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사람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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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나무 이야기로 시작한다.

마주 보며 자라나던 두 나무가 있었는데, 한 나무가 인간에 의해 잘려나간다. 다른 나무는 잘린 나무가 다시 자랄 수 있도록 햇빛을 가리는 자신의 부분을 죽여나갔고, 결국 그루터기에서 움튼 싹은 작은 나무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내 사람들이 그 큰 나무마저 베어버렸다. 자라난 작은 나무는 잘려나간 나무를 살리려고 했지만 힘이 없었고, 잘린 나무는 썩어 흙으로 돌아갔다.

 

"되살아난 그는 되살리는 존재, 그는 그 자리에서 사람에게 파괴된 적이 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사람을 파괴한 적이 있다." (p.21)

이어지는 것은 장미수와 신복일, 그리고 그들의 5명의 자식 일화, 월화, 금화, 목화, 목수 가족의 이야기다.

 

5남매는 어릴 적부터 누가 누구 편인지 나누며 '우리'란 무엇인가를 배워갔다. 월화는 백일장에서 1등을 할 만큼 글을 잘 썼고 음악과 노래를 좋아했고 인기가 많았다. 일화는 운명을 노력으로 이기고 싶어서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열심히 공부했다. 금화는 이런 잘난 가족들을 닮고 싶었다. 그러나 엄마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라고 말했다. 그 사이에서 금화는 외로움을 탔다. 다른 가족과 달리 홀로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금화와 쌍둥이 동생인 목수와 목화가 산을 올랐는데, 나무가 기울어 금화가 깔려버렸다. 놀란 쌍둥이 동생들은 어른을 찾아서 도와달라고 요청하지만 어른과 함께 돌아오니 금화가 사라져 있었다. 사람들은 쌍둥이의 증언을 비현실적이라 생각해 믿지 않았고, 이후에 온 가족은 금화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쌍둥이가 말한 사실은 "나무가 쓰러졌고 금화가 깔렸고 다시 나무가 쓰러졌고 목수가 깔렸고 그사이 금화는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목화는 꿈이면서도 현실 같은 일을 계속해서 경험한다. 사람들이 투신을 하고 교통사고를 당한다. 그리고 어떤 목소리가 그들을 구하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죽음의 순간에 있었다. 목화는 그들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사람만 구할 수 있었다. 그 공간은 "어떤 틈과 같은 것. 꿈과 현실의 균열, 어긋나는 지점 또는 미세하게 맞닿은 선, 증명할 수 없으나 존재하는 세계, 가능성으로 남아 인식 너머에 존재하는 사건"같은 것이었다. 목화는 계속되는 이런 상황 속에서 금화를 찾아내서 금화를 구하고 싶었다. 금화는 죽지 않고 어딘가에 존재하며 살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목수를 그 사건 당시에 누군가 자신처럼 살린 게 아닐까 생각했다.

 

목화가 이 꿈같은 상황에서 울면서 깨어났다. 그 모습을 본 엄마 장미수가 다가왔다. 목화는 엄마에게 그런 꿈을 꾼 적이 있냐 물었고 엄마는 그 능력이 무엇인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장미수는 15살부터 사람을 구했고 목화와 같은 일을 계속해서 겪었다.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는 일. 그중 단 한 사람만을 살릴 수 있는 일. 그보다 더한 지옥이 있을까?" 명령을 무시하고 사람을 구하지 않으면 매우 큰 두통이 일어났다. 그녀는 계속해서 소환당하면서도 열심히 공부해 간호사가 되었고 남편과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 그런데, 아이를 갖고 있는 동안에는 그 소환이 멈췄다. 그렇게 다산은 오히려 고통을 멈추고자 하는 의지의 산물이 되었다. 하지만 출산 후에 다시 소환이 이어졌다.

 

그녀 또한 엄마인 임천자에게 이야기했지만, 그녀는 뒤늦게서야 그 사실을 말했다. 다른 자식들은 이 일을 겪지 않았다. 선택받은 사람만이 이 일을 겪는 것이었다. "왜 나인가" "어째서 나인가" 미수도 계속해서 소환되고 있었다. "미수는 소환될 때마다 절절매며 신에게 빌었다. 내 딸을 찾아달라고, 생사라도 알려달라고", "신은 부당했다."

 

"이제 중요한 이야기는 바로 이것이다. 임천자의 기적장미수의 악마신목화의 목표인 신은 무엇인가."

미수는 금화의 실종에 신이 관여했다고 믿었다. "목화는 첫 소환부터 목소리와 동시에 나무를 느꼈다" 미수는 이 셋의 경험이 전부 다르며 명령하는 존재가 하나가 아닐 수 있음을 말한다.목화는 세 가지 목표가 있다고 한다. 첫째, 알아내는 것, 둘째 통과하는 것, 셋째 증명하는 것이다.

 

소환하는 존재가 무엇을 원하는지, 또 사람을 살리는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왜 자신이 선택된 것인지를 알아가려는 것이 아닐까. 이 소설에서 관통하고 있는 주제는 분명 생과 사의 경계다. 이것이 신적인 존재란 무엇이며 살린다는 능력이란 무엇인지를 물으면서 다양한 주제가 엮인다.

 

누군가는 살려진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그 존재는 다시 누군가를 살리는 존재가 되는 것일까. 만약 목화가 살려진 존재라면 그는 누군가를 또 살릴 수 있을 것이다. 목화는 나무를 느꼈다. 자신을 소환하는 대상을 나무로 느낀 것이다. 그것이 금화를 덮쳤던 나무일지도, 우리가 어떤 한 사람을 향해 바치는 인생이 그런 모양일지도 모르겠다. 무엇이 됐든 생명은 선택받은 것의 결과다.

