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소리에 대하여
해리 G. 프랭크퍼트 지음, 이윤 옮김 / 필로소픽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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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턴대 철학과 교수인 프랭크퍼트는 '개소리'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시도한다. 그는 여기서 수사학적 이용 및 악용을 다루지는 않는다. 그는 이 책의 목적으로 "개소리의 본질이 무엇이고, 개소리가 아닌 것과 개소리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을 제시하는 것"이라 말한다.

 

초반에는 개소리와 의미가 가까운 '협잡'의 의미란 무엇인지 논하면서 맥스 블랙의 정의를 가져온다. 맥스 블랙은 다음과 같이 형식적 정의를 제안한다. <협잡:누군가가 자신의 생각, 느낌 또는 태도에 대해 특히 허세 부리는 말 또는 행동을 통해 기만적으로 부정확하게 진술하는 것으로 거짓말에는 미치지 못함.> 하지만 프랭크퍼트는 이 정의에 만족하지 못하는데, "개소리에 대해서도 그것이 거짓말에 미치지 못하며, 또한 개소리를 하는 사람은 자신에 대해 어떤 식으로 부정확한 진술을 한다고 말하는 것은 옳다."(p.24)라고 말하고 있지만 개소리의 설명에서 중요한 점을 빗겨나가 개소리의 본질적 특성을 잡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비트겐슈타인의 개소리 혐오를 이야기하며, 그와 관련된 한 일화를 소개한다. 편도선 제거 수술을 하고 요양원에 있던 파스칼은 비트겐슈타인을 만나자 자신의 처지를 "차에 치인 개가 된 느낌"이라 말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당신은 차에 치인 개가 무엇을 느끼는지 알 수 없소"라며 이것이 개소리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파스칼이 자신의 상태를 너무 구체적으로 묘사했고, "실제를 묘사한다는 기획의도가 담겨있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비트겐슈타인이 파스칼을 꾸짖은 것은 바로 이 생각 없음 때문이다." (p.35) 핵심은 "파스칼이 현실을 정확하게 묘사하려 할 때 요구되는 제약에 성실히 따르지 않은 채 어떤 사태를 묘사 했다는 것"이다.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우리가 묘사를 할 때는 현실의 제약에 맞게 해야 한다. 하지만 그녀는 의도적 거짓 전파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기에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형식보단 저 생각 없음이 강조된다.

 

개소리의 본질은 사태의 진상이 실제로 어떠한지에 대한 무관심이다. 파스칼의 사례로 들면 차에 치인 개에 대한 실제적인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저 내 감정 혹은 상황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 표현의 비유에 그칠 뿐이었다.

 

저자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을 참조해 흔히 개소리라 불리는 'Bull Shit' 특히 접두사로 많이 붙는 Bull을 분석하는데, Bull은 대체로 진짜 목적에 기여하지 못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개소리의 특징은 무엇인가. 개소리는 거짓말보다 허세 부리기에 가깝다 말하고 있다. 본질이 거짓에 있지 않고 가짜라는 것에 있다. 거짓말의 본성에서 가장 중심적 개념은 '허위성'이지만 허세 부리기는 거짓이 아니라 '속임수'의 문제다. "개소리쟁이에게 유일하게 없어서는 안 될 독특한 특징은 그가 특정한 방식으로 자신의 속셈을 부정확하게 진술한다는 사실이다."(P.57) 저자는 이것이 개소리쟁이와 거짓말쟁이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라 강조한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진릿값을 알고 있어야 한다. 무엇이 진리인지 알아야 속일 것 아닌가. 또 진릿값이 존재한다는 것은 객관적 제약에 따라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개소리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보다 더 자유롭다. 그래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개소리의 작업은 보다 광범위하고 독립적이며 임기응변과 꾸며냄, 그리고 창의적인 연기의 여지가 많다. 이것은 들인 노력의 문제라기보다는 예술의 문제다."(p.58) 그렇다. 꾸며내는 것, 개소리는 예술의 경지다.

 

개소리쟁이에게 유일하게 없어서는 안 될 독특한 특징은 그가 특정한 방식으로 자신의 속셈을 부정확하게 진술한다는 사실이다. 속셈을 정확히 말하지 않는다. 내면의 의도를 드러내지 않고 진리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거짓말과 다른, 책임지지 않고 부끄럼도 없는, 속이기 위함 그 자체를 위한 것이다. 그저 자기 목적에 맞도록 그 소재들을 선택하거나 가공해낸다.

