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명 앗아가주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6
앙헬레스 마스트레타 지음, 강성식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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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민감한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면, 남녀평등에 가까워졌다고 말을 하는 이 세상에 대해서 나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여성의 지위가 올라가면서 반대로 남성의 지위가 내려갔다고 할 테고 누군가는 여전히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대접받으려면 한참 멀었다고 할 테다.

내가 보기에 이 세상은 결코 평등하지 않고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면 짧은 인생을 보내는 내내 고달플 것이 분명하다. 물론 자신들, 나아가서는 자기 자식들의 ‘평등‘을 위해 소리를 높이는 자들을 폄하 하려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 소설은 지금 이 시대로부터 좀 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야말로 여자들이 남자들의 한낱 부속품, 마땅히 소유한 권리이던 그 나날을 배경으로 어느 열다섯 살 소녀가 자신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남자와 결혼해 끝내 잃어버린 줄 알았던 자신의 소유권을 되찾기까지의 일대기를 다룬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여인들, 카틴을 포함해 무수히 많은 여인들의 몸과 마음은 남편이라는 이름의 낯선 남자에게 그저 짓밟힐 뿐이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조롱하며 그저 이 삶이 자신이 선택한 삶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용히 미소를 짓는다.

처음에 안드레스를 사랑해서 결혼을 했지만 후에 진정한 사랑을 만나며 사실 그건 그저 두려움에 불과했다는 걸 깨달은 카틴이지만, 그런 그녀조차 남편을 향해 칼을 들어올리는 상상, 연인과 함께 그를 벗어나 달아나는 상상을 하면서도 끝끝내 그러지를 못한다.

나는 내심 카틴이 그의 머리에 총을 갈겨주었으면 하고 바랐었다.

그런데도 이 소설이 그저 답답하지만은 이유는, 그런 여자들의 삶 속에서도 카틴은 끝없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스스로 투쟁을 하고 사랑을 갈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카틴이 나는 참 좋았고 당당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열다섯의 아름다운 소녀가 서른 살의 여자가 되기까지, 침범당하는지도 모르고 침해당한 여자들의 권리와 짓밟힌 프롤레타리아의 삶, 멕시코 혁명을 적절하게 버무려 작가는 담담하지만 먹먹하게 카틴의 인생을 녹여냈다.

유일무이하게 사랑했던 연인의 죽음마저도 그저 죽음 그 자체를 그리듯 담담해서 오히려 처연하게까지 느껴졌다. 카틴은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적어도 누가 보는 앞에서는.

그런 그녀가 결국 폭포같은 눈물을 쏟는 순간은, 바로 그 순간, 자신의 해방의 순간이다.
결코 누군가를 위해서도, 특히 안드레스를 위해서는 더더욱 아닌,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한 눈물.

그래서 결국 그녀가 행복해졌을까? 에 대한 답은 작가조차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시대에서 행복해져봤자 여자이기밖에 더 할까.
물론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나갈 수도 있겠지만 많은 확률로 또 다른 남자에게 권리를 침해당하겠지.

그래도, 역시 그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내가 사랑하는 카틴이니까.

카를로스와 둘이서
코수멜의 인적 없는 바다에서 보냈던
그 사흘 간의 도피 이후,
내게 바다는 바로 카를로스 비베스였다.
그때 난 뭔가를 애타게 갈구하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뭘 하면 제일 좋을까요?"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죽어버리는 건 어떨까요?"
카를로스가 물었다.
바다에서 지내던 그날마저도
우리는 죽음이라는 말장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사랑 때문에 죽을 것만 같아요."
어느 날 오후였던가,
미지근한 바닷물에 발을 적셔가며
그 사람과 나란히 걷던 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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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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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랫동안 사랑받으며 베스트셀러 대열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설, 책을 잘 읽지 않는 사람이라도 이름 정도는 들어봤을 테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대다수가 읽어봤을 거라고 자신하는 책, 왜 이제서야 이런 소설을 들고 리뷰를 쓰냐고 묻는다면 나로서도 할 말이야 있다.