 

인간이 나무를 잘라냈고, 나무는 그 인간에게 저주를 내린 것일 수 있다. 앗아가는 만큼 살릴 수 있게 하는 것, 그럼으로써 배우게 하는 것. 모든 생명체에겐 자라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가져갈 때 생각 없이 앗아가려는 그 사고를 비판하는 것일까. 고유한 인생은 인간에 의해 하나하나 베이는 숲속의 나무의 모습과도 겹친다. 다른 나무를 키워내는 것도 또 다른 나무의 의지이듯, 이 소설에서는 연결된 인간의 모습이 보인다.

 

"수많은 죽음 앞에서는 살아 있음 자체가 비정상이었다."

수많은 죽음 앞에서 한 사람만 구할 수 있다는 것, 누군가는 분명 선택받은 존재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것이 죽음에서 구해졌다는 것으로 대표되지만, 그 상황은 다른 곳에도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구하거나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축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인의 죽음 앞에서 특정 인물을 골라야 하는 것이라면 그 의미는 달라진다. 그것의 무게는 어떻게 짐작하며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까. 저자가 어떤 의미의 생과 사를 말하고 있는 것인지 곱씹어 본다.

 

나무의 이야기와 그 나무를 인간들이 베어가며 숲이 사라지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단순히 인간의 탐욕이나 잔인함을 보여주는 것인가 생각하게 했지만, 그 이후의 내용을 읽으면서 고유한 생명과 죽음, 또 한 생명을 위한 사랑과 보살핌, 인간의 관계란 무엇인가 묻게 되며 다양한 상상을 하게 했다.


* 서포터즈 활동으로, 가제본 도서를 제공받아서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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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무삭제 완역본) - 현대판 프로메테우스 현대지성 클래식 37
메리 셸리 지음, 오수원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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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프랑켄슈타인>은 로버트 월턴이 누나인 새빌 부인에게 쓰는 편지로 시작된다. 월턴은 항해 사업을 하기 위해 배를 빌리고 선원들을 모집해 북쪽으로 항해를 떠난다. 그는 항해하는 과정에서 한 이방인,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을 만난다. 윌턴은 평생 진정한 친구를 찾아 나섰는데, 그 이방인이 자신이 꿈꾸던 친구의 모습에 적합했고 그와 나눈 이야기를 새빌 부인에게 편지 보내면서 내용이 전개된다.

 

"프랑켄슈타인"이라고 하면, 보통 얼굴에 못이 박혀있고 때론 초록색 피부를 가지고 있는, 흉측한 모습을 한 괴물의 이미지로 묘사된다. 하지만 이는 와전된 프랑켄슈타인 이야기인데, 메리 셸리의 원작 <프랑켄슈타인>은 과학자 프랑켄슈타인이 이름 없는 괴물을 만들어내고 그 괴물이 인간을 위협하는 내용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미지는 프랑켄슈타인이 아니라 그가 만든 괴물을 형상화 한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은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지에 따라 굉장히 다른 해석을 낳는다. 먼저 과학자의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고, 괴물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출 수 있으며, 여성의 삶이나 전체적인 틀에서 바라볼 수 있는, 정말로 다양한 관점을 통해 다양한 분석을 할 수 있다.

 

어린 학생이었던 프랑켄슈타인은 무엇이든 배우는 것을 좋아했다. 많은 것을 배우며 자연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불멸의 묘약"이었다. 그는 현대 과학에 흥미가 없었다. 그가 유학을 가서 만난 크렘페 교수는 그런 그를 비판했지만, 포용적인 발트만 교수를 만난 후 화학 연구에 매달린다. 어느 정도의 지적 경지에 오르자 그는 인체와 동물의 신체구조에 관심을 갖게 되어 생리학 연구에 몰두하며 죽음을 연구한다. 본격적으로 불멸의 대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불멸을 위한 광기를 가지고 연구한 끝에 프랑켄슈타인은 생명 발생의 원인을 알아낸다. 생명 없는 물체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프랑켄슈타인은 인간의 신체능력을 뛰어넘지만 매우 흉측한 모습의 괴물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괴물이 탄생한다. 흉측한 괴물을 마주한 프랑켄슈타인은 도망간다.

 

어느 날 동생 윌리엄이 죽었다. 그리고 그의 목걸이를 가지고 있었던 하녀 유스틴이 범인으로 지목되어 유죄판결을 받는다. 억울한 유스틴은 결백을 주장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후에 밝혀지지만 이 모든 것은 괴물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이 벌인 일이라 확신하고 괴물을 없애버릴 것이라 다짐한다.

 

2부는 괴물에게 초점이 맞춰져 진행되면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의 특징이 부각된다. 괴물은 이름조차 없는 존재였으며 존재 그 자체로 존중받지 못했다. 그렇기에 '정체성'에 대한 질문들이 잇따른다. 산에 오른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만나게 되는데, 프랑켄슈타인은 윌리엄을 죽인 괴물에게 분노를 쏟아내고 괴물은 그동안 겪었던 일과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나는 당신의 아담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타락한 천사가 되어버렸소"

 

둘의 대화에서 자신의 창조물(괴물)을 비난하는 창조주(프랑켄슈타인)의 모습이 나타난다. 여기서 존재의 악함과 추함을 배격하고 처벌하려는 신앙관이 겹쳐진다. 존재의 근원이 악할 수밖에 없는 기독교적 인격관으로도 볼 수 있다. 인간이란 추하고 악함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인가? 창조주에게 복종하고 평생 악을 배격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인 것인가. 괴물의 삶을 비난하기엔 그에게 삶은 너무나 가혹했고, 잘 살고자 노력했지만 사람들에게 차별과 상처를 받았다.

