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실이 만들어지는 주된 이유는 범인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싶어서이다. 불가능해 보이는 밀실 상황을 만들어두고 교묘하게 알리바이의 덫에서 빠져나간다. 반대로 말하면, 밀실을 만들어놓을 수 밖에 없었던 사람을 찾아내면 그가 바로 범인이다.

  시체를 토막내는 주된 이유는 '운반의 편의성'을 위해서이다. 범인의 입장에서 눈 앞에 놓인 시체가 자신이 저지른 일이라는 걸 숨기기 위해서는 시체를 그대로 범행 장소에 내버려두기보다는 인적이 드문 곳에 숨겨둔 채 범행 자체를 은폐하는 것이 그나마 가장 안전하다. 최대한 발견을 늦추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통째로 옮기려면? 남의 눈에 띄기도 쉽고 무엇보다 너무 무겁지 않은가. 시체를 해체하는 것 역시 그 못지 않게 힘든 일이지만, 자신의 범행이 드러나는 것보다는 나을테니 힘든 일을 무릅쓴다.

 

 

 

 

 

 

  그렇다면 그 이외에 시체는 왜 토막나는 것일까?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치아키의 해체 원인>은 시체가 해체된 9개의 원인을 선사한다. 도대체 그 시체는 왜 토막났을까?


  양쪽 팔다리가 토막난 채 장난감 수갑에 채워져 기둥을 껴안고 있는 듯한 모양새로 발견된 시체, 34개의 조각으로 발견된 시체, 잠깐의 마법처럼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은 엘리베이터에서 홀연히 사라진 여자 대신 나타난 토막난 시체와 같은 엽기적인 사건의 원인을 찾아낼 뿐만 아니라 어떤 부인이 누드 잡지를 대량으로 구매한 이유가 해체 원인과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이고 곰인형의 팔이 잘렸다 다시 손수건에 꽁꽁 싸매어져 제자리로 돌아간 깜찍한 이유를 추측하기도 한다. 그냥 시체를 내버려둬도 될 일을 굳이 시체가 발견되기 좋은 장소에 토막난 채 발견된 이유는 무엇이며, 전단지 속 모델의 얼굴만을 집요하게 '해체'하는 일도 일어나고, 머리만 사라진 시체가 발견된 다음부터 다른 시체와 함께 이전 피해자의 머리가 함께 발견되는 '슬라이드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는 추리극도 등장한다.



  시체 토막을 퍼즐로 치환하면 너무 잔인한 소리가 아닌지, 사실 예전 같았으면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그냥 그렇구나 했지만 요즘 본격 미스터리를 별로 안 읽은 건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벌렁거리긴 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그 벌렁거림을 잠깐 무시하고 계속 이야기를 써 보자면, 이 <치아키의 해체 원인>은 퍼즐의 실마리를 찾아내는 흥미로운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퍼즐을 만든 사람과 푸는 사람 사이에 규칙을 합의한다면 충분히 연역을 해 나가면서 실마리를 발견하겠지만, 이 책이 더 매력적인 이유는 합의된 규칙 대신 퍼즐을 푸는 이가 상상력을 발휘하게끔 한다는 점이다. 시체의 해체 원인에 일반론이 있을까? 사람 사는 세상사가 알 수 없는 원인으로 가득한 것을, 상상을 초월하는 이들의 사고 과정을 일반적인 상식으로 메울 수 없을 때는 상상력을 발휘하는 수밖에 없다. 그 상상력을 적절한 블랙 코미디와 버무린 연작 단편집이다.


  무엇보다 압권인 것은, 앞선 이야기를 한데 묶어 익숙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뜻밖의 결말을 내놓는 최종인 「해체 순로」다. 힌트는 충분히 주어졌으니 바른길을 한 번 따라가 보는 것은 어떨까. (결국 나는 못 풀었다.)




  <치아키의 해체 원인>은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데뷔작이다. 데뷔작부터 '시체의 해체'라는 과감한 퍼즐을 도입한 것을 생각해 보면 현재 만나볼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본격 미스터리의 근원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뿐만 아니라 이 한 권의 책으로 다양한 시리즈에 대한 길잡이가 주어져 있다는 것도 <치아키의 해체 원인>을 한 번쯤 읽어볼만한 이유이다.


