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니미니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
M. J. 알리지 지음, 전행선 옮김 / 북플라자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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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무리 둘러보아도 빠져 나갈 곳이 없는 밀폐된 공간. 그 안에 갇힌 두 사람. 총알 하나가 들어 있는 권총.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살아나갈 수 있다면 과연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소설 속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궁지에 몰리게 된다. 그들은, 직장 동료이기도 연인이기도 모녀이기도 하다. 하나의 선택이 끝나고 또 다른 선택으로 이어질 때마다 나라면 과연 어떤 식으로 행동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처음에는 살해당하는 것을, 혹은 살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과연 끝까지 인간다울 수 있는 이는 몇이나 될까?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저 본능에 먹힌 채 어느 순간부터는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기 시작한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그 모습이 상상했던 것보다도 추악하고 끔찍하고 인간에서 한참은 벗어나 보여서 나도 모르게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갈까 궁금했다. 너무 한정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에 호기심도 들었다. 이 정도로 두꺼운 책이면 뭐가 들어도 들었을 텐데……. 기대는 하면서도 너무 질질 끌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내심 들었다. 그 생각이 기우에 불과할 정도로 이야기가 흡입력이 있어서 손에서 떼어 놓을 수가 없었다. 한 장만, 한 장만, 하다가 한 챕터를 다 읽고 자고. 게다가 주인공인 한나 그레이슨이 마음에 들기도 했고.

중반쯤에 한나가 내가 좋아하던 캐릭터를 확고한 증거도 없이 의심을 하는 순간이 있었는데, 솔직히 그 순간에는 한나가 좀 미웠다. 얘를 계속 좋아해도 되나, 하는 의문이 살짝 들었으나 어쨌든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캐릭터라는 점은 마음에 들었으니까, 이 시리즈도 계속 챙겨볼 듯하다. 게다가, 오히려 그 점이 한나를 더 인간적으로 보이게끔 만들었다. 어느 모로 보나 완벽한 것 같지만 완벽하지 않은 주인공이라는 점이 무척 매력 있다.

읽는 내내 스릴도 넘치고 끊이지 않는 긴장감에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던 것은 마음에 들었지만 단 한 가지 마음에 안 드는 점은,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가 덜컥 죽어버렸다는 점.
걔가 은근 안타까워서 행복한 모습을 보고 싶기도 했고, 한나랑 잘 되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했는데. 그래 뭐, 로맨스 소설이 아니니까. 그래도 안타깝다.

어떤 사람들은 마지막이 좀 애매하게 끝난다고 할 수도 있지만, 나는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한나의 모습이 쓸쓸하면서 비극성을 안고 있어서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넌 날 보호해 줬어야 해.
기뻐했어야 마땅하다고."
"너한테 그들을 죽여달라고 부탁한 적 없어.
네가 그들을 죽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어.
그런 비슷한 생각도 한 적이 없다고.
정말 모르겠어?
넌 순전히 널 위해서 살인을 저지른 거야."
"정말 그렇게 믿고 있는 거야?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는 거냐고?"
"물론이야."
"그럼 더 할 말이 없겠군, 잘 가, 조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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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구두당
구병모 지음 / 창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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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다시 한 번 느낀 것.

역시 구병모 작가님은 단편 소설을 엄청 잘 쓰시는 구나. 물론 파과, 아가미, 위저드 베이커리 등 장편 소설이 재미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 작가의 단편은 묘하게 기대를 하게 만든다. 게다가 장편 소설보다 단편 소설을 더 잘 쓰는 것 같다 생각하는 작가님 중 한 분.

제목에서 대강 눈치를 챘겠지만 이 소설은 대놓고 동화를 모티브로 한 소설이다. 그래서인지 읽다 보면, 어라? 이 이야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하는 기시감이 든다. 아는 동화가 나오면 반갑기도 하고 그 이야기를 이렇게 바꿔놨구나 싶어 신기하기도 하고. 애초에 동화 자체를 무척 좋아하는지라 책의 제목만 보고 무척 읽고 싶었다.