 

괴물은 방황을 거듭하다 한 마을에 도착해 오두막에서 몰래 살게 된다. 그곳에서 가난하지만 사랑하며 사는 한 가정을 보게 되고 그들을 몰래 도우며 언어와 문화를 배운다. 이후에 용기를 내어 눈이 보이지 않는 노인과 말을 섞지만, 이내 들어온 그의 가족에 의해서 쫓겨나게 되고 그 가족은 괴물을 피해 마을을 떠나버린다. 괴물은 더욱 슬픔에 빠져 방황하다 사람들을 돕지만 되려 총을 맞는다. 순수할 거라 믿었던 아이마저 자신을 욕하는데, 그 아이가 프랑켄슈타인의 가족인 것을 말하자 흥분해 죽인다. 그리고 지나가던 아가씨의 옷에 아이의 목걸이를 넣는다. 그 아이는 프랑켄슈타인의 동생 윌리엄이었고, 이것이 윌리엄 사망사건의 전말이었다.

 

괴물이 방황하면서 읽은 책들이 언급되는데, 그 책들은 <실낙원>,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창조주에 의해 태어난 괴물이라는 존재가 타락하는 과정을 실낙원에 빗댄 것으로 보인다. 괴물이 살아가는 곳은 낙원이 아니라 지옥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속에서의 비극의 주인공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다양한 이야기 속에서 공정하고 정의로운 인물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을 포용해 줄 세상을 원했을 것이며, 베르테르의 슬픔과 외로움, 고뇌의 감정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또다른 이성에 대한 욕망을 갖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저주스러운 창조자! 어째서 당신조차 역겨워 등을 돌릴 만큼 흉악한 괴물을 빚었습니까? 신은 연민을 갖고 자기 모습을 따라 아름답고 매혹적인 존재로 인간을 창조했소. 그러나 내 모습은 당신의 추악한 부분을 닮았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끔찍하오. 사탄에게는 그를 숭배하고 격려해줄 동료 악마들이 있었지만, 나는 고독할 뿐 아니라 혐오의 대상일 뿐이오." (p.166)

 

이 발언에서 <프랑켄슈타인>만의 차별점이 부각된다. 보통은 조물을 외적으로도 아름답거나 과학적, 효율적으로 완벽한 이상향으로 만들지만 여기서의 조물은 그저 불사의 특성만을 투여시킨, 흉악하게 생긴 괴물의 형상이었다. 이 발언에서는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선천전 특징으로 차별받은 인물이 자신 그대로 인정받고 하는 욕망이 나타나며 그런 그의 마음은 인간과 다르지 않음이 나타난다. "신의 추악한 부분을 닮았"다는 발언은 인간의 추악한 내면을 외적으로 형상화한 것을 암시할 수도 있다. 그런 내면을 가진 인간은 숭배 받을 사탄이 존재한다.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을 만나서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이성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다. 이성을 만들어주면 먼 곳으로 떠나 평화롭게 살겠다고 약속한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창조한 나는 힘닿는 한 그를 행복하게 할 의무가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며 고민한다. 흥미로운 것은 기존의 지배적인 기독교관과 상충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여기서의 창조주, 즉 신은 조물주는 벌주고 타박하는 존재가 아니라, 조물을 행복하게 하고 즐거운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창조주는 조물을 아끼고 사랑할 의무가 있는 것인가.

 

"유대와 사랑이 없다면 내게 남은 몫이란 증오와 악덕 뿐이오" (p.180)
괴물의 호소에 마음이 흔들린 프랑켄슈타인은 괴물 여성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한다. 

프랑켄슈타인은 스코틀랜드의 외진 곳에서 괴물과 약속한 일을 하는데, 첫 실험 때는 광기에 눈이 멀어 끔찍한 실험의 실체를 보지 못했으나 지금은 그 과정에 메스꺼움을 느끼며 작업한다. 옛날에 호기심 가득 찼던 모습은 사라지고 스스로 "벼락을 맞아 말라 죽은 나무"가 되었다고 말한다. 새로운 존재를 창조하기 직전 주인공은 생각에 빠지는데, 괴물 여성을 만드는 것이 옳은 행위인지 고민한다. 괴물은 그 존재로도 무섭고 해로운 존재이기도 하지만 둘이서 종족을 번식하여 인간을 위협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괴물과 약속한 것이 얼마나 사악한 것인지 깨달은 프랑켄슈타인은 새로운 존재를 찢어버리며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그 모습을 본 괴물은 분노하며 프랑켄슈타인에게 찾아가 왜 그랬는지 묻는다. 그러자 프랑켄슈타인은 분노하며 자신은 괴물을 창조했고, 괴물은 노예며 자신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괴물은 맞받아치며 프랑켄슈타인을 저주하고 협박하며 복수를 다짐한다. 괴물은 결혼식 날 밤에 그를 찾아갈 것이라 말하며 사라진다.