  작가 후기에 등장하는, 자신을 해체로 이끈 수많은 작품 중에서도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트릭으로 평가받는 <점성술 살인사건>과 최근에 만나본 가사이 기요시의 <바이바이, 엔젤>이 반갑다. 특히 현상학적 직관을 통해 시체가 토막난 현상을 분석하는 야부키 가케루의 추리도 '토막'의 다양한 해석을 흥미롭게 만날 수 있다. (다만 후기에 '카사이 키요시의 <바이바이 에인절>이라고 번역을 해 두다니, 그래도 나름 국내 출간작인데요...ㅠㅠ)


  또 하나, 데뷔작에서 창조된 캐릭터 다쿠미 치아키와 헨미 유스케, 다카세 치호는 '닷쿠 & 다카치 시리즈'로 발전되기에 이르렀다. 시리즈 속 등장인물들이 다듬어지기 이전의 모습을 한 번 만나보는 즐거움도 숨어있다. 경찰이 범죄를 해결하고 말고를 떠나 시체가 처하게 된 상황(?)에 대하여 각자의 이유로 궁금증을 가진 이들이 나름대로 그 원인을 찾아나서는데, 그냥저냥 프리터로 연명하며 책 읽기에 몰두하며 시체의 해체 원인에 대해 골몰하는 '다쿠미 치아키'와 나름대로 건실한 교사로 생활하고 있는 듯한 '헨미 유스케'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대학생으로만 만날 수 있었던 '다카세 치호', 그들의 '명정' 추리는 술이 빠지긴 했지만 나름대로 건재한 모양이다.

 

 

 



"농담이야, 농담. 사실 내가 관심 있는 것은 마츠우라 야스에의 시체였어."

"시체?"

"그래. 왜 이렇게 토막을 낸 걸까 싶어서. 그 이유 말이야."_p.21~22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그렇게 되뇌었다. 시체를 해체하는 것은 시간과 수고가 드는 작업이다. 그것은 어쩐지 바보 같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인 진리였다._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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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밟기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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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쌍둥이 서언이 서준이를 보고 있으면, 이란성 쌍둥이라 애초에 덩치 차이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형' 서언이와 '동생' 서준이가 각자의 역할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까, 말하자면 서준이는 형이 뭔갈 하고 있으면 다음엔 자기 차례라는 걸 알고 있는 듯 손을 딱 붙이고 서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것도 그러면 서언이는 또 동생에게 이번엔 너 하라는 듯 가지고 있던 물건을 다정하게 동생에게 건네주는 것도 기특하고 귀여워 심장이 터질 지경이다. 심쿵간쿵.

 

 

  그래도 형과 동생이 나이 터울이 있으면 형의 입장에서는 '어 세상에 없었던 동생이 태어났네'라는 걸 인식할테지만 쌍둥이들은 어릴 때 서로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같이 사는 애? 그럼에도 부모의 입장에서는 서열이 나름대로 정해져 있어 형 동생으로서의 미덕을 강조한다면 단 몇 분 차이임에도 형은 형대로 동생은 동생대로 억울한 일이 있지 않을까, (그나마 언니 동생은 애초에 언니고 동생이니 괜찮지 않을까? 라고 동생한테 말했더니 동생은 '언니는 언니라서 그래!'라고는 한다만) 특히나 생김새에서부터 행동까지 비슷한 일란성 쌍둥이라면 더더욱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요코야마 히데오는 그러한 쌍둥이의 관계를 '그림자 밟기'로 표현한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것도 싫어하는 것도 같았던 그들은 심지어 한 여자아이를 동시에 좋아하게 되었다. 같은 얼굴, 비슷한 성격, 늘 세트처럼 함께 붙어 다니며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동시에 그렇기에 '한 사람의 나'로서는 인정받기 힘들게 하는, 형 그리고 동생. 그렇기에 그들은 그 여자아이가 자기를 좋아해야만 했다. 그래야 쌍둥이가 아닌 한 명의 존재로서 인정받을 수 있을테니까.


  그렇게 동생 게이지는 비뚤어졌고, 절도를 일삼는 게이지를 보며 우울증에 걸린 어머니는 집에 불을 질렀고, 어머니와 게이지를 구하러 간 아버지마저 함께 세상을 떠나 마카베 슈이치는 세상에 혼자 남게 되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동생과 함께 있다. 귓속을 두드리며 울려퍼지는 동생의 목소리. 사법고시를 준비했던 슈이치는 가족 모두를 보낸 뒤 '밤털이'가 되어 연명하고 있었다. 비상한 기억력을 지닌 동생과 자신의 뛰어난 통찰을 이용해 주변 인물들의 사정을 꿰뚫는, 밤거리를 거니는 '노비카베'의 약 일 년간의 삶을 연작 형태로 만날 수 있었다.