마지막 이야기는 「파란 아이」라는 소설집에 나온 단편집. 성냥팔이 소녀 이야기인데 묘하게 충격적이기도 하고 혼자 남은 아이의 현실은 이럴 수밖에 없겠구나 싶은 안타까움도 들었던 작품이었다. 이것도 꽤 마음에 들던 소설인지라 빨간구두당에 실린 걸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이야기들이 전체적으로 동화풍이기도 하고 구병모 작가님다운 기괴하고 몽환적인 아름다움도 건재해서 끝까지 쉬지 않고 재미있게 읽었던 듯싶다. 언제나 그랬지만 특히 이번 책은 정말 술술 읽혀서 읽는 재미가 있었다.
만약 여러 권을 동시에 읽지 않았더라면 앉은 자리에서 한 권을 다 읽었을 지도.

작가님의 다음 책도 기대가 된다. 장편이든 단편집이든 상관 없으니 얼른 나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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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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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흑백영화를 본 적이 있다. 그 때 제목이 하도 독특해서 여전히 뇌리에 깊게 박혀 있다.
커다란 나무가 있고 어린 아이 세 명이서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어딘가를 걸어가고 있는 장면. 지금에야 그 장면이 부 래들리를 보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장난이라는 걸 알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로 앵무새를 죽이러 가나 보다 했다. 말 그대로 앵무새를 죽이는 것이 그 영화의 내용인 줄 알았다.

아직 어리고 철없는, 하지만 순수함으로 가득한 9살 소녀, 스카웃의 시점으로 소설은 진행된다. 그래서인지 스카웃이 생각하는 것과 느끼는 것들이 불순물을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흘러들어 온다. 조금 당혹스러울 정도로.
그 당시에 흑인에 대해 백인들이 가졌던 편견들, 생각, 아이가 어른들을 바라보는 시선들.
아무리 신사적이고 생각이 박힌 사람이라도 흑인과 관련되면 이상하게 감정적으로 변하고는 한다.
그 때는 그런 시대였다. 유색인종이 자신의 위에 서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고 차별은 당연한 것이었으며 백인과 흑인이 결혼하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시대.

스카웃과 젬의 옆 집에는 래들리 가문이 있다. 집 밖으로 나오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이 신사는, 어린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아이들은 `부 래들리`를 만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한다.
그러나 어떻게 해도 아이들은 부 래들리를 만날 수 없었고 여전히 그를 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만 점차 시들해져 간다. 그러던 어느 날, 변호사인 아버지가 흑인을 변호하게 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 사건으로 인해 사이가 좋았던 마을은 한 순간 긴장감에 휩싸이며 각자 다른 의견을 가지고 마찰과 대립이 이어진다.

등장인물들 중 내가 가장 좋아한 사람은 스카웃과 젬의 아버지인 핀치 씨였다. 웬만해서는 화를 내지도 않고 침착하고 상냥한 태도를 고수하며 아이들에게 올바른 가르침을 주고자 하는 아버지.

핀치 씨가 흑인의 변호를 맡게 되고 그를 아는 사람들이 염려하며 굳이 그 사건을 맡지 않아도 된다고 만류한다. 그러자 핀치 씨는 말한다.
「만약 내가 이 사건을 거부하면 나는 내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칠 수 없을 겁니다.」
사회 분위기 상 흑인 변호를 맡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 줄 알면서도 그는 그래야만 아이들 앞에 변호사로써 아버지로써 당당하게 설 수 있다는 걸 이미 깨닫고 있었다.
그는 누군가를 마음 깊이 미워하는 것이 편견의 시작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며 상대방이 되어 보지 않고서는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것을 자신의 아이들도 알기를 바랐다.

스카웃은 흑인 변호 사건을 보면서 의문점을 갖는다. 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세상은 말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모든 사람은 평등하지 않은 걸까.
「내 생각으로는 오직 한 종류의 인간만이 있을 뿐이야. 그냥 사람들 말이지.」
스카웃이 그렇게 말하자 젬이 조금 씁쓸하게 반박한다.
「그들이 서로 비슷하다면, 왜 그렇게 서로를 경멸하는 거지?」
어쩌면 그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의문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편견은 존재하고 그에 따른 차별도 팽배하다.
백인은 흑인을 차별하고 흑인은 황인을, 또 황인은 같은 황인을 차별하기도 한다. 피부색에 따라 지위가 변하는 것이 아닌데도 이상할 정도로 사람들은 피부색에 집착을 한다.
참 우습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간혹 나 또한 다른 인종을 비하하는 말을 쓸 때가 있다.

