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의 고치 작가 아리스 시리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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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격 미스터리 단편집을 읽다 꽤나 매력적인 트릭을 마주하면 아니, 이 트릭을 단편에 이렇게 덜렁 써버리면 아깝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반면, 장편 미스터리에서 트릭을 둘러싼 수수께끼가 다 풀리면 의외로 깔끔한 해답에 어라, 이런 걸 장편으로 어떻게 늘여 쓰는걸까? 생각보다 단순한걸? 그런 생각도 든다. 뭐 이런… 도대체 그럼 뭘 쓰라는 건가? 중편? 큭큭.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창작의 고통에 머리를 쥐어뜯는 작가가 아니라 속편하게 그들이 완성시킨 수수께끼와 그 풀이를 무작정 받아들이는 독자의 느긋한 여유라는 거다. 답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그 답을 찾아가는 길이 앞으로 쭉 펼쳐지니까 뭐, 이런 걸까. 이렇게 발전 없는 미스터리 독자인 저에게도 한번에 트릭을 간파당하신다면 그거 정말 심각한 겁니다. 뭐, 그렇다고요.






  어쨌든 빈약한 동기 부여로 독자들의 아쉬움을 꽤나 남기고 있는 작가이기도 한, 하지만 신본격 미스터리로서 자신의 길을 묵묵하게 걸어가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하.. 저는 그를 이렇게 판단하기엔 작품을 너무 안 읽었습니다.ㅋㅋ)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을 또 만났다. 공교롭게도 작가 아리스 시리즈를 연달아 읽게 되었는데, 실제 <달리의 고치>는 전체 작가 아리스 시리즈 중에서도 두 번째를 차지하고 있다 한다. 이렇게 두 번째로 전체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을 읽게 되었으니 뭐, 라는 식으로 내 나름대로 쓸데없는 의미를 부여하는 중이다.



  그러니까 그런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것은 역시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는 꽤나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일단 '작가 아리스'로 한정해서, 그러나 시리즈가 이런 데 다른 게 또 뭐 다르기야 할까 싶긴 하다. 복잡해 보이는 트릭이 말 그대로 복잡하게 풀리면 그것은 현란한 트릭의 의미가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좀 아깝게 느껴질 정도로 깔끔할 때도 있지만. 이걸 어떻게 늘린 거야? 싶다니까.

  그러나 그 아쉬움을 뒤로 미룬다. 결국은 굉장히 복잡하게 보이는 수학 문제도 상당히 아름답고 간결한 풀이로 답을 제시할 때 비로소 가치가 빛나는 법이니까.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달리의 고치>는 그런 풀이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데, 그 측면에서는 앞서 읽었던 <주홍색 연구>보다 한 수 위다. 구구절절 말이 길었는데 본격적으로 <달리의 고치>가 뭔지 한 번 들어가 봅시다.






  살바도르 달리가 그림 뿐만 아니라 다른 디자인에 있어서도 두각을 나타냈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달리는 보석 디자인에도 손을 댔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 <달리의 고치>의 주인공 도죠 슈이치는 보석 상인이다. 꽤나 성공한 사업가로서 인정받는 중.


  주얼리 도죠의 사장인 그는 살바도르 달리의 어마어마한 매니아로, 어린애처럼 달리를 따라 똑같은 모양의 콧수염을 트레이드마크로 길렀다. 그의 이니셜은 달리와 똑같은 S.D.다. 생일 역시 5월 11일로, 도죠는 그런 사실도 자랑스러워한다고 한다.(p.16)

  여튼 그 도죠 슈이치가 자신의 별장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주말이면 늘 별장에 들러 '프로트 캡슐'에 들어가 명상에 잠기곤 했던 그가 월요일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가족이 경찰에 신고를 한 것. 별장의 프로토 캡슐에 들어가 있던 도죠 슈이치의 시체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둔기에 머리를 맞고 사망한 도죠 슈이치는 어째서 프로토 캡슐 안에서 발견되었나, 방 근처에서 핏자국이 왜 갑자기 사라졌나, 무엇보다 범인은 왜 그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수염을 잘라가 버렸나.


  타살임은 틀림없어보이나 뭔가 석연치 않은 사건 현장. 도죠 슈이치 살인 사건의 해결에 범죄 심리학자인 히무라 히데오와 그의 조수 겸 작가인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참여하면서 그들의 이야기가 독자에게도 공개가 된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






  괴이한 사건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장 검증과 그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무엇보다, 누가 도대체 어떤 이유로 그런 현장을 만들어 두었나. 보석상으로서 꽤나 재력을 갖춘 인물인 만큼, 그의 목숨을 노리는 동기는 어느 정도 존재해 보인다. 게다가 그에게는 연적까지 존재하고 있었으니, 거기에 속사정이 있는 것은 아닐까.

  덕분에 언제나 늘 훌륭한 살인 동기가 되어주곤 하는 '금전' 그리고 '사랑'에 둘러싸인 <달리의 고치>는 모호함 투성이인 현장의 메시지를 해석해나가면서 진행되어간다.






  그렇게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주어진 트릭을 큰 틀로 잡고 그 안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도죠 슈이치라는 한 인간의 삶을, 달리 매니아로서, 성공한 보석상으로서, 한 여자를 사랑했던 남자로서의 다양한 면모를 조명한다. 특히 사건 현장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프로토 캡슐'을 통해 현대인으로서의 고뇌를 담아내고 있기도 하다.