애초에 나는 미미 작가와 더불어 히가시노 작가랑은 맞지도 않을 뿐더러 추리 마니아라면 당연하다 싶을 정도로 찬양을 하는 두 작가님의 소설도, 그저 나에게는 호 불호가 갈리는 작품일 뿐. 그래서 나미야가 베스트셀러 자리를 꿋꿋하게 차지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저 히가시노 소설이니까. 이러고 말았다.

그런 내가 한참이나 시간이 흘러서야 이 책을 집은 것은 영화가 개봉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다. 어쩐지 영화는 보고 싶은데 원작 소설이 있는 영화를 소설도 읽지 않은 채 접하는 것은 작품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고.. 이래저래 고민하다가 결국 고집을 꺾고 소설을 집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왜 나미야가 그토록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며 사랑받아 왔는지 납득을 하게 되었달까.
과연, 사랑받을 만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첫 페이지, 첫 문장만 읽고서도 지금까지 읽었던 히가시노의 소설 중 가장 사랑하는 소설이 될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딱히 히가시노의 팬도 아니고 그 작가에 대한 어떤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은 나로서는 이 작가가 이렇게나 따뜻하고 다정한 소설을 쓸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단편 소설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연작소설은 좋아한다. 특히 나미야처럼 알게 모르게 삽입된 복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쳤다가 나중에서야 그게 이렇게 이어지는구나하는 깨달음을 주는 소설이라면 더더욱(참고로 제일 감명 깊었던 건 백지 편지. 그걸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약간의 판타지가 가미된 이 소설은 어느 좀도둑 세 명이 ‘나미야 잡화점‘에 숨어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침이 올 때까지만 숨어있기로 한 그들은 우유환풍구를 통해 어떤 편지를 받게 되고 처음에는 장난이라고 생각했던 그 편지가 사실 과거에서 전달된 편지라는 걸 깨닫게 된다.

만약 누군가가 내게 진지한 고민을 상담한다면 어떻게 될까. 내가 아무 생각없이 한 답변이 그의 운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면?

물론 그렇지는 않을 거다.
소설에서도 나왔듯이 고작 내가 한 답변이 누군가의 운명을 크게 뒤바꿀 만큼 중요할 리는 없으니까.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절실할 터인 그 고민을 쓸 데 없는 것인양 치부할 권리도 내게는 없다.
그래서 나는 장난섞인 편지마저 진심 가득한 답변으로 응수한 나미야 할아버지도, 비록 까칠하고 직설적이고 상대방이 상처입는 것따위는 고려하지도 않고 답장을 보낸 좀도둑 삼인방도 다정하고 멋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 심지어는 자기자신까지 바뀌는 것을 보았고 때로는 씁쓸하기도, 마음이 아프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 설령 그 조언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하더라도.

애초에 조언이라는 게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분명히.
무의식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마음 속에 답을 정해놓고 누군가에게서 확신을 받으려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 나약한 자신의 등을 떠밀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는 나미야에 등장한 많은 편지들을 그렇게 생각한다. 정말로 어떤 조언을 들려주길 원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누군가는 그저 나의 이야기를 누군가가 들어주길 바란 것이 아닌가 하는.

어쩌면 나미야의 하룻밤 기적은, 오늘도 고민으로 밤을 새다시피 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빚어낸 나미야 할아버지의 선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참 다정하게도.

문손잡이를 잡는 순간,
아, 잠깐, 이라고 쇼타가 말했다.
"왜?"
하지만 쇼타는 아무 말 없이 가게 쪽으로 내려갔다.
"왜 저러냐?"
고헤이에게 물었지만 역시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이윽고 쇼타가 돌아왔다.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뭐야?"
아쓰야가 물었다.
"또 왔어..."
쇼타는 천천히 오른손을 쳐들며 말했다.
"이건 또 다른 사람한테서 온 편지 같아."
그의 손에는 갈색 봉투가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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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열쇠 2018-07-25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봉!
 

‘후카세 가즈히사는 살인자다.‘
소설, 리버스의 첫 시작이다. 소설은 비교적 갑자기, 난데없이 라이트 훅을 날리면서 독자를 잡아끈다. 그러면서도 해일이라도 닥친 것처럼 거세게 몰아치던 분위기를 상쇄하려는 듯 비교적 일상적인 이야기가 잔잔히 진행된다.
참 이상하게도 첫 문장 때문인지, 상당히 평화롭게 진행되는 일상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전체적으로 스산한 분위기가 감돈다.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주인공은 살인자라는 문장이 독자의 머릿속을 내내 휘저어놓는다.