아마 우리가 사람으로 존재하는 동안 차별은 영원히 풀지 못할 인류의 과제일 것이다. 서서히 나아지기는 하겠지만 어딘가에는 분명 존재할 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이게 사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들이 자각을 하고 고쳐가려고 노력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나은 인간이 되어간다. 언젠가 말 그대로 오직 한 종류의 인간만이 존재하는 그런 날이 오리라 막연한 희망을 품어 본다.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아저씨의 두 손바닥이
벽에서 조금 미끄러졌고 벽에는
기름과 땀 자국이 남아 있었습니다.
아저씨는 허리띠에 엄지손가락을 걸었습니다.
마치 손톱으로 슬레이트를 긁는 소리를 들은 듯
이상하고 작은 경련으로 아저씨의 몸이 떨렸습니다.
하지만 내가 놀라 아저씨를 바라보자
아저씨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서서히 사라졌습니다.
입을 벌려 수줍게 미소를 지으셨고요.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눈물로
우리 이웃 아저씨의 모습이 흐려졌습니다.
「안녕하세요, 부 아저씨!」
내가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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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이 없는 소년 - 제1회 대한민국 전자출판대상 대상 수상작 미스티 아일랜드 Misty Island
황희 지음 / 들녘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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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현재 가지고 있는 성과 마음속의 성이 다른 소년, 은새가 주인공인 소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스타일의 인공이라서 더욱 관심이 갔다. 그런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은 으레 가족성장소설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소설은 조금 다르다.
남들과는 어딘가 다른 소녀, 은새가 교통사고로 죽은 엄마의 전화를 받으면서 원치 않는 타임리프에 휘말리고 그 과정에서 한 여자를 구하려고 애쓰는 미스터리 스릴러물에 가깝다. 주인공 특성상 성장소설의 요소가 빠질 수는 없겠지만 그렇게 두드러지지는 않아서 그런 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라도 부담감 없이 볼 수 있을 것 같다.

작가님은 은혁이라는 이름이 아닌 은새라는 이름으로 주인공을 부르고 그가 아닌 그녀로, 소년이 아닌 소녀로 은새를 지칭한다. 처음에는 은새가 소년인지 소녀인지 헷갈렸으나 나중에는 `그녀`를 온전한 한 사람의 사랑스러운 소녀로 생각하게 되었다. 분명 작가님의 의도가 통했다고 본다. 적어도 나에게는.

죽은 어머니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타임리프에 휘말리는 소녀. 갑작스럽게 끼어든 불순물을 원치 않는 시간. 사람들 간의 관계와 그 사이의 변화. 계속되는 살인.
타임리프를 거듭할수록 은새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그들의 반응이 변화하는 것을 느끼고 처음에는 자신을 걸러내려는 시간의 수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한 여자를 구하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은새가 그걸 깨닫는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저 지켜보기만 해야 던 그녀가 변한다.

빠른 템포로 흘러가는 이야기를 읽는 내내 급박한 긴장감과 견딜 수 없는 스릴이 내 온 정신을 자극했다. 다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작가님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어떤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아는데 그 말이, 등장인물의 대사를 통해 너무 적나라하게 등장하니까 동조해줘야 할지, 아니면 거부해야할지 망설여진다.
은근히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툭툭, 대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전달이 되니 그 말에 적극 동감하고 있던 사람도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서게 되는 격이다.

그것만 아니라면, 캐릭터도 정말 매력 있고 정신을 쏙 빼놓는 스릴에다가 간간히 들어있는 로맨스까지……. 오랜만에 제대로 소름 돋는 소설을 본 것 같은 만족감이 든다.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 오전의 시간을 반복하는 것 때문에 월요일이 없는 소년이라는 제목이 붙었는데 그 때문에 굳이 일요일 밤에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딱히 그러지는 않아도 됐을 듯싶다. 사실, 월요일이 오지 말았으면 하는 맹렬한 거부의 일환이었지만.