  첫 번째로, 도둑이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밤털이를 주인공으로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였다. 두 번째로는 '근묵자흑'을, 습자지 한 장 차이로 도둑과 경찰을 가르는 경계에 대해 생각했다. 차마 포옹은 하지 못한 채 서로의 그림자만을 밟으려 쫓기고 쫓아가는 또 하나의 '그림자 밟기'를, 피도 눈물도 없는 폭력을, 차마 '정의(正義)'라는 이름을 붙여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밀려오는 측은지심을. 그리고 그 전체를 함께 하는 슈이치와 게이지의 유대감이 끝내 끊어질 때는 알 수 없는 안타까움이 밀려오기까지 한다.




  요코야마 히데오의 소설은 <클라이머즈 하이>나 <64>와 같은 묵직한 장편도 있지만 <제3의 시효>와 같은 단편집도 꽤나 많이 출간되어 있다. <제3의 시효>의 경우 아주 훌륭한 경찰소설이자 소품집이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작품들은 읽어보지 못해 뭐라 말하기는 어려워 이 <그림자 밟기>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어렵지만, 그럼에도 꽤나 드물게 판타지적인 요소와 도둑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파격, '아니 어떻게 주인공에게 이입을 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라는 분노와는 달리 마지막에는 그들에게조차 측은지심을 느끼게 하는 스토리텔링의 힘이 아주 강렬한 연작소설집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림자 밟기>라는 제목에 알맞게 쌍둥이 형제의 관계와, 그들과 닮은 듯 닮지 않은 절도범과 경찰들 사이의 관계라는 두 가지의 큰 흐름 작품의 기저에 깔아두고 그 위에서 그려내는 일곱 가지의 이야기가 1년 간의 시간의 흐름을 두고 각 계절에 걸맞는, 그럼에도 늘 쓸쓸한 정서를 담아내고 있는 점이 탁월하다. 묵직함은 덜하지만, 쓸쓸함은 못지 않은 소품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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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두리 없는 거울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박현미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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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츠지무라 미즈키의 <테두리 없는 거울> 중 두 번째 이야기인 「그네를 타는 다리」를 다 읽고 나니 만화 <플라워 오브 라이프>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아아, 그렇다. 학창 시절에는 한 교실 속 친구와의 사소한 트러블에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차라리 내가 경미한 부상을 입어 학교를 못 간 게 그 트러블을 없앨 수 있는 자그마한 계기가 되어주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어디선가 부주의한 자동차가 나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만 너무 아픈 건 싫으니까 적당한 정도, 를 기대한다거나, 감기 몸살이 나를 덮치길 바란다거나, 하다못해 등굣길 버스가 잠깐 고장이 나 움직이지 못한다면 어떨까─하는, 누가 들으면 큰일 날 소리라고 할 망상을 펼치곤 했었다. 그리고 나는 학교를 무사히 졸업했다. 초, 중, 고 개근!



  아마 「그네를 타는 다리」의 주인이었던 미노리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게 아닐까. 그런데 그 마음에, '무언가'가 응답한 것이다. '무언가'는 미노리의 마음일 수도 있고, 정말 그네의 주위를 부유하던 유령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수수께끼의 정답을 찾으려 애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소설집은 그 알 수 없는 수수께끼에서 공포를 느끼게끔 하는 것이 작가의 애초의 목적이 아니었을 테다. 어린 시절 무언가 금기시되는 듯하면서도 귀를 막을 수 없었던, 끊임없이 계속 들여다보게 만드는, 뱃속을 간질거리게 만드는 그 '두려움'과 어린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테두리 없는 거울>은 그런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 학교 부지가 옛날에는 공동묘지였대.' '히익, 진짜?'

  낮 동안에는 전교생의 떠들썩한 활기로 가득찬 학교는, 사실 모두가 하교하고 난 다음에는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조용해진다. 아마 낮 시간 동안의 우렁찬 소리가 더욱 대비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 갭에서 많은 학교 괴담들이 변주되지 않았을까? 「계단의 하나코」 역시 그런 학교 괴담의 변주곡 중 하나다. 들어보면 허접하고 허술하기 그지없는 금기사항임에도, 아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하나코를 상대로 '해서는 안 될' 규칙과 '해야할' 규칙이 전해진다. 그리고 이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혼자' 을씨년스러운 학교를 지켜야 하는 당직 교사에게도 적용될지도 모른다. 학생이 아닌, 선생님에게도.