 

프랑켄슈타인은 꿈에 그리던 엘리자베스와의 결혼식을 올린 후 여행을 가지만 그날 밤 엘리자베스는 괴물에 의해 살해당한다. 충격받은 프랑켄슈타인의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사망한다. 동생 윌리엄, 하녀 유스틴, 친구 클레르발, 연인 엘리자베스, 아버지 모두 자신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한 프랑켄슈타인은 큰 분노와 슬픔에 빠진다. 프랑켄슈타인은 복수를 다짐하며 계속해서 괴물을 추적한다. 그렇게 북쪽으로 계속해서 괴물을 쫓다 위급한 상황에 빠지자 월턴에 의해 구출된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쫓으며 건강이 매우 나빠졌고, 병상에서 월턴에게 그동안의 이야기들을 한다. 자신이 광기로 분별을 잃은 상태에서 이성적인 존재를 창조했고, 이제는 '이성'과 '미덕'의 관점에서 괴물을 없애달라고 요구한다. 프랑켄슈타인은 결국 숨을 거두고, 괴물은 몰래 죽은 그를 보러 오지만, 월턴은 그를 불러 세우고 대화를 나눈다.

괴물은 이제 최북단으로 가서 스스로를 태워 죽이겠다고 말한다.

그렇게 사라지고 소설은 끝이 난다.

 

존재 자체로 고통인 삶은 죽음으로써 해방되는 것일까? 차별을 조장하는 사회는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해답으로 여긴다. 환영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대응할 힘이라도 있는 존재는 타락하고, 일말의 힘조차 없는 존재는 소멸한다. 이들이 차별받았다는 이유로 그 사회에 해를 끼친다면 그들은 이해받을 수 있을까. 만약 괴물에게 유대와 사랑이 존재했다면, 이런 결말에 다다를 수 있었을까. 괴물이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던 생물은 인류 환대의 또 다른 형상일지도 모르겠다. 유대와 사랑이 없는 사회에서 괴물이 된 이들이 존재한다. 그는 외로웠다. 육체 이전에 정신적으로. 마음으로.

 

해제에서는 저자 메리가 당시 산업혁명의 주제인 "과학적 에너지 활용", 특히 갈바나의 생체전기 실험에 큰 관심을 보였다고 말한다. 그래서 <프랑켄슈타인>은 "당시 과학자들의 생명 창조에 대한 고민을 배경으로 하는 셈"이다. 그러나 그가 단순히 인간을 넘어선 능력을 가진 존재를 탄생시키는 현대의 관점의 SF 소설을 구상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조물을 흉악하게 만들어 미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 욕망을 충족시키지 않았음과 더불어 괴물 그 자체도 감정이 없이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프랑켄슈타인>은 낙관으로 가득 차 희망차게 발걸음을 내딛지만 결과물에 대해 버거워 하는 현대 과학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과학자는 괴물에게 생김새가 비슷한 이성을 만들어 준다고 말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인간의 무조건적 낙관과 영악함, 결과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무책임함을 비꼬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과학의 끝, 생리학과 공학의 끝은 인간 불사인가 물을 수 있다. 박사 프랑켄슈타인은 죽음을 극복하고 창조의 지위에 오르려는 인간 욕구의 대변인이었다. 신이 되려는 욕망과 미래를 낙관하는 인간의 특성까지 모두 담겨있는 인물이다. 자신이 만든 생명체를 되려 두려워하고 악마화하며 책임지지 않는다.

 

괴물 개인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자신을 부정하고 차별하는 세상에서 사회적 소수자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 아무리 선의를 가지고 노력해도 사람들은 외관을 보고 차별한다. 그 자체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란 어떤 세상을 살아가는가. 그의 타락은 세상이 만든 것이었다. 감정을 느끼는 존재는 최소한의 보살핌을 요구했고, 인간은 창조한 것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했다.

 

존재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면 그것을 만든 신 혹은 창조주의 역할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기존에 지배적인 기독교관은 죄를 갖고 태어난 인간이 죄를 씻어내며 구원을 받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바탕에서 기본적으로 신이란 인간에게 벌을 주며 인간의 잘못을 고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먼저 신이란 분노하고 벌주는 존재인지 사랑하고 보살피는 존재인지 의문을 가질 수 있고, 신의 모습에 다가서려는 인간이 만들어낸 조물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인간의 '창조관'은 어떤 것인가. 조물은 노예의 모습을 띄고 모든 욕망을 억제해야 하며 스스로를 탓해야 하는 걸까. 창조주는 자신의 책임을 지워버린다. 창조주의 책임이라는 것이 애초에 지배와 복종이라는 구조 아래서 굉장히 모욕적인 단어일지도 모르겠다.

 

괴물의 외모를 두려워하는 인간의 모습은 인간의 미와 추를 구분하는 사고 혹은 본능으로 이어지는데, 소설 속 인간들은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 존재로 묘사된다. 어린아이조차도 괴물을 끔찍하다 여겼다. 괴물의 모습은 생리학적 이상의 실현이었지만 미적 실현은 아니었다. 과학자가 맞춘 초점은 불멸이었다. 미와 추를 나눠 차별하는 인간은 본능적 두려움조차 극복하지 못하면서 어떤 이상을 추구하고 성취할 수 있을까. 이 모습은 이성을 만들어 달라는 괴물의 요청을 들으며 동정과 위로를 느끼다가 흉측한 몸집을 보고 두려움과 증오심을 느끼는 프랑켄슈타인의 모습에서 잘 나타난다. 눈먼 노인은 괴물을 한 인격으로 대했다. 눈을 뜬 사람과 눈이 먼 사람이 대비된 것이다. 인간의 그 잘난 미적 해석의 능력은 존재의 가치를 정확히 평가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

