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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무삭제 완역본) - 현대판 프로메테우스 ㅣ 현대지성 클래식 37
메리 셸리 지음, 오수원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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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프랑켄슈타인>은 로버트 월턴이 누나인 새빌 부인에게 쓰는 편지로 시작된다. 월턴은 항해 사업을 하기 위해 배를 빌리고 선원들을 모집해 북쪽으로 항해를 떠난다. 그는 항해하는 과정에서 한 이방인,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을 만난다. 윌턴은 평생 진정한 친구를 찾아 나섰는데, 그 이방인이 자신이 꿈꾸던 친구의 모습에 적합했고 그와 나눈 이야기를 새빌 부인에게 편지 보내면서 내용이 전개된다.
"프랑켄슈타인"이라고 하면, 보통 얼굴에 못이 박혀있고 때론 초록색 피부를 가지고 있는, 흉측한 모습을 한 괴물의 이미지로 묘사된다. 하지만 이는 와전된 프랑켄슈타인 이야기인데, 메리 셸리의 원작 <프랑켄슈타인>은 과학자 프랑켄슈타인이 이름 없는 괴물을 만들어내고 그 괴물이 인간을 위협하는 내용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미지는 프랑켄슈타인이 아니라 그가 만든 괴물을 형상화 한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은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지에 따라 굉장히 다른 해석을 낳는다. 먼저 과학자의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고, 괴물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출 수 있으며, 여성의 삶이나 전체적인 틀에서 바라볼 수 있는, 정말로 다양한 관점을 통해 다양한 분석을 할 수 있다.
어린 학생이었던 프랑켄슈타인은 무엇이든 배우는 것을 좋아했다. 많은 것을 배우며 자연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불멸의 묘약"이었다. 그는 현대 과학에 흥미가 없었다. 그가 유학을 가서 만난 크렘페 교수는 그런 그를 비판했지만, 포용적인 발트만 교수를 만난 후 화학 연구에 매달린다. 어느 정도의 지적 경지에 오르자 그는 인체와 동물의 신체구조에 관심을 갖게 되어 생리학 연구에 몰두하며 죽음을 연구한다. 본격적으로 불멸의 대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불멸을 위한 광기를 가지고 연구한 끝에 프랑켄슈타인은 생명 발생의 원인을 알아낸다. 생명 없는 물체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프랑켄슈타인은 인간의 신체능력을 뛰어넘지만 매우 흉측한 모습의 괴물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괴물이 탄생한다. 흉측한 괴물을 마주한 프랑켄슈타인은 도망간다.
어느 날 동생 윌리엄이 죽었다. 그리고 그의 목걸이를 가지고 있었던 하녀 유스틴이 범인으로 지목되어 유죄판결을 받는다. 억울한 유스틴은 결백을 주장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후에 밝혀지지만 이 모든 것은 괴물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이 벌인 일이라 확신하고 괴물을 없애버릴 것이라 다짐한다.
2부는 괴물에게 초점이 맞춰져 진행되면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의 특징이 부각된다. 괴물은 이름조차 없는 존재였으며 존재 그 자체로 존중받지 못했다. 그렇기에 '정체성'에 대한 질문들이 잇따른다. 산에 오른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만나게 되는데, 프랑켄슈타인은 윌리엄을 죽인 괴물에게 분노를 쏟아내고 괴물은 그동안 겪었던 일과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나는 당신의 아담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타락한 천사가 되어버렸소"
둘의 대화에서 자신의 창조물(괴물)을 비난하는 창조주(프랑켄슈타인)의 모습이 나타난다. 여기서 존재의 악함과 추함을 배격하고 처벌하려는 신앙관이 겹쳐진다. 존재의 근원이 악할 수밖에 없는 기독교적 인격관으로도 볼 수 있다. 인간이란 추하고 악함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인가? 창조주에게 복종하고 평생 악을 배격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인 것인가. 괴물의 삶을 비난하기엔 그에게 삶은 너무나 가혹했고, 잘 살고자 노력했지만 사람들에게 차별과 상처를 받았다.