  실은, 난해한 수수께끼를 풀이해 나가는 과정도 좋지만 무엇보다 이 <달리의 고치>의 큰 매력은 '고치'를 주제로 삼은 테마다. 어머니의 자궁속이 그야말로 지상 낙원이었다고 말하는 살바도르 달리처럼 도죠 슈이치에게 현실에서 도피해 안락함을 누릴 수 있는 장소는 바로 별장 그리고 명상에 잠길 수 있는 '프로트 캡슐'이다. 그리고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화자인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그의 삶을 그려내면서 한결같이 동정적이고 또 따뜻한 시선을 담아내고 있는데, 그 역시 또 다른 자신만의 '고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가와와 히무라 뿐 아니라 도죠 슈이치의 죽음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을 입체적으로 그려내면서 현실을 떠나 이상적인 낙원을 꿈꾸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담아냈다. 그리고 나에게도 묻는다. 당신의 고치는 무엇이냐고.






  기묘한 수수께끼의 현장의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그려진 히무라와 아리스가와의 유쾌한 대화, 도죠 슈이치의 삶을 되짚어보면서 드러나는 그의 애정과 고뇌─그리고 이는 달리 매니아였던 도죠 슈이치 답게 달리의 삶, 달리의 뮤즈이자 연인이었던 갈라, 달리의 보석 디자인 등과 연결되어 그의 주변을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그 모두를 아우르며 누구나 품고 있는, 또는 갈망하는 낙원의 존재를 '고치'라는 형태로 그려내고 있는 구성까지 꽤나 두툼한 분량과 긴 호흡으로 이어가야 하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잘 어우러지게 담아내고 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문장을, 작품을 두 번 읽어보니 알겠다. 상당히 여운이 남는 그의 이야기는 신본격 미스터리의 매력 뿐 아니라 다양한 테마를 담아내려고 한다는 것을. 본격적으로 찾아나서보고자 한다. 이렇게 또 한 번 코를 꿰이는구나. 잘 부탁해요, 아리스가와 아리스.








어째서 피해자는 목숨뿐 아니라 아끼던 콧수염까지 빼앗겨야 했을까?_p.78


사랑하는 이성은 자신의 환영을 투영하는 스크린이나 마찬가집니다. 자기와 맞는 상대가 찾아오면 누구나 보석처럼 반짝이죠. 문제는 희소성의 유무겠죠. 같은 캐럿의 다이아몬드를 똑같이 세공해 같은 링에 끼우면 똑같은 반지가 완성되겠지만, 사람은 다르죠. 자기가 반한 사람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으니까요._p.242


영원한 아름다움이라니 소박한 신앙이다. 보석은 어차피 원소기호로 표시되며 적절한 화학반응을 일으키면 폭발하는 광물일 뿐이다. 살짝 우습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귀엽게 느껴졌다. 유치하다고 깔보는 게 아니라, 좋아하니까 좋아한다고 말하는 꾸밈없는 대답에 호감이 갔다. 보석의 광채는 영원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불어 본격 추리소설과 한신 타이거즈도 영원불멸이다._p.343


"히무라 교수님의 고치는 뭐지?"

그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그리고─.

"학문을 빙자한 인간 사냥."

너무나도 자조적인 말투였다. 대답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묻지 말 걸 그랬다. 나는 후회했다._p.373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본격 추리소설이라는 소우주를 그림으로써 구원받으려 했던 것이리라. 그리고 허구에 불과하지만 소설 속에서만큼은 완벽한 논리를 내걸고 세상을 찰흙처럼 주물럭거려 무언가에 실컷 복수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 마치 환자에게 치료의 일환으로 모형정원 만들기를 시키는 정신과 의사처럼 나만의 모형정원을 만들었던 것이다._p.384


누에는 고치를 짓고 그 안에서 번데기가 되지. 진주조개는 껍질 속으로 침입한 이물질을 수천 겹의 진주층으로 감싸 보석을 만들어. 인간도 마찬가지야. 인간의 고치 속에서도 갖가지 것들이 변화해 다양한 무언가가 만들어지겠지._p.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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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과 후는 미스터리와 함께 코이가쿠보가쿠엔 탐정부 시리즈
히가시가와 도쿠야 지음, 한성례 옮김 / 씨엘북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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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쯤되면 '믿고 보는' 히가시가와 도쿠야다. <방과 후는 미스터리와 함께>가 이제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작품을 네 번째로 만난 셈이니 성급하지 않은 판단이라 생각하는데,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읽은 그의 작품 중에서도 제일 재미있다.


  탐정부 부부장 키리가미네 료의 방과 후를 여덟 장면으로 그려내고 있는 단편집 <방과 후는 미스터리와 함께>는 그래도 역시 학교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려내고 있다보니 잔인하고 끔찍한 사건 대신 소소한 미스터리를 그려내고 있다. 다행히도 사망자수는 (아직까지는) 제로.


  하지만 그 와중에도 상당히 탄탄한 트릭과 의외로 허를 찔러오는─정말 선입견을 가지지 않겠노라고, 속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그 생각을 하자마자 바로 당했다!─반전은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역량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구나. 웃고 있다가 아차, 하고 앉은 자세를 고쳐앉는 독자를 상상하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을 작가를 생각하니 으악, 얄밉다.