 

인간은 한계를 갖고 있는 존재다. 물리적으로든 이성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물리적 불멸을 꿈꾸는 인간에게 한편으론 감정적인 한계는 왜 극복하지 않으려 하나 질문하기도 한다. 감정을 없애는 것이 이상적인 것일까?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관점에서 봤을 때 감정을 극대화하는 것 또한 인간 이상에 다가서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인간 본연의 특성이란 무엇이며 인간의 부족한 특성을 극대화해 완벽한 존재를 만드는 것에 필요한 조건이란 무엇인가. 감정적인 요소를 넣은 조물의 모습은 소설의 한계라고 봐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기술적 '완벽'의 산물은 아니었다. 괴물은 감정까지 느낄 수 있는, 인간 대부분의 특성을 공유하면서도 그 신체적, 물리적 특성을 극대화 한 '인간을 닮은' '완벽한 조물'을 만들고자 하는 인간 욕구를 나타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메리 셸리가 질문하는 것 중 하나가 인간의 감수성이란 무엇이며 어떤 역할을 하느냐다.

 

"아아! 대체 왜 인간은 짐승보다 감수성이 우월하다고 뽐내는 것일까요. 그것때문에 더 의존적인 존재가 되었을 뿐인데 말입니다. 인간의 충동이 배고픔과 목마름과 성적 욕망에만 있다면 다른 것에 의존할 필요가 거의 없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텐데요." (123p)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을 통해 인간과 괴물의 차이는 무엇인가 묻는다. 괴물에게 이름이 없었던 것은 인간 그 스스로를 지칭하는 것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괴물이라고 지칭하는 모습은 인간 스스로의 추한 모습을 비난하는 것일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추함을 타자화하고 형상화하여 그것을 비난한다. 욕망을 한가득 집어넣고, 예쁘지 않다고 그저 버리는 괴물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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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의 몸 - 일의 흔적까지 자신이 된 이들에 대하여
희정 글, 최형락 사진 / 한겨레출판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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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 어떤 분야에 오랫동안 종사하여 기술이 뛰어나거나 노련한 사람] 

사전적 정의다. 우리가 장인, 전문가라 부르는, 자신의 분야에서 경지에 오른 이들이다. 베테랑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까. 노동을 거듭한 몸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또 어떤 이야기를 닮아 변해있을까. 작가 희정은 그들을 인터뷰한다. 베테랑이란 무엇인가를 물으며 대화한 기록을 남겼다.


세공사 김세모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어릴 적 지인 소개로 작업장에 들어간 김세모는 작은 통나무 위에서 노래를 불러야했다. 그렇게 신고식을 치렀다. 배우는 것은 알아서, 눈치껏 배워야 했다. 남들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며 버티며 결국 기회를 얻어 일을 시작했다. 하루 15시간 일을 했다.

 

귀금속에 광을 낸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업계에서는 누가 한 지 알 정도다. 날카롭게 돌아가는 휠에 금속을 갖다 댄다. 힘 조절을 잘해야 한다. 마지막 단계인 광 작업에서 불량이 나면 앞선 모든 작업들도 날아가는 거다.

 

기계의 발전으로 이제는 더욱 복잡하고 세밀한 작업을 해야 한다. 손가락 서너 개로 휠의 회전력을 감당하는 손목은 휘고 어깨는 말려있다. 허리 디스크가 있지만 그러려니 한다. 세공작업에는 유해 물질이 가득하지만 건강을 생각할 틈이 없다.


"열심히 하면 되니까요. 열심히 하는 걸 못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가 하는 말이다. 열심히, 꾸준히. 그게 쌓여 몇년, 십수년이 넘는다. 열심히 하는 것, 쉽게할 수 있는 것일까? 베테랑들에게는 나름의 자부심과 즐거움이 있었다. 다들 어쩌다 보니 오래 일하고, 베테랑이 되었다고 말하지만 그 순간순간을 그저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조리사 하영숙은 초등학교 급식실에서 일했다. 2000명이 넘는 사람의 밥을 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옛날에는 기계도 없었다. 당연히 몸은 천근만근이지만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보람을 느낀다. 음식 하나하나에는 고려할 것이 많고 계산해야 할 것이 많다. 먹는 사람의 취향, 특성까지 고려한다.

 

하영숙은 살아남기 위해 노조도 가입하며 정말로 열심히 살았다. 육아를 하며 자격증을 땄다. 이는 그 시절 어머니들의 몫이었다. 우리는 베테랑이라는 단어로 삶을 단순히 짐작할 수 있을까. 그녀는 회계 일이 하고 싶었지만 타인을 위해 고생하며 살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래도 잘 살았다" 말한다. 자신만의 가치를 쫓는 의지가 보인다.​

 

로프공 김영탁은 대학 졸업 후 돈을 벌기 위해 청소 업체를 차렸다. 젊으니 줄을 타보라는 권유에 연고 없는 대전에서 먹고 자며 3개월을 배웠다. 지금은 실리콘 보수 작업을 한다. 로프공들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추락을 생각하지만 떨어지지 않을 거라 믿는다. 로프공들의 추락사 소식이 들려온다. 그것을 듣는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심지어 주민이 방해된다고 줄을 잘라버려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놀이 기구도 무서워 못 타는 그는 어쩌다 보니 로프공이 되어있었다. 어쩌다 보니, 먹고살기 위해. 그것이 베테랑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었다.