  「아빠, 시체가 있어요」라는 외침은 기묘하다. 그들은 시체를 발견했음에도 그다지 놀라지 않고, 오히려 덤덤하게 이 시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고심에 빠진다. 오히려, 끝없이 나오는 시체를 보며 정리하기 힘든데 왜 이렇게 많이 죽이냐는 짜증까지 몰려온다. 이들의 신경줄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가. 더더욱 기묘한 것은, 일주일에 한 번 방문할 때마다 지난 주에 있었던 일을 마치 모른다는 듯 행동한다는 점이다. 과연 치매에 걸린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계신, 시골집에서 그들은 무엇을 본 것일까. 개인적으로는 이 이야기는 아직도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른다.



  「테두리 없는 거울」이란 어떤 거울일까? 액자에 씌워지지 않은 거울마저 그 끝의 경계는 분명히 존재하건만. 어린 시절 영심이는 미래의 남편감을 보기 위해 입에 칼을 물고 소복을 입은 채 거울을 살며시 들여다본다. 누구나 미래를 궁금해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 하지만 천기누설이라 했을까? 미래의 일을 현재로 끌어들이는 순간, 시공간은 뒤틀려버릴지도 모른다. 마치 빛을 반사해 거울 앞의 물체를 투영해주는 그 경계가 흐릿해진, 거울 속의 세상이 거울 밖으로 스물스물 흘러나오는 '테두리 없는 거울'처럼 말이다.



  무엇보다 노스탤직 호러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은 「8월의 천재지변」을 꿈꾸는 소년의 이야기다. 반에서 나름대로 중심적인 역할을 하던 소년 신지는, 반에서 가장 겉돌고 있던 소년 교스케을 우연찮게 돕는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변두리로 밀려나버렸다. 친구가 한 명도 없는 것은 쓸쓸하니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나간다. 신지는 '유짱'이라는 친구를 만들고, 교스케는 묵묵히 그 가상의 친구에 대해 맞장구친다. 하지만 '유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지고, 신지는 반 친구들의 의혹어린 눈총이 두렵다. 그러나 그 때, 홀연듯 나타난 '유짱'… 유지매미의 허물을 함께 바라보며 신지와 교스케는 어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 시절의 이야기는 각자의 비밀로 묻어두지만, 언젠가는 문득 이야기를 꺼내 '천재지변'의 전말을 함께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을테다. 그 따스함이 아름답다.




  일본의 '분신사바'는 동전을 이용해 유령님이 글자판을 움직여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게 하는 것 같다. 지역마다 다를지는 모르지만, 우리 동네의 '분신사바'는 두 명이 한 개의 펜을 맞잡고 힘을 빼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유령의 움직임을 따라 종이 위에 글씨를 쓸 수 있으니까. 한 번은, 친구들이 물었다. '훙치뿡캭이 좋아하는 남자애가 누군지 알려주세요!' 참 나, 유령이 그걸 알긴 뭘 알아, 하고 코웃음쳤지만, 종이 위의 움직임은 글씨라기보다는 요상한 그림에 가까웠지만, 펜의 움직임이 멎고 난 다음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너무나도 뚜렷하게 보이던 마음 속의 이름… 황급히 부정했지만, 발개진 얼굴은 감추지 못했던 기억이다. 미노리는 동전을 의도적으로 움직였을까? 내 친구들은 이미 모른 척 하고 있던 내 마음을 알고 있어 은근슬쩍 글씨를 썼던 걸까? 나는 아직도 그 진실을 모른다.





하나코와 만나고 싶으면 하나코가 사는 계단을 진심을 다해 열심히 청소할 것. 당신은 깨끗하게 청소했어._p.82~83, 「계단의 하나코」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지금 붕 날아서 이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면 어떻게 될까?_p.122, 「그네를 타는 다리



정리하느라 얼마나 힘든데, 대체 왜 이렇게 죽이는 거야!_p.168, 「아빠, 시체가 있어요」



이 미래를 내동댕이치고 싶다. 다시 고치고 싶다._p.228, 「테두리 없는 거울」



옛날의 예민한 터부를 날렵하게 찌르다니. 이 녀석, 정말로 듬직해졌구나._p.322, 「8월의 천재지변」



_2015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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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 오가와 요코 컬렉션
오가와 요코 지음, 권영주 옮김 / 현대문학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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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에 보이는 정사각형 하나하나가 수십억 개의 별을 포함한 은하이다.