괴물은 방황을 거듭하다 한 마을에 도착해 오두막에서 몰래 살게 된다. 그곳에서 가난하지만 사랑하며 사는 한 가정을 보게 되고 그들을 몰래 도우며 언어와 문화를 배운다. 이후에 용기를 내어 눈이 보이지 않는 노인과 말을 섞지만, 이내 들어온 그의 가족에 의해서 쫓겨나게 되고 그 가족은 괴물을 피해 마을을 떠나버린다. 괴물은 더욱 슬픔에 빠져 방황하다 사람들을 돕지만 되려 총을 맞는다. 순수할 거라 믿었던 아이마저 자신을 욕하는데, 그 아이가 프랑켄슈타인의 가족인 것을 말하자 흥분해 죽인다. 그리고 지나가던 아가씨의 옷에 아이의 목걸이를 넣는다. 그 아이는 프랑켄슈타인의 동생 윌리엄이었고, 이것이 윌리엄 사망사건의 전말이었다.
괴물이 방황하면서 읽은 책들이 언급되는데, 그 책들은 <실낙원>,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창조주에 의해 태어난 괴물이라는 존재가 타락하는 과정을 실낙원에 빗댄 것으로 보인다. 괴물이 살아가는 곳은 낙원이 아니라 지옥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속에서의 비극의 주인공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다양한 이야기 속에서 공정하고 정의로운 인물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을 포용해 줄 세상을 원했을 것이며, 베르테르의 슬픔과 외로움, 고뇌의 감정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또다른 이성에 대한 욕망을 갖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저주스러운 창조자! 어째서 당신조차 역겨워 등을 돌릴 만큼 흉악한 괴물을 빚었습니까? 신은 연민을 갖고 자기 모습을 따라 아름답고 매혹적인 존재로 인간을 창조했소. 그러나 내 모습은 당신의 추악한 부분을 닮았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끔찍하오. 사탄에게는 그를 숭배하고 격려해줄 동료 악마들이 있었지만, 나는 고독할 뿐 아니라 혐오의 대상일 뿐이오." (p.166)
이 발언에서 <프랑켄슈타인>만의 차별점이 부각된다. 보통은 조물을 외적으로도 아름답거나 과학적, 효율적으로 완벽한 이상향으로 만들지만 여기서의 조물은 그저 불사의 특성만을 투여시킨, 흉악하게 생긴 괴물의 형상이었다. 이 발언에서는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선천전 특징으로 차별받은 인물이 자신 그대로 인정받고 하는 욕망이 나타나며 그런 그의 마음은 인간과 다르지 않음이 나타난다. "신의 추악한 부분을 닮았"다는 발언은 인간의 추악한 내면을 외적으로 형상화한 것을 암시할 수도 있다. 그런 내면을 가진 인간은 숭배 받을 사탄이 존재한다.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을 만나서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이성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다. 이성을 만들어주면 먼 곳으로 떠나 평화롭게 살겠다고 약속한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창조한 나는 힘닿는 한 그를 행복하게 할 의무가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며 고민한다. 흥미로운 것은 기존의 지배적인 기독교관과 상충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여기서의 창조주, 즉 신은 조물주는 벌주고 타박하는 존재가 아니라, 조물을 행복하게 하고 즐거운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창조주는 조물을 아끼고 사랑할 의무가 있는 것인가.
"유대와 사랑이 없다면 내게 남은 몫이란 증오와 악덕 뿐이오" (p.180)
괴물의 호소에 마음이 흔들린 프랑켄슈타인은 괴물 여성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한다.