세신사 조윤주는 월 300이라는 당시로선 큰 금액을 준다는 말에 시작했다. 물에 불은 손이 때수건과 계속해서 비벼졌다. 목욕탕에 자릿세를 내고 사람들의 때를 벗긴다. 안마사의 역할도 한다. '시원하게'밀어줘야 한다. 손맛에 따라서 인기가 판가름 난다. 처음이라면 눈물을 머금고 배워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

 

어부 염순애와 박명순, 조산사 김수진, 마필관리사 성상현, 수어통역사 장진석,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전시기획자인 전포롱, 연극 배우 황은후, 식자공 권용국은 몸을 던진다. 노동에 의해 몸이 변화한다. 보이지 않는 노동이 아름답게 보이는 세상을 만든다. 참 모순적이다.

 

베테랑의 삶은 스스로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삶이었다. 어쩌다 보니 일했고, 살아야 하니 계속했고, 그저 재밌어서 했다. 그들은 자신만의 삶과 기술을 만들어갔다. 기술자의 세계에선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그들의 직업은 안전뿐 아니라 안정을 보장하지 않았다. 우리가 베테랑을 바라볼 때 노동의 위대함을 보지만 그 뒤에는 그들이 버텨왔던 시간과 고통, 또 변화하는 몸이 있었다.

 

세공, 급식, 외벽청소 전문교육과 법의 보호가 없는 일들. 위험과 함께한 세월을 느낀다. 세상은 좋아졌을까? 1년동안 2천명 이상이 산재로 사망한다. 베테랑들은 오히려 위험을 감내하고 피곤을 참아낸,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은, 어찌보면 운이 따랐던 삶을 살았다 말할 수 있다.

 

베테랑이 되어가면서 같이 사는 방법을 배운다. 세신사들은 인기에 따라 모든 것이 정해지지 않도록 돈을 똑같이 나눴고, 경마장에서는 성과금의 일부를 모아 서로의 월급에 보탰다. 어촌에서는 서로 돌아가며 그물을 던졌다. 결국 ‘같이 사는’ 일이다. 이것이 베테랑들의 삶이 전해주는 또다른 지혜가 아닐까.


"늘 인터뷰 마지막엔 베테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물었는데, 그럴 때면 그들은 각자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관계, 성실, 연대, 인간다움, 가능성. 그걸 듣는 순간이 좋았다." (P.330)


가치를 잃지 않고 사는 삶, 그것이 베테랑이 되는 자리까지 이끌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선 땀 냄새보다는 몽글몽글 피어나는 희망과 세월과 함께 굳어진, 단단한 의지가 느껴진다.


사진과 함께 그들의 삶을 읽어내려가다 보면 우리 주변이 다르게 보인다. 나는 어떤 의지를 갖고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일하고 또 살아갈까. 베테랑이 된다는 것은 사전의 정의처럼 그저 오래일하고, 잘하기만 해서 되는게 아닐 것이다.

*한겨레 출판에게 책을 제공받았고 솔직하게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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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리에 대하여
해리 G. 프랭크퍼트 지음, 이윤 옮김 / 필로소픽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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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턴대 철학과 교수인 프랭크퍼트는 '개소리'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시도한다. 그는 여기서 수사학적 이용 및 악용을 다루지는 않는다. 그는 이 책의 목적으로 "개소리의 본질이 무엇이고, 개소리가 아닌 것과 개소리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을 제시하는 것"이라 말한다.

 

초반에는 개소리와 의미가 가까운 '협잡'의 의미란 무엇인지 논하면서 맥스 블랙의 정의를 가져온다. 맥스 블랙은 다음과 같이 형식적 정의를 제안한다. <협잡:누군가가 자신의 생각, 느낌 또는 태도에 대해 특히 허세 부리는 말 또는 행동을 통해 기만적으로 부정확하게 진술하는 것으로 거짓말에는 미치지 못함.> 하지만 프랭크퍼트는 이 정의에 만족하지 못하는데, "개소리에 대해서도 그것이 거짓말에 미치지 못하며, 또한 개소리를 하는 사람은 자신에 대해 어떤 식으로 부정확한 진술을 한다고 말하는 것은 옳다."(p.24)라고 말하고 있지만 개소리의 설명에서 중요한 점을 빗겨나가 개소리의 본질적 특성을 잡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비트겐슈타인의 개소리 혐오를 이야기하며, 그와 관련된 한 일화를 소개한다. 편도선 제거 수술을 하고 요양원에 있던 파스칼은 비트겐슈타인을 만나자 자신의 처지를 "차에 치인 개가 된 느낌"이라 말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당신은 차에 치인 개가 무엇을 느끼는지 알 수 없소"라며 이것이 개소리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파스칼이 자신의 상태를 너무 구체적으로 묘사했고, "실제를 묘사한다는 기획의도가 담겨있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비트겐슈타인이 파스칼을 꾸짖은 것은 바로 이 생각 없음 때문이다." (p.35) 핵심은 "파스칼이 현실을 정확하게 묘사하려 할 때 요구되는 제약에 성실히 따르지 않은 채 어떤 사태를 묘사 했다는 것"이다.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우리가 묘사를 할 때는 현실의 제약에 맞게 해야 한다. 하지만 그녀는 의도적 거짓 전파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기에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형식보단 저 생각 없음이 강조된다.

 

개소리의 본질은 사태의 진상이 실제로 어떠한지에 대한 무관심이다. 파스칼의 사례로 들면 차에 치인 개에 대한 실제적인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저 내 감정 혹은 상황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 표현의 비유에 그칠 뿐이었다.