 

 

 

 

 

  단연코 추천하고 싶은 단편은 적절하게 수미상관(?)을 이루며 처음에 당한 굴욕을 잊지 않고 이번에는 지지 않으리라, 머리를 마구 굴리고 있는 독자에게 또 한 번 스리슬쩍 뒷통수를 건드려주는 「키리가미네 료의 굴욕」과 「키리가미네 료의 두 번째 굴욕」이다. E자 모양으로 생겨 E관으로 불리는 곳에서 사라진 범인을 추격하는 키리가미네 료에게 누가 어떤 굴욕을 안겨준 것일까? 덧붙이자면, 이번에 이 작품이 드라마화되던데 절대로 소개를 읽지 말고 먼저 책을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왜냐고? 읽어보면 압니다.



  탐정부 부부장이니 사건을 해결하겠노라 큰소리를 치지만 어리버리하게 헛다리를 짚고 함께 방과 후에 사건에 휘말린 친구나 선배 혹은 선생님들이 사건을 해결할 때가 더 많다. 그럼에도 부부장으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고 「키리가미네 료의 역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골때리는 육상부 부장 덕에 운동장 한가운데서 「키리가미네 료의 절규」를 내지르기도 한다.


  본격적으로 독살을 이용한 살인 미수 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키리가미네 료와 보이지 않는 독」의 전쟁이 벌어지기도 하고, X의 비극을 안 읽어봐서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UFO의 등장에 얽힌 사건은 「키리가미네 료와 X의 비극」이라는 제목 속에 담겨 있다. 「키리가미네 료와 방과 후」에 어슬렁거리는 양아치와의 에피소드, 하늘에서 사람이 뚝 떨어지더니 만들어진 「키리가미네 료와 옥상 밀실」의 상황 역시 의외의 진실이 우스꽝스러운 상황과 함께 드러난다.

 

 

 

 

 

 

  상당히 매력적인 '키리가미네 료'라는 캐릭터를 내세워 코.. 코이가쿠보가쿠엔(이건 절대 못 외울 것 같다...-_-;;) 고등학교 탐정부 부부장의 활약을 그려내고 있는 <방과 후는 미스터리와 함께>는 사실 번외편이라고 한다. 어디서나 다 한다는 탐정 소설 연구회와 비교하지 말라는, 진짜 탐정으로서 활동한다는 탐정부 부원들은 상당히 시크하게도 소설 연구는 커녕 미스터리 소설 같은 것도 읽지 않는다고. 부부장이 방과 후에 휘말리는 사건이 이러한데, 정작 그들이 전면에서 활약하는 다른 작품들은 얼마나 재미있을까! 벌써부터 다른 작품들이 기다려지누나.

 

 

 

 

 

 

  긴 말 않겠습니다. 읽어보세요. 저 진지합니다.

 

 

 

 

 

나는 은연중에 상처를 입었다. 명탐정이나 가능할 줄 알았던 내 추리가 평범한 할아버지도 농담 삼아 꺼낼 만한 내용이었다니. 홈런을 취소당한 기분이다._p.27, 「키리가미네 료의 굴욕」


선생님의 말에 그만 나도 발끈하고 말았다. 이래 봬도 탐정부 부부장인 나를 붙들고 논리적 사고가 몸에 배어 있지 않다고 하시다니, 그게 어디 탐정부 부부장에게 하실 말씀인가. 덧붙여 말하자면 탐정부란 흔히 있는 탐정 소설 연구부와는 차원이 다른 탐정 활동 실천을 목표로 하는 동아리다. 유래가 수상쩍을지언정 교내에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문화계 동아리이다. 논리적 사고라면 오히려 전문 분야다._p.125, 「키리가미네 료와 X의 비극」


"안 가지고 있다면 이 창고 어딘가에 숨겨놨겠군. 네 담배와 라이터를 찾아내면 확고한 증거겠지?"

"좋아요. 찾을 수 있음 찾아보세요."

"그럼, 찾아내 주고말고. 찾는 김에 하나 물어보자. 네 담배 상표는 뭐냐?"

"마일드 세븐, 라이터는 카네모토의 2,000 안타 달성 기념 지포."

"좋아, 두고 봐라. 꼭 찾아낼 테니!"

아니, 선생님. 찾고 안 찾고를 떠나 아라키다는 이미 자백한 거 아녜요?_p.167, 「키리가미네 료의 방과 후」


리를 지를 틈도 없었다. 상공에서 떨어진 사람은 맹렬한 기세로 내 앞에 있던 에이코 선생님을 덮쳤다. 선생님은 그 충격으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마치 방심하여 등을 보인 프로 레슬러 점보 쓰루타에게 로프를 이용해 몸을 날려 공격한 멕시코의 전설적인 레슬러 밀 마스카라스를 보는 것 같았다. 이보다 더 적합한 비유가 또 있을까 싶을 만큼 깜짝 놀라게 한 광경이었다._p.208~209, 「키리가미네 료의 옥상 밀실」


"선생님, 남자 육상부에서 아다치에게 살의를 가질 만한 인물이 있을까요? 짐작 가는 사람 없어요?"

"무슨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우리 육상부에 아다치 슌스케를 죽이고 싫어하는 녀석은 한 명도 없어. 허나 마음에 들지 않아서 언젠가 꼭 한 번은 패주고 싶다고 벼르는 애들은 있지. 스무 명쯤 될걸."

스무 명? 많잖아.

"남자 육상부 정원이 몇 명인데요?"

"스물한 명이다."_p.255, 「키리가미네 료의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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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 세컨즈 2 - 생과 사를 결정짓는 마지막 3초
안데슈 루슬룬드.버리에 헬스트럼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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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권 리뷰와 동일합니다.