프랑켄슈타인은 스코틀랜드의 외진 곳에서 괴물과 약속한 일을 하는데, 첫 실험 때는 광기에 눈이 멀어 끔찍한 실험의 실체를 보지 못했으나 지금은 그 과정에 메스꺼움을 느끼며 작업한다. 옛날에 호기심 가득 찼던 모습은 사라지고 스스로 "벼락을 맞아 말라 죽은 나무"가 되었다고 말한다. 새로운 존재를 창조하기 직전 주인공은 생각에 빠지는데, 괴물 여성을 만드는 것이 옳은 행위인지 고민한다. 괴물은 그 존재로도 무섭고 해로운 존재이기도 하지만 둘이서 종족을 번식하여 인간을 위협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괴물과 약속한 것이 얼마나 사악한 것인지 깨달은 프랑켄슈타인은 새로운 존재를 찢어버리며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그 모습을 본 괴물은 분노하며 프랑켄슈타인에게 찾아가 왜 그랬는지 묻는다. 그러자 프랑켄슈타인은 분노하며 자신은 괴물을 창조했고, 괴물은 노예며 자신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괴물은 맞받아치며 프랑켄슈타인을 저주하고 협박하며 복수를 다짐한다. 괴물은 결혼식 날 밤에 그를 찾아갈 것이라 말하며 사라진다.
프랑켄슈타인은 꿈에 그리던 엘리자베스와의 결혼식을 올린 후 여행을 가지만 그날 밤 엘리자베스는 괴물에 의해 살해당한다. 충격받은 프랑켄슈타인의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사망한다. 동생 윌리엄, 하녀 유스틴, 친구 클레르발, 연인 엘리자베스, 아버지 모두 자신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한 프랑켄슈타인은 큰 분노와 슬픔에 빠진다. 프랑켄슈타인은 복수를 다짐하며 계속해서 괴물을 추적한다. 그렇게 북쪽으로 계속해서 괴물을 쫓다 위급한 상황에 빠지자 월턴에 의해 구출된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쫓으며 건강이 매우 나빠졌고, 병상에서 월턴에게 그동안의 이야기들을 한다. 자신이 광기로 분별을 잃은 상태에서 이성적인 존재를 창조했고, 이제는 '이성'과 '미덕'의 관점에서 괴물을 없애달라고 요구한다. 프랑켄슈타인은 결국 숨을 거두고, 괴물은 몰래 죽은 그를 보러 오지만, 월턴은 그를 불러 세우고 대화를 나눈다.
괴물은 이제 최북단으로 가서 스스로를 태워 죽이겠다고 말한다.
그렇게 사라지고 소설은 끝이 난다.
존재 자체로 고통인 삶은 죽음으로써 해방되는 것일까? 차별을 조장하는 사회는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해답으로 여긴다. 환영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대응할 힘이라도 있는 존재는 타락하고, 일말의 힘조차 없는 존재는 소멸한다. 이들이 차별받았다는 이유로 그 사회에 해를 끼친다면 그들은 이해받을 수 있을까. 만약 괴물에게 유대와 사랑이 존재했다면, 이런 결말에 다다를 수 있었을까. 괴물이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던 생물은 인류 환대의 또 다른 형상일지도 모르겠다. 유대와 사랑이 없는 사회에서 괴물이 된 이들이 존재한다. 그는 외로웠다. 육체 이전에 정신적으로. 마음으로.
해제에서는 저자 메리가 당시 산업혁명의 주제인 "과학적 에너지 활용", 특히 갈바나의 생체전기 실험에 큰 관심을 보였다고 말한다. 그래서 <프랑켄슈타인>은 "당시 과학자들의 생명 창조에 대한 고민을 배경으로 하는 셈"이다. 그러나 그가 단순히 인간을 넘어선 능력을 가진 존재를 탄생시키는 현대의 관점의 SF 소설을 구상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조물을 흉악하게 만들어 미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 욕망을 충족시키지 않았음과 더불어 괴물 그 자체도 감정이 없이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프랑켄슈타인>은 낙관으로 가득 차 희망차게 발걸음을 내딛지만 결과물에 대해 버거워 하는 현대 과학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과학자는 괴물에게 생김새가 비슷한 이성을 만들어 준다고 말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인간의 무조건적 낙관과 영악함, 결과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무책임함을 비꼬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과학의 끝, 생리학과 공학의 끝은 인간 불사인가 물을 수 있다. 박사 프랑켄슈타인은 죽음을 극복하고 창조의 지위에 오르려는 인간 욕구의 대변인이었다. 신이 되려는 욕망과 미래를 낙관하는 인간의 특성까지 모두 담겨있는 인물이다. 자신이 만든 생명체를 되려 두려워하고 악마화하며 책임지지 않는다.