 

저자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을 참조해 흔히 개소리라 불리는 'Bull Shit' 특히 접두사로 많이 붙는 Bull을 분석하는데, Bull은 대체로 진짜 목적에 기여하지 못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개소리의 특징은 무엇인가. 개소리는 거짓말보다 허세 부리기에 가깝다 말하고 있다. 본질이 거짓에 있지 않고 가짜라는 것에 있다. 거짓말의 본성에서 가장 중심적 개념은 '허위성'이지만 허세 부리기는 거짓이 아니라 '속임수'의 문제다. "개소리쟁이에게 유일하게 없어서는 안 될 독특한 특징은 그가 특정한 방식으로 자신의 속셈을 부정확하게 진술한다는 사실이다."(P.57) 저자는 이것이 개소리쟁이와 거짓말쟁이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라 강조한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진릿값을 알고 있어야 한다. 무엇이 진리인지 알아야 속일 것 아닌가. 또 진릿값이 존재한다는 것은 객관적 제약에 따라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개소리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보다 더 자유롭다. 그래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개소리의 작업은 보다 광범위하고 독립적이며 임기응변과 꾸며냄, 그리고 창의적인 연기의 여지가 많다. 이것은 들인 노력의 문제라기보다는 예술의 문제다."(p.58) 그렇다. 꾸며내는 것, 개소리는 예술의 경지다.

 

개소리쟁이에게 유일하게 없어서는 안 될 독특한 특징은 그가 특정한 방식으로 자신의 속셈을 부정확하게 진술한다는 사실이다. 속셈을 정확히 말하지 않는다. 내면의 의도를 드러내지 않고 진리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거짓말과 다른, 책임지지 않고 부끄럼도 없는, 속이기 위함 그 자체를 위한 것이다. 그저 자기 목적에 맞도록 그 소재들을 선택하거나 가공해낸다.

 

"말하는 사람의 입맛에 맞는 것 외에는 어떤 것에도 신경을 쓰지 않고 마구 주장하는 개소리 행위에 과도하게 탐닉하다 보면 사태의 진상에 주의를 기울이는 정상적 습관은 약화되거나 잃어버리게 된다." (P.63)

 

개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이것이다. 진상에 대한 탐구 정신을 말살시키고, 입맛에 맞게 휘둘려줄 수 있는 존재를 양성하는 것. 특히 정파적으로 굳어버린 사고를 원하는 것이다. 무섭지 않은가? 우리 작금의 사태다. 진리를 아는 것은 피곤한 일이 되어버렸다. 단순히 가볍고 짧게 생각해 말할 수 있는 것이 선호되었고, 빠르고 쉽고 자극적이고 효율적이고 충동적인 것들이 우대받는 현실이다. 그것을 삶을 잘 사는 처세술이니 뭐니 하면서 치켜세운다.

 

"진실과 거짓은 사물을 잘못 이해하는 것과 올바로 이해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며, 적어도 때로는 그 차이를 구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사물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있다는 사고가 남아있다면, 그것은 탐구로 이어지겠으나 그 사고 자체가 없으면 물을 흐리기만 한다. 이것이 저자가 이후에 말하는, 현대의 개소리가 넘쳐나는 이유임을 말하고 있다. 거짓말하는 쪽은 적어도 진리의 권위를 인정하지만, 개소리를 하는 쪽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개소리는 진리의 큰 적이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과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말하자면 같은 게임 속에서 반대편으로 활동한다. 그들 각각은 자신들이 이해하는 사실에 반응한다. 비록 한쪽의 반응은 진리의 권위에 따르고, 다른 쪽의 반응은 진리의 권위에 저항하며 그 요구에 맞추기를 거부하지만 말이다. 개소리쟁이는 이러한 요구를 모두 무시한다. 그는 거짓말쟁이와는 달리 진리의 권위를 부정하지도, 그것에 맞서지도 않는다. 개소리쟁이는 진리의 권위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이 점 때문에, 개소리는 거짓말보다 훨씬 더 큰 진리의 적이다." (P.64)

 

저자는 오늘날 개소리의 확산이 다양한 형태의 회의주의 속에 보다 깊은 원천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진실을 탐구하는 것을 무의미하다 생각하고 사회에서 개인으로 초점이 옮겨가 개인을 주장하는 시대가 되었다. 사실에 충실하지 않고 자신에 충실하면 된다는 사고. 그런데 인간이란 존재는 세계와 맞닿아 있어서 다른 것들을 알아야 우리를 알 수밖에 없는데, 절대적 세상의 진리는 존재하지 않은 사고를 가지면서 동시에 자신에 대한 진리를 주장하는 것이 말이 되는지 저자는 묻고 있다.

 

이런 비판을 가하기 이전에 저자는 개소리에 대한 설명에 들어서면서 우리에게 질문을 남겼다. "개소리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왜 일반적으로 거짓말을 대할 때보다 관대한가?" 라고. 저자는 진리의 관점에서 개소리가 거짓말보다 더 적대시되어야 한다 말한다. 거짓말보다 개소리를 경계하고 주의해야 한다. 개소리가 넘쳐나는 시대다. 저자는 개소리를 더 관대하게 대하는 사회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점점 가벼워지고 있다.