 

 

  그저 성범죄자에게는 무조건 강도높은 처벌을 내려야 한다고, 국가가 해주지 않아 그 억울한 마음을 자신의 손으로 복수함으로써 푸는 것도 너무나도 이해가 된다고, 그렇게 딸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분노는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에서 한 단계 더 올라선 관점에서 사실적으로 문제를 조망하며 그러한 나의 생각이 얼마나 단편적이었는지를 일깨워줬던 소설 <비스트>가 있었다. <비스트>의 마지막을 덮고 난 뒤의 충격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렇게 책 속에 녹아있던 루슬룬드 + 헬스트럼 콤비의 메시지에 그리고 성범죄자와 그를 둘러싼 감옥 생활의 끔찍함에 치를 떨며 읽었던지라 정작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경찰과 검사와 교도소장 등의 등장인물들은 까먹고 있었나보다. 한참 책을 읽어나가던 중 <비스트>에서 만날 수 있었던 상황이 문득 언급되는 것에 황급히 <비스트>를 뒤적이며 등장인물들이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쓰리 세컨즈>는 <비스트> 이후 5년의 시간이 흐른 뒤 벌어진 이야기이다. 잊고 있었던 등장인물들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고, <쓰리 세컨즈>에서 또 다른 사건에 맞닥뜨린다. 앞서 그들에게 일어났던 일은 또 다른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곳에는 또 무슨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그리고 또 거기에 무슨 메시지를 담아냈을까 궁금해 몸이 근질근질하다.

 

 

 

 

  마약 운반책들에게 마약을 토해내게 하고 한편으로는 구매자와 거래를 시도하는 남자가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마약 판매를 책임졌던 피에트 호프만은 자신의 흔적을 지워내고 현장을 경찰에 신고한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에베트 그렌스를 포함한─은 사건 발생 현장을 꼼꼼히 분석하고 용의자를 물색하지만 쉽사리 꼬리가 밟히지 않는다. 윗선에서는 파헤쳐야 할 다른 사건이 많이 있으니 수사가 여의치 않은 이 사건 역시 크게 파헤치지 않을 필요가 없으리라는 판단을 내린다.


  하지만 포기를 모르는 형사, 에베트 그렌스는 끈질기게 신고 전화의 목소리와 주변을 분석하며 사건 현장은 마약 거래 현장이었음을 추리해낸다. 여기까지만 보면 마약상과 형사의 추격전이 그려지리라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뿐이라고? 루슬룬드, 헬스트럼 콤비가 그려낸 이야기가? 바로 그 <비스트>를 써냈던 그들이?


  처음에는 이뿐이리라 생각했다. 경찰은 마약과의 전쟁에 시달리고 경찰이 마약 거래 현장에 위장 잠입을 해 그들의 뿌리를 뽑으려 한다,는 줄기를 중심으로 펼쳐나가는 이야기는 재미있을 수는 있지만 신선하지는 않다 생각했다. 범죄 조직에 경찰 대신 경찰과 손을 잡은 범죄자가 잠입한다는 것만이 그들이 색다르게 설정한 소재라 하기엔 너무 단편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에 '안전하긴 하겠다'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이뿐이라면, 뭔가 너무 아쉽다.






  경찰의 끄나풀이 되어 제발로 교도소에 들어간 '파울라' 피에트 호프만이 어떻게 임무를 마친 다음 교도소 밖으로 걸어나올 수 있을까,가 아니다. 호프만은 과연 살아서 교도소 밖으로 걸어나갈 수 있을까,가 이 소설의 주요한 줄기다.


  범죄자와의 연결을 끊어버리려는 대단하신 '윗분들'의 결정으로 상황은 순식간에 급변하면서 호프만은 그야말로 언제 죽을 지 모를 위기에 처한다. 한편, 호프만의 그림자를 끝내 발견해내고야만 에베트 그렌스 역시 상부의 결정에 의해 진실을 알게 된다면 평생 동안 죄책감을 안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는 연결고리가 끊어져버린 피에트 호프만과 호프만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선택에 휘말리게 된 에베트 그렌스. 그 때부터 <쓰리 세컨즈>는 그야말로 '3초'의 시간 속에 모든 것을 결정짓는, 어마어마하게 긴박한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 나는 그 3초의 순간과 하룻밤을 바꿔버렸다.

 

 

 

 

 