 

"말하는 사람의 입맛에 맞는 것 외에는 어떤 것에도 신경을 쓰지 않고 마구 주장하는 개소리 행위에 과도하게 탐닉하다 보면 사태의 진상에 주의를 기울이는 정상적 습관은 약화되거나 잃어버리게 된다." (P.63)

 

개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이것이다. 진상에 대한 탐구 정신을 말살시키고, 입맛에 맞게 휘둘려줄 수 있는 존재를 양성하는 것. 특히 정파적으로 굳어버린 사고를 원하는 것이다. 무섭지 않은가? 우리 작금의 사태다. 진리를 아는 것은 피곤한 일이 되어버렸다. 단순히 가볍고 짧게 생각해 말할 수 있는 것이 선호되었고, 빠르고 쉽고 자극적이고 효율적이고 충동적인 것들이 우대받는 현실이다. 그것을 삶을 잘 사는 처세술이니 뭐니 하면서 치켜세운다.

 

"진실과 거짓은 사물을 잘못 이해하는 것과 올바로 이해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며, 적어도 때로는 그 차이를 구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사물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있다는 사고가 남아있다면, 그것은 탐구로 이어지겠으나 그 사고 자체가 없으면 물을 흐리기만 한다. 이것이 저자가 이후에 말하는, 현대의 개소리가 넘쳐나는 이유임을 말하고 있다. 거짓말하는 쪽은 적어도 진리의 권위를 인정하지만, 개소리를 하는 쪽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개소리는 진리의 큰 적이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과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말하자면 같은 게임 속에서 반대편으로 활동한다. 그들 각각은 자신들이 이해하는 사실에 반응한다. 비록 한쪽의 반응은 진리의 권위에 따르고, 다른 쪽의 반응은 진리의 권위에 저항하며 그 요구에 맞추기를 거부하지만 말이다. 개소리쟁이는 이러한 요구를 모두 무시한다. 그는 거짓말쟁이와는 달리 진리의 권위를 부정하지도, 그것에 맞서지도 않는다. 개소리쟁이는 진리의 권위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이 점 때문에, 개소리는 거짓말보다 훨씬 더 큰 진리의 적이다." (P.64)

 

저자는 오늘날 개소리의 확산이 다양한 형태의 회의주의 속에 보다 깊은 원천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진실을 탐구하는 것을 무의미하다 생각하고 사회에서 개인으로 초점이 옮겨가 개인을 주장하는 시대가 되었다. 사실에 충실하지 않고 자신에 충실하면 된다는 사고. 그런데 인간이란 존재는 세계와 맞닿아 있어서 다른 것들을 알아야 우리를 알 수밖에 없는데, 절대적 세상의 진리는 존재하지 않은 사고를 가지면서 동시에 자신에 대한 진리를 주장하는 것이 말이 되는지 저자는 묻고 있다.

 

이런 비판을 가하기 이전에 저자는 개소리에 대한 설명에 들어서면서 우리에게 질문을 남겼다. "개소리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왜 일반적으로 거짓말을 대할 때보다 관대한가?" 라고. 저자는 진리의 관점에서 개소리가 거짓말보다 더 적대시되어야 한다 말한다. 거짓말보다 개소리를 경계하고 주의해야 한다. 개소리가 넘쳐나는 시대다. 저자는 개소리를 더 관대하게 대하는 사회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점점 가벼워지고 있다.

 

과거보다 더 넘쳐나는지 실증적으로 입증하기는 어렵겠지만 그 형태는 확실히 바뀌고 있다. 누구는 확증편향으로 얼룩진 사회가 미디어의 발달로 더더욱 늪으로 빠져간다고 말하지만 개소리를 걷어내지 못해 다 같이 침몰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걸 단순히 국민의 수준이니 비관하면서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고 싶진 않다. 하지만 굉장히 절망적이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책읽지 않고, 찾아보려는 습관이 없이 떠먹여주길 원하는 사회의 결말은 역사만 봐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책을 안읽으니 역사도 모를 것이 아닌가. 개소리에 대한 문제는 태도의 문제로 돌아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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