남자는 은새를 다시 흘낏 쳐다봤다.
남자가 곁눈질로 은새를 볼 때마다
은새는 손끝이 찌릿찌릿했다.
"공항 올 건 줄 알았음
같은 공항버스 타고 올걸 그랬어?"
"그러게요. 전 거기서 친구 차를 타고 왔어요.
공항버스를 타시길래
공항 분실물센터에 맡겨놓으려고 했는데
여기서 만났네요. 따님이신가 봐요?"
남자가 드디어 관심을 드러냈다.
"응. 내 딸. 예쁘지?"
남자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외국으로 배낭여행이라도 가는 것인지
무거워 보이는 배낭을 메고,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흰색 와이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은 남자는
상대방을 무장 해제시키는
아련한 미소를 지으며 은새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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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나는 없었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1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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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 소설 작가들 중에서는 아가사 크리스티가 단연 최고라고 생각한다. 나와 마찬가지로 크리스티를 좋아하는 친구가 이 책을 추천해주었는데 제목과 표지부터가 과거에 봤던 크리스티의 소설과는 뭔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크리스티가 로맨스도 썼나? 하고 의문을 가진 것도 잠시, 나는 이 소설에 푹 빠지고 말았다.

사실 읽으면서 무척이나 불안에 떨었다.
친구의 말로는 결말이 괜찮다고 했지만, 이런 식의 답답함을 느끼게 만드는 소설은 선호하지 않아서.
무려 주인공인 조앤이 답답함과 짜증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썩 유쾌한 기분으로 읽지는 않았다. 주위 사람들도 답답하기는 매한가지고. 왜 딱 부러지게 말을 못 해주나 싶기도 했다.
나중에 가서야, 아, 이 여자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전해지지가 않겠구나. 하고 깨달을 수 있었다. 가족들은 말하기를 포기한 것이구나. 하고. 혹은,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데도 조앤이 고의적으로 안 들었을 수도.

조앤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썩 행복한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착하게 잘 자란 아이들과 자신만을 사랑해주는 남편, 잘 꾸며진 화목한 집안.
그녀는 아픈 딸아이에게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과거에 아름다웠던 동창을 만난다. 그녀는 조앤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만약 혼자 남는다면 네가 무엇을 알게 될지 궁금한 걸.˝ 하고 말을 하지만 조앤은 그저 한 귀로 흘려버린다.
조앤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차가 끊겨 사막에서 고립이 되고 장장 일주일이라는 긴 시간을 태양빛 아래에서 머무른다. 본의 아니게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된 조앤은 과거에 있었던 추억을 떠올리던 와중 의식 깊숙한 곳에 감춰두었던 진실을 하나 둘 마주하게 된다.

참, 징 하게도 외면한다 싶었다.
그녀는 일말의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아니야. 아닐 거야. 그럴 리 없어. 라는 말로 억지로 자신의 불안을 잠재우려 한다. 그런 그녀가 답답하고 짜증이 나면서도 한 편으로는 한 없이 가련하게 느껴졌다. 그 가련함을 깨부수고 강제로 고개를 돌려 진실을 마주 보게 하고 싶은 가학 심 또한.

마치 소꿉놀이를 하듯 잘 꾸며놓은 인형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배제한 채 혼자서만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정작 소중한 가족들의 마음은 철저히 무시한 채로.
나였다면, 지독한 말을 퍼부으며 혹독한 진실을 보여줄 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가족들도 조앤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라서. 그렇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서야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가족들은 줄곧 조앤을, 조앤이 이루어 놓은 환경을 조롱했던 거다. 그것은 벌이다. 조앤은 죽는 그 날까지, 아니 죽어서도 눈치 채지 못하겠지만 그것은 가족들이 내리는 벌이었다.

마지막 장에서 로드니가 중얼거린 말에 소름이 쫙 돋았다. 비웃음 가득 담긴 그 말에.
당신은 외톨이고 앞으로도 죽 그럴 거야. 하지만 부디 당신이 그 사실을 모르길 바라.
이토록 체념 섞인 조롱이 어디 있을까.

지금까지 짜증나던 여자가 한 순간에 불쌍하게 느껴졌다.
아마 그건 어머니라는, 아내라는 사람에게 인생을 저당 잡힌 가족들이 선사하는, 일종의 지독한 복수가 아니었을까.

"난 알고 싶지 않아!"
조앤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녀는 그 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녀가 알고 싶지 않은 것이 뭘까?
이건 싸움이야.
나는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을 하고 있어.
조앤은 생각했다.
하지만 누구를 상대로?
무엇을 상대로?
신경 꺼.
난 알고 싶지 않아…….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붙들고 늘어져라.
그것은 좋은 문구였다.
누군가 그녀와 같이 걷는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잘 아는 사람이.
고개를 돌리면…….
조앤은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도 없었다.
어느 누구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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