  총 2권으로 이루어진 <쓰리 세컨즈>는 초반 인물들의 등장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이야기가 조금 더디게 흘러간다. 그리고 1권의 말미에 이르러 피에트 호프만이 교도소에 들어가면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펼친 2권에서는 '여기까지만 읽어야지'라는 다짐과는 달리 끝까지 책을 놓을 수 없었을 정도로 엄청나게 몰입하게 된다. '3초'라는 순간을 그렇게 어마어마한 속도감으로, 하지만 생생하게 그려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나의 하룻밤과 바꿀 가치가 있었던 '3초'라는 시간은 <쓰리 세컨즈>라는 소설을 단순한 스릴러 그 이상의 것으로 바꾸어놓는다. 전직 기자로서, 또 실제 범죄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이들은 철저한 취재와 조사를 통해 소설 속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 생생함은 소설의 재미를 극대화할 뿐만 아니라 그 상황이 그저 픽션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역시 기자였던 안데슈 루슬룬드와 범죄자로서의 삶을 보냈던 버리에 헬스트럼은 누구보다 그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려낼 적임자였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그들은 <비스트>에서와 마찬가지로 지독하리만큼 현실적인 이야기를 그려내면서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피에트 호프만과 에베트 그렌스를 지켜보면서 생각의 가지를 뻗어나가는 것은 비단 나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과연, 이이제이(以夷制夷)를 통해 범죄의 뿌리를 뽑아내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범죄자를 이용하고 필요없으면 그저 잘라낼 수 있을까. 아무리 범죄자라 한들 그 정도의 인권조차 보장받을 수 없는 것일까(라고, 또 이 콤비는 나의 평소의 가치관을 또 한 번 뒤흔들 수 밖에 없는 질문을 던졌다!). 기타 등등. 더 많은 의문과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질문들, 그리고 모든 것을 바꾼 '3초'가 무엇인지, 그 '쓰리 세컨즈'가 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직접 읽으면서 확인해 보시라는 말 밖에 할 수가 없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것은, 이 이야기가 '소설'이라는 점이다. 어마어마한 긴박함과 통쾌함을 안겨다 주는 것은 소설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범죄자와 경찰의 거래, 술수와 배신은 사실이다. 마약의 늪에 빠져 평생을 마피아에게 이용당할 수 밖에 없는 범죄자들의 이야기도 사실이다. 교도소에서 이루어지는 끔찍한 폭력과 마약 거래 역시 사실이다. 또 다른 '피에트 호프만'은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에베트 그렌트 같은 형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스벤 순드크비스트 같은 형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리안나 헬만손 같은 형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렌나트 오스카숀이라는 교도소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있어 <쓰리 세컨즈>는 끝을 향해 달려갔건만, 여전히 현실은 이 모든 일이 횡행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것이 가장 안타깝다.

 

 

 

 

 

  <비스트>는 루슬룬드 + 헬스트럼 콤비의 첫 합작품이다. 그리고 <쓰리 세컨즈>는 그들의 다섯 번째 작품이다. <비스트>에서는 그다지 기억에 남지 않았던 에베트 그렌트 형사가 <쓰리 세컨즈>에서는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에베트 그렌트는 그들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이다. 미처 알아보지 못해 미안해요 형사님.

  <비스트>를 읽는 동안 나를 지배했던 것은 어마어마한 리얼리티 속에 그려진 성범죄자, 특히 아동성범죄자에 대한 분노와 충격이었다. 그리고 <쓰리 세컨즈>는 허구인 듯 실제인 듯 모호하게 꿰어놓고 독자에게 현실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여전했다.

  하지만 <쓰리 세컨즈>에서는 그 뿐만 아니라 소설의 전체를 이루고 있는 스릴러적 요소에서부터 캐릭터의 완성도 역시 훨씬 탄탄해졌음이 자명하다. 나만 해도 <비스트>에서는 기억못했던 이 형사님, 확실히 알아보지 않았는가. 작품 역시 콤비의 집필이 계속 될수록 진화되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리라 생각한다.


  어마어마한 리얼리티와 스릴러적인 재미까지 함께 갖추며 나를 긴장 속으로 몰아넣었던 <쓰리 세컨즈>는 세계 28개국에 판권이 팔렸고, 영화 판권이 계약되었다. 영국 범죄추리소설작가협회가 선정하는 대거 상 해외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오직 범죄자만이 범죄자 연기를 할 수 있다._1권, p.309


지금 우리가 는 일이 잘못된 일은 아니야. 원래 그런 거라고. 우리가 할 유일한 일, 그리고 우리가 한 유일한 일은 그저 현재 실형을 선고 받고 수감 생활을 하는 보이테크 조직원들의 변호사에게 그저 몇 마디 말을 건넨 것뿐이라고._1권, p.415


법이라……. 빌어먹을 법이라니, 이보쇼, 스텔넬. 그 법이라는 건 책상 뒤에 숨어서 끼적거리는 인간들이 만든 거란 말이오! 그런데 지금 이건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이오._2권, p.145


이봐, 헬만손. 내가 이상해지는 거야, 아니면 우리가 사는 현실이 이렇게 복잡해지는 거야?_2권, p.222


범죄자가 경찰수사를 돕는다니, 이런 빌어먹을 시스템이 또 어디 있습니까, 형사님. 정작 그 인간들이 벌인 범죄는 위장되고 묻혀버린다는 게 말이 되냐고요. 또 다른 범죄수사를 위해 경찰이 거짓말을 하고, 정작 수사를 담당하는 경찰에게는 진실을 숨기고 있다니, 이런 젠장, 이게 민주사회에서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형사님?_2권, p.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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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 세컨즈 1 - 생과 사를 결정짓는 마지막 3초 그렌스 형사 시리즈
안데슈 루슬룬드.버리에 헬스트럼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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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저 성범죄자에게는 무조건 강도높은 처벌을 내려야 한다고, 국가가 해주지 않아 그 억울한 마음을 자신의 손으로 복수함으로써 푸는 것도 너무나도 이해가 된다고, 그렇게 딸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분노는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에서 한 단계 더 올라선 관점에서 사실적으로 문제를 조망하며 그러한 나의 생각이 얼마나 단편적이었는지를 일깨워줬던 소설 <비스트>가 있었다. <비스트>의 마지막을 덮고 난 뒤의 충격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렇게 책 속에 녹아있던 루슬룬드 + 헬스트럼 콤비의 메시지에 그리고 성범죄자와 그를 둘러싼 감옥 생활의 끔찍함에 치를 떨며 읽었던지라 정작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경찰과 검사와 교도소장 등의 등장인물들은 까먹고 있었나보다. 한참 책을 읽어나가던 중 <비스트>에서 만날 수 있었던 상황이 문득 언급되는 것에 황급히 <비스트>를 뒤적이며 등장인물들이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쓰리 세컨즈>는 <비스트> 이후 5년의 시간이 흐른 뒤 벌어진 이야기이다. 잊고 있었던 등장인물들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고, <쓰리 세컨즈>에서 또 다른 사건에 맞닥뜨린다. 앞서 그들에게 일어났던 일은 또 다른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곳에는 또 무슨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그리고 또 거기에 무슨 메시지를 담아냈을까 궁금해 몸이 근질근질하다.

