함께 굳어진, 단단한 의지가 느껴진다.


사진과 함께 그들의 삶을 읽어내려가다 보면 우리 주변이 다르게 보인다. 나는 어떤 의지를 갖고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일하고 또 살아갈까. 베테랑이 된다는 것은 사전의 정의처럼 그저 오래일하고, 잘하기만 해서 되는게 아닐 것이다.

*한겨레 출판에게 책을 제공받았고 솔직하게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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