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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판타지적이면서도 느낌 있어 보이는 책의 제목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왜 책의 제목이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일까 생각하다가 책의 중반부쯤에서 한 거리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목에서부터 회색빛의 잔재가 느껴지는 이 책은 기억을 잃은 주인공이 등장한다.
자신의 이름도, 과거도, 지인들도 하나도 떠올릴 수 없는 기라는 남자는 위트라는 남자와 함께 탐정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위트가 탐정 사무소의 문을 닫게 되고 갈 곳이 없어진 기는 자신의 기억을 찾아 떠난다.
흔적을 조금씩 더듬어 여러 사람을 만나며 향해가는 기억의 항로는 언뜻 쓸쓸하기도 하고, 아련하기도,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추억에 아프기도 했다.
나는 누구일까.
만약 나에게 기억이라는 것이 없다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은 채 어느 순간 어디엔가 서 있는 나를 발견한다면 그것이 나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소설의 첫문장이다.
자신을 나타내는 기억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공허함으로 가득한 삶을 살고 있었을 기.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첫문장이 아닐 수 없다.
이 소설이 또 하나 눈길을 끌었던 것은 배경이 2차 세계대전 당시라는 것이다. 기억을 잃은 기가 존재하는 세상은 세계대전이 끝난 후지만 페드로가 존재하는 세상은 2차 세계대전 당시다.
어지러웠던 시절, 엄격한 신분 검사, 때문에 페드로와 그의 친구들은 프랑스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심각하고 혼란스러웠을, 그리고 알 수 없는 공허로 가득했을 그 당시의 기록이 페드로의 시점에서, 기의 시점에서 묘사되어 있다.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기억이 존재하지 않기에 기는 자신의 친구였을지 모르는 옛사람을 만나면서도 마음 놓고 반가워할 수가 없었다. 아무 감정도, 기억도 없는 상황에서 문득 그 서글픔이 나에게까지 느껴져서 나는 그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옛 추억의 잔재들을 손에 쥘 때마다 어쩐지 슬퍼졌다.
거의 마지막에 다다라 기는 과거의 기억이 분명할 것들을 떠올리지만 여전히 그는 명확히 자신을 기억할 수 없었다. 어쩌면 마지막 흔적임이 확실한 친구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기의 믿음처럼 나 또한 그가 어딘가에 유유자적 몸을 숨기고 살아가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기는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까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기억을 찾아 헤맬 것이다. 마치 회색빛 안개를 쫓듯 그렇게.
나는 옛날에 우리가 식사를 하곤 할 때 이 방이 어떠했었는지를 상상해보려고 애를 썼다. 내가 하늘을 그려넣을 천장, 저 종려수를 그려넣어서 열대 지방의 기분을 내려고 했던 초록색의 벽. 유리창으로 푸르스름한 빛이 우리들 얼굴 위로 떨어지곤 했었지. 그렇지만 그 얼굴들은 어떻게 생긴 것들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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