 

 

 

 

  마약 운반책들에게 마약을 토해내게 하고 한편으로는 구매자와 거래를 시도하는 남자가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마약 판매를 책임졌던 피에트 호프만은 자신의 흔적을 지워내고 현장을 경찰에 신고한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에베트 그렌스를 포함한─은 사건 발생 현장을 꼼꼼히 분석하고 용의자를 물색하지만 쉽사리 꼬리가 밟히지 않는다. 윗선에서는 파헤쳐야 할 다른 사건이 많이 있으니 수사가 여의치 않은 이 사건 역시 크게 파헤치지 않을 필요가 없으리라는 판단을 내린다.


  하지만 포기를 모르는 형사, 에베트 그렌스는 끈질기게 신고 전화의 목소리와 주변을 분석하며 사건 현장은 마약 거래 현장이었음을 추리해낸다. 여기까지만 보면 마약상과 형사의 추격전이 그려지리라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뿐이라고? 루슬룬드, 헬스트럼 콤비가 그려낸 이야기가? 바로 그 <비스트>를 써냈던 그들이?


  처음에는 이뿐이리라 생각했다. 경찰은 마약과의 전쟁에 시달리고 경찰이 마약 거래 현장에 위장 잠입을 해 그들의 뿌리를 뽑으려 한다,는 줄기를 중심으로 펼쳐나가는 이야기는 재미있을 수는 있지만 신선하지는 않다 생각했다. 범죄 조직에 경찰 대신 경찰과 손을 잡은 범죄자가 잠입한다는 것만이 그들이 색다르게 설정한 소재라 하기엔 너무 단편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에 '안전하긴 하겠다'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이뿐이라면, 뭔가 너무 아쉽다.






  경찰의 끄나풀이 되어 제발로 교도소에 들어간 '파울라' 피에트 호프만이 어떻게 임무를 마친 다음 교도소 밖으로 걸어나올 수 있을까,가 아니다. 호프만은 과연 살아서 교도소 밖으로 걸어나갈 수 있을까,가 이 소설의 주요한 줄기다.


  범죄자와의 연결을 끊어버리려는 대단하신 '윗분들'의 결정으로 상황은 순식간에 급변하면서 호프만은 그야말로 언제 죽을 지 모를 위기에 처한다. 한편, 호프만의 그림자를 끝내 발견해내고야만 에베트 그렌스 역시 상부의 결정에 의해 진실을 알게 된다면 평생 동안 죄책감을 안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는 연결고리가 끊어져버린 피에트 호프만과 호프만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선택에 휘말리게 된 에베트 그렌스. 그 때부터 <쓰리 세컨즈>는 그야말로 '3초'의 시간 속에 모든 것을 결정짓는, 어마어마하게 긴박한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 나는 그 3초의 순간과 하룻밤을 바꿔버렸다.

 

 

 

 

 

  총 2권으로 이루어진 <쓰리 세컨즈>는 초반 인물들의 등장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이야기가 조금 더디게 흘러간다. 그리고 1권의 말미에 이르러 피에트 호프만이 교도소에 들어가면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펼친 2권에서는 '여기까지만 읽어야지'라는 다짐과는 달리 끝까지 책을 놓을 수 없었을 정도로 엄청나게 몰입하게 된다. '3초'라는 순간을 그렇게 어마어마한 속도감으로, 하지만 생생하게 그려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나의 하룻밤과 바꿀 가치가 있었던 '3초'라는 시간은 <쓰리 세컨즈>라는 소설을 단순한 스릴러 그 이상의 것으로 바꾸어놓는다. 전직 기자로서, 또 실제 범죄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이들은 철저한 취재와 조사를 통해 소설 속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 생생함은 소설의 재미를 극대화할 뿐만 아니라 그 상황이 그저 픽션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역시 기자였던 안데슈 루슬룬드와 범죄자로서의 삶을 보냈던 버리에 헬스트럼은 누구보다 그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려낼 적임자였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그들은 <비스트>에서와 마찬가지로 지독하리만큼 현실적인 이야기를 그려내면서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피에트 호프만과 에베트 그렌스를 지켜보면서 생각의 가지를 뻗어나가는 것은 비단 나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과연, 이이제이(以夷制夷)를 통해 범죄의 뿌리를 뽑아내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범죄자를 이용하고 필요없으면 그저 잘라낼 수 있을까. 아무리 범죄자라 한들 그 정도의 인권조차 보장받을 수 없는 것일까(라고, 또 이 콤비는 나의 평소의 가치관을 또 한 번 뒤흔들 수 밖에 없는 질문을 던졌다!). 기타 등등. 더 많은 의문과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질문들, 그리고 모든 것을 바꾼 '3초'가 무엇인지, 그 '쓰리 세컨즈'가 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직접 읽으면서 확인해 보시라는 말 밖에 할 수가 없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것은, 이 이야기가 '소설'이라는 점이다. 어마어마한 긴박함과 통쾌함을 안겨다 주는 것은 소설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범죄자와 경찰의 거래, 술수와 배신은 사실이다. 마약의 늪에 빠져 평생을 마피아에게 이용당할 수 밖에 없는 범죄자들의 이야기도 사실이다. 교도소에서 이루어지는 끔찍한 폭력과 마약 거래 역시 사실이다. 또 다른 '피에트 호프만'은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에베트 그렌트 같은 형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스벤 순드크비스트 같은 형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리안나 헬만손 같은 형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렌나트 오스카숀이라는 교도소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있어 <쓰리 세컨즈>는 끝을 향해 달려갔건만, 여전히 현실은 이 모든 일이 횡행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것이 가장 안타깝다.