어쩌면 후카세라는 사람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후카세라는 인물이 마치 나와 같다면서 공감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지도 모른다.
주변에 관심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매우 의식을 하고 있고 성격은 소심하고 자신감이고 자존감이고 바닥이나 다름없다. 과거에도 현재도 어쩌면 앞으로도 특별한 일이 없을 것 같은 사람. 본인 스스로도 나는 별로 특별하지 않다고 말을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후카세 가즈히사라는 주인공이다.

커피를 컵에 따른 사람이 커피메이커 옆에 놓아둔 저금통에 커피 값도 직접 넣는 것이 규칙이라 장사한다는 느낌도 없고, 원두 값을 일일이 보고할 필요도 없다. 예산에 맞추려면 사실 한 단계 낮은 블렌드가 적정선이다. 블렌드라도 양판점에서 파는 가장 비싼 원두보다 몇 단계는 품질이 높지만, 매주 다른 종류의 고급 원두를 구입하는 것은 하루 중 고작 몇 분이라도 원의 중신에 있고 싶기 때문이었다.
먼저 드시라고 선배에게 양보해도 다들 후카세가 첫 잔을 잔에 따른 다음에야 줄을 서는 것도 기뻤다.
시시한 특기일지도 모르지만, 덕분에 그가 있을 자리가 존재한다.
후카세의 행동을 기뻐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 p. 25

처음에 다소 불안한 첫 문장으로 시작했던 이 소설은 이야기가 거듭됨에 따라, 후카세 가즈히사는 살인자다 라고 적힌 편지를 증거처럼 내미는 미호코에게 후카세가 줄곧 숨겨왔던 이야기를 털어 놓고 지금까지 자신이 친구라고 생각했던 히로사와의 흔적을 밟기 시작함에 따라 점점 성장소설처럼 변모해간다. 그래서 결국 나중에 가서는, 모든 진실이 파헤쳐졌다고 섣불리 판단을 하며 애써 짠한 마음을 억누르면서 후카세와 미호코의 관계가 어떻게 발전할지에만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 사건 때문에 두 사람이 결국 헤어지게 되겠지만 그래도 상처를 딛고 미래로 나아갔으면 좋겠다고 속없이 생각하면서.

어쩌면 은연중에 결말을 예측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결말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예측했다고 해야 옳겠지. 사실 내가 생각했던 것이 완벽한 결말은 아니더라도 그에 조금쯤은 가까웠으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심 충격을 받았던 것은, 소설 내내 감돌던 불온한 분위기가 온전히 해결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 장까지 다 읽고 나자 어쩐지 작가에게 속았다는 기분이 들면서 나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버렸다.  한 여름 밤인데도 온 몸에 소름이 돋은 탓이었다.

툭 내뱉듯 던져진 마지막 대사. 한 순간에 모든 내용이 스쳐 지나가면서 그것을 뭉뚱그려 나타낸 것 같은 자조적인 마지막 대사. 어쩐지 지금까지 읽어왔던 모든 내용은 그 대사만을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연 듯 들었다.

출간 기념 인터뷰에서 미나토 가나에는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바라건대 독자 여러분, 어서 읽어보시고 그다음에는 ‘나는 알지‘의 웃음을 킬킬 흘리며 ‘앗!‘의 비밀을 꼭 지켜주세요.˝

이제는 작가가 언급한 ‘앗!‘의 비밀을 알게 되었건만, 기분이 왜 이리도 축축 가라앉는지. 이거는 너무 악의적인 농담이 아니냐고 울상을 짓고 싶어질 정도다.