 

과거보다 더 넘쳐나는지 실증적으로 입증하기는 어렵겠지만 그 형태는 확실히 바뀌고 있다. 누구는 확증편향으로 얼룩진 사회가 미디어의 발달로 더더욱 늪으로 빠져간다고 말하지만 개소리를 걷어내지 못해 다 같이 침몰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걸 단순히 국민의 수준이니 비관하면서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고 싶진 않다. 하지만 굉장히 절망적이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책읽지 않고, 찾아보려는 습관이 없이 떠먹여주길 원하는 사회의 결말은 역사만 봐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책을 안읽으니 역사도 모를 것이 아닌가. 개소리에 대한 문제는 태도의 문제로 돌아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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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요새 - 사유의 미로를 통과하는 읽기의 모험
고명섭 지음 / 교양인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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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알 수록 복잡하고, 사람들은 세상을 다양하게 바라본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세상에 다양한 돋보기를 대보며 더 정확한 이해에 다다른다. <생각의 요새>저자 고명섭은 세계의 문학, 철학, 역사 등을 주제로 한 다양한 학자들의 사상과 최신 연구까지 포함한 '생각의 요새'들을 파고든다.


프랑수아 줄리앙은 "자신에 대한 자기적응에 균열을 냄으로써 '자아'의 마비에서 빠져나오는" 탈합치 개념을 창안했다. 리처드 도티<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에서 우연적인 사건을 거듭해온 사회가 자유주의라는 가장 좋은 사회를 만들었고,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며 잔인성을 최소화한 사회를 추구해야 함을 주장한다. 알랭 바디우는 정치, 과학, 예술, 사랑이라는 영역의 사건들에서 기존의 여론의 지배를 깨뜨리는 보편성을 창출하면서 진리가 출현하며 혁명 집단과 같은 세계 내부의 몸체에 개인들이 합류할 때 개인은 진리의 주체가 된다 말한다.


이와 같이 사유의 근본 사고를 건드리는 책들을 읽으면, 세상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틀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만나게 된다. 로티가 말하는 자유주의자들에겐 모든 것을 초월한 특정한 진리라는 것은 없으며 각자의 자기창조 활동을 이어나가며 세상을 발전시킬 뿐이다. 바디우는 자신을 주체로 일으켜 가장 완전한 이상을 마음에 품고 진리의 주체로 나아가는 삶을 참된 삶으로 보았다. 


세상에는 어떤 진리가 필요한 것일까? 그저 진리는 중요하지 않고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중요한가? 세상은 어떤 수식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일까?


사회라는 틀로 많은 현상들을 바라본 뒤르켐의 이야기와 그의 사고를 비판하면서, 총체적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마르셀 모스의 주장도 소개된다. 모스는 사회로 인해 신체의 기능이 바뀐다는 <몸 테크닉>을 저술하며 부르디외 이전의 아비투스 개념을 발견한다.


로고스주의를 바탕으로 개념을 나눠 한 쪽을 무시한 이분법을 바꾸고자 한 엘렌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와 남녀의 확실한 이분법을 나누는 운동을 비판하며 공생적 시각을 추구해 내부, 외부 모두에게 논쟁을 일으킨 도나 해러웨이의 이야기도 소개된다.


여기서 인간은 사회를 구성하는 그저 기능적 존재인가, 사회 구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존재인가 하는 질문과 사회가 작동하는 법칙과 관성적이고 불평등한 사회를 개선하기 위해 어떤 운동을 벌여야 하는가의 질문이 이어지게 된다.


이도흠의 <18~19세기 한국문학, 차이의 근대성>에서는 원효의 화쟁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원효는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아울러 더 큰 하나로 회통하는 방법을 내세웠다. 모든 존재는 서로의 영향을 받아 존재하는 것이며 통합의 관점으로 바라본다.


저자는 최신 우주연구에 대한 토니 로스먼<빅뱅의 질문들>설명에서 과학자들의 질문들이"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가 있는가?" 하는 질문으로 귀결된다."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과학과 철학의 경계가 지워진다 주장한다. 우리는 다양한 가설로 우주를 설명하듯 다양한 가설로 사회를, 세계를, 인간을 설명한다.


백낙청은 민주주의, 평등주의가 제대로 구현되려면 지혜의 등급은 필요하면서도 지혜의 질서는 고정되지 않고 역동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이 삶과 세계가 얼마나 넓게, 얼마나 깊게 통찰되느냐가 지혜의 등급을 가르는 기준이 될 것이다." 통찰의 수준에 따라 사회의 지혜가 달라진다.


<생각의 요새>고병권<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소개로 마무리하는데, 고병권은 민주주의는 제도라기보단 제도에 대응하는 힘의 표출로 인식하며, 대의제 강화와 완성을 목표로 내세우며 시민운동의 중요성을 내리치는 최장집의 저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비판한다.


하지만 이후에 대안으로 설명되는 고병권의 발언에서는 자아실현을 외치는 마르크스의 유토피아가 겹쳐 보인다. 결국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의지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언제나 그렇듯 구체성과 설계의 문제다. 인간은 여기서 수만 가지로 뻗어나간다. 헤겔과 같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까지도 다른 생각을 한다.


깊은 사유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서로의 영향을 받으며 때론 극단을 지양하며 사고의 통합을 추구했던 학자들의 이야기와 민주주의 논의로 마무리되는<생각의 요새>를 곱씹은다면 현재 사회에 함의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평생을 연구해온 이들의 생각과 노력을 작은 돈을 들여 손쉽게 들여다본다. 이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세계와 인간을, 현명한 삶의 방식을 더 잘 이해한다.




*읽고싶었던 도서인데 교양인 서평단에 당첨되어 제공받아 읽었다 감사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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