- 칼 세이건, <코스모스>



  이렇게 보면 이 우주는 너무나도 넓고 광대하여 나는 우주의 한 톨 먼지만도 못한 존재처럼 느껴지다가도, 그 한 톨의 먼지보다 작은 입자들의 세계가 보이지 않으나 존재하고 있음을 문득 깨닫고는 이것이 품고 있는 또 하나의 우주가 놀랍기만 하다. 한 명 한 명이 품을 수 있는 그 우주가.



  누구나 그 우주를 품고 있을지언정(나 역시 그 우주가 있으리라 믿고 싶으므로 누구나, 라고 해 두자.) 그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이도 있고(역시 나는 아직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믿고 싶으므로), 자신만의 방법으로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이도 있다. 리틀 알레힌도 그 중의 한 명이다.

 

  어째서 가로 여덟, 세로 여덟의 흑백이 번갈아가며 놓여있는 모눈판에 똑같은 말이 놓여 있을 뿐인데, 그 말이 움직이는 순간 시작되는 드라마는 다르기만 할까. 체스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어떻게 매번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어떻게 한정된 테이블 위에서 그토록 넓은 우주 속의 별 하나 하나를 여행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어째서 체스의 말(chess pieces)을 움직이는 이들은 말(言)없는 조용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일까. 리틀 알레힌은 언어를 음성으로 표현하는 입조차 필요없다는 듯, 입술을 붙인 채 태어났을 정도로.



  동양의 장기의 기원이 그러했듯 체스도 비슷한 이유로 출발했을 것이다. 결국은 상대편의 왕을 잡기 위한 전쟁인 것이다. 서로의 속내를 드러내고, 또 감춘다. 그럼에도 마주보고 앉은 두 사람은 서로가 품고 있는 속내를 알아차리고 아름다운 시를 만들어낸다.


  리틀 알레힌은 그 조화를 만들어내는 데 아주 능했다. 다른 것은 필요 없었다. 그저 마스터의 체스 테이블 아래에 고양이 폰을 안고 있으면 충분했다. 테이블 아래, 그 작은 공간 아래에서 그는 심원한 체스의 바다에 잠수하여 헤엄치곤 했다. 마스터와 폰이 떠난 다음, 그는 스스로 성장을 멈춘 채 인형 속을 머물며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과 체스 판 위의 아름다운 궤적을 그려나간다.



  인형 '알레힌'의 제작을 위한 후원자였던 노파 영양은 당연히 '알레힌'과의 첫 대전 상대가 되었다. 리틀 알레힌은 그녀와의 만남을 늘 좋아했다. 그녀는 리틀 알레힌의 체스에서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마스터의 존재를, 마스터의 움직임을 알아차린다. 자신의 체스 안에서 마스터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만큼이나 리틀 알레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아마 미라 정도일까.



  리틀 알레힌은 체스를 통해 마스터를 만난다. 그러고 보니, 작은 정사각형의 판 위에서 또 다른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이들이 있었다. 그 위에서 가장 그리운 이를 만날 수 있기에 바둑판 앞을 떠나지 못하는 소년이 있었다. 히카루는 사이를 만나기 위해 바둑을 두고, 히카루의 바둑에서 사이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이, 도우야 아키라가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이야기에 온전히 빠져들 수가 없다. 그저 테이블과 말, 바둑판과 흑백의 바둑알만으로 주조해내는 그들만의 세계를, 시작은 엇비슷하나 매번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그들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꽤나 질투가 이는 일이다.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체스의 말과 바둑알이라는 매개는 이해할 수 없음에도, 나에게도 사용할 수 있는 매개체가 하나는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언어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누군가가 나에게도 똑같은 빈 종이에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낸다. 함께 아름다운 궤적을 만들 수는 없어도, 누군가의 우주를 살짝은 엿볼 수 있다는 것. 독자가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참 다행이다. 리틀 알레힌의 이야기의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눈물이 흐른 이유는 설명할 수 없을지언정.




  어쨌든 장그래는 말했다. 누구나 자신의 바둑을 두고 있다고. 누구나 자신의 우주를 품고 누구나 그 우주를 헤엄치고 있을테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아름다운 우주를 엿보는 방법도 존재한다. 함께 잠수하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책,이라는 기보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이다.