 

 

 

 

 

  <비스트>는 루슬룬드 + 헬스트럼 콤비의 첫 합작품이다. 그리고 <쓰리 세컨즈>는 그들의 다섯 번째 작품이다. <비스트>에서는 그다지 기억에 남지 않았던 에베트 그렌트 형사가 <쓰리 세컨즈>에서는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에베트 그렌트는 그들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이다. 미처 알아보지 못해 미안해요 형사님.

  <비스트>를 읽는 동안 나를 지배했던 것은 어마어마한 리얼리티 속에 그려진 성범죄자, 특히 아동성범죄자에 대한 분노와 충격이었다. 그리고 <쓰리 세컨즈>는 허구인 듯 실제인 듯 모호하게 꿰어놓고 독자에게 현실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여전했다.

  하지만 <쓰리 세컨즈>에서는 그 뿐만 아니라 소설의 전체를 이루고 있는 스릴러적 요소에서부터 캐릭터의 완성도 역시 훨씬 탄탄해졌음이 자명하다. 나만 해도 <비스트>에서는 기억못했던 이 형사님, 확실히 알아보지 않았는가. 작품 역시 콤비의 집필이 계속 될수록 진화되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리라 생각한다.


  어마어마한 리얼리티와 스릴러적인 재미까지 함께 갖추며 나를 긴장 속으로 몰아넣었던 <쓰리 세컨즈>는 세계 28개국에 판권이 팔렸고, 영화 판권이 계약되었다. 영국 범죄추리소설작가협회가 선정하는 대거 상 해외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오직 범죄자만이 범죄자 연기를 할 수 있다._1권, p.309


지금 우리가 는 일이 잘못된 일은 아니야. 원래 그런 거라고. 우리가 할 유일한 일, 그리고 우리가 한 유일한 일은 그저 현재 실형을 선고 받고 수감 생활을 하는 보이테크 조직원들의 변호사에게 그저 몇 마디 말을 건넨 것뿐이라고._1권, p.415


법이라……. 빌어먹을 법이라니, 이보쇼, 스텔넬. 그 법이라는 건 책상 뒤에 숨어서 끼적거리는 인간들이 만든 거란 말이오! 그런데 지금 이건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이오._2권, p.145


이봐, 헬만손. 내가 이상해지는 거야, 아니면 우리가 사는 현실이 이렇게 복잡해지는 거야?_2권, p.222


범죄자가 경찰수사를 돕는다니, 이런 빌어먹을 시스템이 또 어디 있습니까, 형사님. 정작 그 인간들이 벌인 범죄는 위장되고 묻혀버린다는 게 말이 되냐고요. 또 다른 범죄수사를 위해 경찰이 거짓말을 하고, 정작 수사를 담당하는 경찰에게는 진실을 숨기고 있다니, 이런 젠장, 이게 민주사회에서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형사님?_2권, p.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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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를 사는 남자
우타노 쇼고 지음, 김성기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일본 미스터리에 있어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두 거장이라 하면 역시 일본의 국민 탐정이자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긴다이치 코스케를 창조해낸 '요코미조 세이시' 그리고 정작 작품보다는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 덕에 잘 알려진 '에도가와 란포'다. 심지어 국내에 소개된 <소년탐정 김전일> 덕분에 '긴다이치'라는 성은 굉장히 잘 알려진 반면 또 '에도가와 란포'라는 이름은 쉽사리 와닿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나 역시 '에도가와 란포'라는 거장의 존재를 알고난 뒤 다시 뜯어본 <명탐정 코난>에서 '에도가와 코난'이라는 건방진 안경잡이 꼬마의 성이 바로 란포의 것을 따 왔음을 깨달았으니.


  추리문학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에드거 앨런 포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비틀어 창조해낸 이름 '에도가와 란포'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는 추리 소설 작가이자 평론가였고, 일본 추리작가협회의 초대이사장을 역임했다. 그가 기부한 기금으로 하는 '에도가와 란포상'은 현재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들을 많이 배출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작가의 수상작으로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방과 후>, 다카노 가즈아키의 <13계단>, 기리노 나쓰오의 <얼굴에 흩날리는 비> 등을 꼽을 수 있겠다.