"자네였나."
히로사와의 아버지가 뺨을 누그러뜨렸다.
"예?"
"우리 귤밭에서 형님이 벌을 치기 시작했거든.
집사람이 요시키에게 벌꿀을 잔뜩 보냈어.
빵에 뿌려 먹는 걸 좋아한다더구나.
그렇더라도 너무 많이 보냈다고 잔소리를 했더니,
집사람이 확인해보겠다며 전화를 걸었지.
그러더니 의기양양한 얼굴로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친구한테 줬더니 기뻐했대요,
늘 굉장히 맛있는 커피를 만들어 주는 친구래요,
하고 말하지 않겠니?
그러고는 그 친구라는 게 여자 친구 아닐까?
하고 눈살을 찌푸리면서 말하길래
시샘하는 거구나, 그렇지? 하고 놀렸지.
커피는 대개 애인하고 마시는 거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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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사 판 제인 오스틴을 구매하게 되면서 옛 기억도 떠올릴 겸 다시 읽게 된 책이다.
여성 작가들 중 제인 오스틴을 열렬히 좋아하게 된 계기가, 설득이라는 소설 때문이었는데 그 때문인지 이 책은 나에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사랑에 빠지던 그 순간을 되새기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게 되는 즐거움을 깨친다고나 할까.

하나의 책을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의 상태로 맞닥뜨리는 것과 한 번 읽었던 책을 다시 읽어보는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그것은 아무래도 이미 읽었던 내용이라서 다음 순간을 상상하기가 쉬워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다음 순간에 이어질 장면을 떠올리면서, 문득 묘한 기대감이 마음속에 자리하는 것이다.
마치, 나는 어떤 장면이 나올지 알고 있다, 와 같은 순수하면서 비밀스러움을 공유하는 기쁨.
그래서 그런지 두 번째 읽는 설득은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를 대하듯 읽는 내내 설렘이 가득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속 주인공 중 「오만과 편견」의 앨리자베스 다음으로 좋아하는 앤 엘리엇.
소설은 그녀가 주변의 설득과 자신의 성급한 판단으로 인해 이별을 맞이했던 연인이 8년 뒤에 해군 대령이 되어 돌아오면서 시작한다.
그와 헤어진 뒤 서서히 그에 대한 마음을 잊었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자신의 동요와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통해 그를 결코 잊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런 그녀의 마음과 달리 그녀를 마주한 웬트워스 대령은 그녀에 대해 ˝많이 변해서 못 알아볼 뻔했다.˝ 라는 평가와 함께 앤 엘리엇만 아니라면 누구와도 결혼할 의사가 있다는 생각을 굳건히 한다.

머스그로브 씨의 딸들이 그 조건을 충족시키기만 한다면 어느 쪽이든 마음이 있었다. 요컨대 자기 앞에 나타나는 유쾌한 여성이라면 다 좋았다. 앤 엘리엇만 아니면 된다.
- p.86

내게는 저 말이, 주변의 설득에 넘어가서 자신을 저버린 앤 엘리엇에게 부리는 투정 정도로 여겨져 실풋 웃음이 새어나왔다. 저렇게 단호하게 저 여자만 아니면 된다고 말을 하다니. 그야말로 여전히 나는 당신을 신경 쓰고 있답니다. 라고 말하는 꼴이 아니고 뭔가.

두 사람은 가능한 한 서로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주변과 상황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마주치게 되고 자연스럽게 서로를 의식하게 된다.
대화중에 그는 자신이 바라는 여성상을 은연 중 내비치게 되는데 그 대사에서 그가 과거에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지 짐작할 수 있다.

˝제가 관심 있는 사람에 대해 가장 바라는 것은 그들이 단단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 p. 121

앤은 굳건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했던 성격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설득과 압력에 넘어가 그와의 약혼을 파기한 적이 있고 8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상처받은 자존심은 그 트라우마를 잊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다음 순간, 그는 앤이 청혼을 거절한 적이 있다는 말을 듣는데 그 말을 듣고 난 뒤의 그의 반응이 흥미로웠으나 그것은 거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 그가 속마음을 속절없이 표현할 때에야 누리게 될 즐거움이었다.

내내 침착하고 다정하고 사려 깊은 앤의 성격 때문에 오만과 편견에서처럼 밀당의 스릴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오래 전에 어긋나버린 두 연인의 재회와 그것을 다시 맞춰 가는 과정은 편안한 두근거림을 안겨주었다.
여름날의 뜨거움도 겨울날의 차가움도 아닌 봄날의 따사로움 같은.

그래서 마지막에 이르러 내내 어긋나있던 두 사람이 완벽하게 맞물리는 것을 보면서 마치 한 사람의 인생을 마주한 것처럼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눈물을 펑펑 쏟을 만큼 애타지도 감격스럽지도 않았지만 어쩐지 가슴 한 편이 뻐근해지는 아련함이 찾아들었다.