 

 

* <코스모스>의 이미지는 알라딘의 미리보기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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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토버리스트 모중석 스릴러 클럽 37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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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거사'를 치르기 위해서는 어쨌거나 계획이 필요하다. 악당과의 대결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주로 악당들은 치밀한 계획을 세워 자신들의 '거사'를 도모하고자 하지만 이상하게도 우리의 주인공들은 능숙한 임기응변으로 악당들을 당황케 하는데, 이것 참, 통쾌하면서도 왜 늘 이런 패턴일 수밖에 없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는거지. 아, 물론 악당들의 계획을 알고 그에 대응하기 위해 처음부터 계획을 세우는 일이 힘들다는 쉴드는 가능하다.


  '정면대결'을 위해서는, 상대보다 몇 수를 앞서 내다보는 통찰이 필요하다! 과연 <옥토버리스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계획대로 이루어졌노라고 내심 썩소를 짓는 인물은 누구였을까? 어쨌든 마지막 장면에 등장했다면, 아마 '주요인물'일텐데 말이다.


  가브리엘라와 대니얼은 창밖을 내다보며, '옥토버리스트'를 손에 넣기 위해 그들을 뒤쫓는 세력이 도대체 얼마나 포진되어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두려움에 떨고 있다. 그러나 결국 문이 쾅! 하고 열리며 들어온 것은 총구를 겨누고 있는 조셉. 으응? 이게 마지막 장면이라고? 총구를 겨누고 끝냈다니, 그래서 이게 무슨 장면이람? 진정 이것이 결말이라는 말이야?



  뭔가 화장실에서 뒤처리를 못하고 나온마냥 찝찝한 기분으로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맞이했지만, 그래도 일단 인내심을 가지고 지금까지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 차차 흐름을 잡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차근차근 읽어나간다. 그런데 이 사람들, 정말 장난이 아닌 것이다! 도대체 그들이 지나온 길은 어떤 가시밭길이었단 말인가. 그들이 가시밭길을 헤쳐왔지만 끝내 총구의 끝을 맞이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그들이 밟고 지나간 자리에는, 가시넝쿨이, 그리고 거기에 찔려 흘린 피가 흐르고 있을 뿐. 그 때부터 혼란이 오기 시작한다. 결말을 맞이한 시점에서, 뒤바뀌었던 것은 아닐까? 결말의 그 장면만으로 내가 피해자와 악당을 무의식중에 점찍어버린 것은 아닐까? 스릴러를 읽는 독자로서의 얕은 경험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분법적인 사고는 위험하기 그지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다. 전체적인 구성이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그 마지막 챕터에서 이미 제프리 디버가 교묘하게 파놓은 함정에 걸려들고 말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찾아온 혼란 역시,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명확하지 않은 결말,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점을 향해 서서히 출발할 때, 도대체 그 시작점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지 도무지 짐작되지 않았다. 그리고 거기서 도대체 어떻게 독자에게 반전을 안겨줄 것인지도. 그러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중간지점에서 디버는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는 것을 절절히 깨닫게 해 준다. 모씨 사망. 사실 그거 이러이러한 계획 때문이었어. 모씨 사고. 사실 그거 저러저러한 계획이야. 그런거였어? 이럴 수가! 라는 패턴의 반복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도대체 얼마나 겉만 보고 판단하는지, 사람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없는지를 절절히 깨닫는다. 그리고 점점 궁금해지는 것이다. 이 일련의 사건 뒤에 있는 것은 어떤 '계획'일지. 그것이 '신'이 결정하는 '운명'이라 할지라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계획-실행의 반복이라면 서사 구조라는 것은 사실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단순한 사건의 나열만 있을 뿐. 그리고 그 '계획'과 '계획' 속에 숨겨둔 속내를 감춰둠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난다. 결국 <옥토버리스트>의 기본 전제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순서를 비틀었을 뿐인데, 이는 색다른 스릴러의 탄생을 가져다줬다. 참 쉽게 말하지만, 이것은 독자의 오만일테다. 이를 위한 발상, 그리고 집필을 위해 필요했던 치밀한 계산은 얼마나 치열했을지. 제프리 디버의 이 색다른 '실험'에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이를 더욱 매력적으로 하는 것은 책의 구조 자체 역시 철저한 역순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페이지를 순서대로 넘기고 있는데 갑자기 Part 3를 맞닥뜨렸을 때의 당황스러움과 깨달음이라거나, 가장 먼저 만나는 역자 후기. 마지막 페이지의 이 책의 '진짜' 속표지. 그리고 끝까지 감춰져 있었던 각 챕터의 제목. 이 모든 것을 거꾸로 돌려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어가는 재미 역시 절대로 놓칠 수 없다.




_20150204~2015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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