 

 

 

 

  <시체를 사는 남자>는 바로 그 에도가와 란포를 향한 우타노 쇼고의 애정과 존경이 듬뿍 담겨 있는 소설이다. 극중극 형식을 취해 「백골귀」라는 작품과 그 중간 중간 「백골귀」의 작가 스스로의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는데, 그 다른 시점의 두 이야기는 씨실과 날실처럼 얽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결말로 이끌고 있다. 역시 우타노 쇼고라고 할지─사실 '역시'라는 말을 붙일 정도로 우타노 쇼고의 작품은 많이 읽지 않아 내가 할 말은 아니긴 하지만─두 개의 이야기가 액자식 구성을 취하면서도 그 이음새가 상당히 매끄럽게 연결되어 이야기의 몰입도를 높여준다.



  <시체를 사는 남자>의 주를 이루는 이야기이자 액자 속을 담당하고 있는 「백골귀」는 에도가와 란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에도가와 란포와 실제로 그와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시인 하기와라 사쿠타로를 등장시켜 에도가와 란포의 주변에서 일어난, 하기와라 사쿠타로의 시를 모방한 한 남자의 죽음을 추적하는 과정을 담아냈다.

  추리 작가가 실제로 사건에 휘말려 사건을 해결한다는 설정은 낯설지 않지만(실제 요코미조 세이시도 그렇고, 에도가와 란포의 패턴도 흡사했다 한다) '에도가와 란포'라는 거장을 그 주인공으로 내세워 창작의 고통보다 더한 추리의 고뇌에 빠진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상당히 흥미진진하다. 그래도 역시 추리소설 작가라고 해야 할지, 바쁜 업무에 그냥 넘어갈 업무에 의문을 느끼고 그에 동원된 트릭을 하나하나 간파해나가는 에도가와 x 하기와라 콤비의 활약은 상당히 앙큼하다. 조수랍시고 '오난도 이로'라는 이름을 내민 하기와라 사쿠타로는 셜록 홈스를 패러디한 차림으로 돌아다니고 에도가와 란포보다 앞서나가 추리를 펼친다. 마지막에는 그래도 에도가와 란포라는 이름을 다시 한 번 치켜세워준 우타노 쇼고의 의도는 현실과 소설은 다르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존경하는 추리소설 작가를 돋보이게 해 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이 작품은 그야말로 우타노 쇼고의 에도가와 란포를 향한 오마주다. 에도가와 란포가 실제로 살았던 1930년대의 일본을 배경으로 친분이 있었던 시인 하기와라 사쿠타로를 등장시켜 사건을 해결해 나가고, 그들의 대화 속에는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에 대한 언급이 빠지지 않는다. 「백골귀」의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나 작품에 사용된 트릭 역시 시대에 걸맞는 수준으로 상당히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어 실제로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시리즈를 읽을 때와 비슷한 기분에 휩싸였다. 우타노 쇼고는 「백골귀」의 작가의 이름을 빌려 이러저러하게 소설을 썼노라 밝히고 있다. 그저 내가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을 읽어보고 그의 작풍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면, 그의 작품을 어느 정도 더 알고 있었더라면 훨씬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을텐데 그러지 못한게 참으로 아쉽다. 실제로 「백골귀」의 문체는 에도가와 란포의 그것과 상당히 흡사하다는데 내가 알 길이 어디 있겠는가.





  소설 속에서 되살아나 움직이는 에도가와 란포의 활약과 그가 사건의 진상에 다가갈수록 밝혀지는 추악한 진실을 파헤쳐가는 액자 속 이야기와 그 틀이 온전히 하나가 되는 순간 <시체를 사는 남자>는 한 권의 작품으로, 우타노 쇼고의 재기 넘치는 오마주가 완성된다. 그것이 그저 우타노 쇼고의 손끝에서 피어난 꿈같은 이야기면 어떠한가. 이렇게나마 나는 에도가와 란포라는 거장의 일면을 들여다 볼 수 있었는데.





  작중에서 에도가와 란포는 숙박부에 자신의 이름을 '히로 라이타'로 기입한다. 'Hero Writer'를 조금 비틀었던건가 싶었는데(실제로 그런 의도도 있으리라 보지만) 알고보니 그의 본명은 '히라이 타로'다. 이렇게 글자를 재배열해 새로운 말을 탄생시키는 애너그램은 이 작품 속에 등장할 뿐만 아니라 소설 그 자체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이기도 하다. 일본어를 모르는 나는 역자 후기를 읽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지만 우타노 쇼고가 숨겨둔 소설의 장치는 분명히 바로 그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이구, 뭘 그리 놀라십니까. 진정하시지요. 장황하면서도 조금씩 깊숙한 곳으로 끌어들이는 문장, 의성어나 의태어와 함께 빈번하게 사용되는 부사. 게다가 그걸 가타카나로 표기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잖아요. 이건 란포의 작품이 분명해요. 그리고 첫머리 부분도 란포가 즐겨 쓰는 패턴이고요. 이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굉장히 무서운 이야기다, 라는 식의 독백으로 서막을 여는 패턴이요._p.42~43


하하하, 선생님은 역시 눈치 채셨군요. 아까는 자세히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사실 제가 대책 없는 란포 중독자라서 백골귀 안에 란포와 관련된 여러 가지 재미있는 내용들을 집어넣었죠. 목차 제목들도 대부분 란포 작품에서 따왔고, 단역으로 등장하는 인물들 이름도 란포 작품에서 골라냈어요. 아카마쓰 몬타로라는 경감도 사실은 「엽기의 끝」에서 악당에게 쫓기는……._p.81


만약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과연 근대문학사는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 생각만 해도 온몸이 짜릿해진다._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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