8년 전의 아픔을 딛고 비로소 단단해진 앤 엘리엇과 그녀에게 받은 상처에도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차마 접을 수 없었던 프레더릭 웬트워스의 사랑이 과연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변치 않았을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그걸 판단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 아닐 것이다.
독자들이야 그들이 행복했을 거라고 믿고 그들이 분명히 이루어나갔을 가정의 평안을 상상하며 조용히 미소 짓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그 소식을 들은지 5분도 안 되어 난
‘수요일에 바스에 있을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난 바스에 있었지요.
여기 올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한 게,
어느 정도 희망을 안고 온 게
용서받지 못할 일이었나요?
당신은 미혼이었습니다.
당신도 나처럼 과거의 감정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요.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이 내게 격려가 되었습니다.
다른 남자들이 당신을 따라다니고
청혼도 할 거라는 점에 의문이 있었겠습니까만,
나보다 더 그럴 듯한 남자 중에
적어도 한 사람을 거절했다는 건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종종 ‘나 때문인가‘하는 혼잣말이
저절로 튀어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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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션 - 어느 괴짜 과학자의 화성판 어드벤처 생존기
앤디 위어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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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이 보지 못한 것을 상상하고는 한다. 그러니까 SF 같은 장르들이 시대를 거슬러 유행하는 거고 해저 2만 리 같은 소설이 나오는 이유이다. 특히 상상으로만 국한되지 않고 우리와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아득하게 먼, 심해나 우주 같은 곳이라면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마션은 영화로 먼저 접해서 책이 이렇게 두꺼우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솔직히 걱정이 되기도 했다.
과학적인 요소가 많기 때문에 자칫 책이 지루하게 읽히지나 않을까 싶기도 했고 그 텅 빈 화성에서 뭘 할 게 있다고 이렇게나 길게 쓰나 하는 염려도 들었다. 사실 그게 바로 작가의 능력임을 간과하고.

소설은 대화가 거의 없고 마크 와트니의 시점으로만 진행되는데 마크가 혼자 화성에 떨어져 400일이 넘는 시간동안 살아남는 이야기가 주이기 때문에 일기 형식으로 쓰여 있다. 덕분에 마크 특유의 위트 있는 농담이라든가 맛깔 나는 욕설이 제대로 표현되어서 읽는 내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분명 팀원들과 떨어져 혼자 화성에 남게 되었고 제대로 작동되는 기기도 없는데다가 화성의 기후는 제멋대로이고 남은 식량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 아주 엿 같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마크는 유쾌한 성격과 긍정적인 사고방식, 그리고 잘 돌아가는 머리로 어떻게 살아남는다.

그래서 더욱 재미있게 읽은 게 아닌가싶다. 사실 나였다면 화성에 혼자 남은 그 순간부터 온갖 걱정이 머리를 잠식해 제대로 된 판단도 내릴 수 없었을 텐데 왠지 마크를 보고 있으면 그런 걱정이나 하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다.

˝자리에 주저앉아 걱정이나 하고 있을 틈이 어디 있어? 그럴 시간에 감자 한 알 더 심지.˝
라고 말하며 툭툭 털고 일어나지 않았을까. 마크였다면.

처음 읽었을 때는 친구에게 빌려 봤는데 다 읽고 나서 결국 책을 사 버렸다. 두꺼운 책이 전혀 두껍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심지어는 이 두께가 얇게 느껴질 정도로 매우 재미있었기 때문이었다.

내심 속으로 영화부터 보길 잘 했다고 생각하는 게, 영화도 물론 잘 만들어졌다고 생각은 하지만 아무래도 원작에 비할 바는 아니더라. 책부터 읽고 영화를 봤다면 조금 실망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한슨은 메시지를 열고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헤르메스, 미치 핸더슨이다."
메시지가 시작되었다.
마르티네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
"미치 핸더슨? 교신 담당이 있는데 왜 직접 보냈지?"
루이스는 조용히 하라는 신호로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미치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새로운 소식이 있다. 돌려 말하지 않겠다.
마크 와트니가 살아 있다."
조한슨이 숨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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