괴물 개인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자신을 부정하고 차별하는 세상에서 사회적 소수자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 아무리 선의를 가지고 노력해도 사람들은 외관을 보고 차별한다. 그 자체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란 어떤 세상을 살아가는가. 그의 타락은 세상이 만든 것이었다. 감정을 느끼는 존재는 최소한의 보살핌을 요구했고, 인간은 창조한 것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했다.
존재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면 그것을 만든 신 혹은 창조주의 역할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기존에 지배적인 기독교관은 죄를 갖고 태어난 인간이 죄를 씻어내며 구원을 받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바탕에서 기본적으로 신이란 인간에게 벌을 주며 인간의 잘못을 고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먼저 신이란 분노하고 벌주는 존재인지 사랑하고 보살피는 존재인지 의문을 가질 수 있고, 신의 모습에 다가서려는 인간이 만들어낸 조물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인간의 '창조관'은 어떤 것인가. 조물은 노예의 모습을 띄고 모든 욕망을 억제해야 하며 스스로를 탓해야 하는 걸까. 창조주는 자신의 책임을 지워버린다. 창조주의 책임이라는 것이 애초에 지배와 복종이라는 구조 아래서 굉장히 모욕적인 단어일지도 모르겠다.
괴물의 외모를 두려워하는 인간의 모습은 인간의 미와 추를 구분하는 사고 혹은 본능으로 이어지는데, 소설 속 인간들은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 존재로 묘사된다. 어린아이조차도 괴물을 끔찍하다 여겼다. 괴물의 모습은 생리학적 이상의 실현이었지만 미적 실현은 아니었다. 과학자가 맞춘 초점은 불멸이었다. 미와 추를 나눠 차별하는 인간은 본능적 두려움조차 극복하지 못하면서 어떤 이상을 추구하고 성취할 수 있을까. 이 모습은 이성을 만들어 달라는 괴물의 요청을 들으며 동정과 위로를 느끼다가 흉측한 몸집을 보고 두려움과 증오심을 느끼는 프랑켄슈타인의 모습에서 잘 나타난다. 눈먼 노인은 괴물을 한 인격으로 대했다. 눈을 뜬 사람과 눈이 먼 사람이 대비된 것이다. 인간의 그 잘난 미적 해석의 능력은 존재의 가치를 정확히 평가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
인간은 한계를 갖고 있는 존재다. 물리적으로든 이성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물리적 불멸을 꿈꾸는 인간에게 한편으론 감정적인 한계는 왜 극복하지 않으려 하나 질문하기도 한다. 감정을 없애는 것이 이상적인 것일까?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관점에서 봤을 때 감정을 극대화하는 것 또한 인간 이상에 다가서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인간 본연의 특성이란 무엇이며 인간의 부족한 특성을 극대화해 완벽한 존재를 만드는 것에 필요한 조건이란 무엇인가. 감정적인 요소를 넣은 조물의 모습은 소설의 한계라고 봐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기술적 '완벽'의 산물은 아니었다. 괴물은 감정까지 느낄 수 있는, 인간 대부분의 특성을 공유하면서도 그 신체적, 물리적 특성을 극대화 한 '인간을 닮은' '완벽한 조물'을 만들고자 하는 인간 욕구를 나타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메리 셸리가 질문하는 것 중 하나가 인간의 감수성이란 무엇이며 어떤 역할을 하느냐다.
"아아! 대체 왜 인간은 짐승보다 감수성이 우월하다고 뽐내는 것일까요. 그것때문에 더 의존적인 존재가 되었을 뿐인데 말입니다. 인간의 충동이 배고픔과 목마름과 성적 욕망에만 있다면 다른 것에 의존할 필요가 거의 없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텐데요." (123p)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을 통해 인간과 괴물의 차이는 무엇인가 묻는다. 괴물에게 이름이 없었던 것은 인간 그 스스로를 지칭하는 것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괴물이라고 지칭하는 모습은 인간 스스로의 추한 모습을 비난하는 것일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추함을 타자화하고 형상화하여 그것을 비난한다. 욕망을 한가득 집어넣고, 예쁘지 않다고 그저 버리는 괴물은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