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말해줘
존 그린 지음, 박산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처음 이 책을 펼쳤을 때는 정말 오지게도 안 읽혔다. 그래서 덮어두고 한 두어 달을 내버려뒀던 것 같다. 약 50페이지가 그렇게도 넘어가질 않더니, 이번에 다시 펼치니 어찌나 순식간인지, 도대체 어떤 심경의 변화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안 읽히는 책은 잠시 내버려뒀다가 다시 펼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평소에는 잘 읽히든 안 읽히든 일단 펼친 책을 꾸역꾸역 읽곤 했는데, 이 얼마나 무식한 짓이었단 말인가. 그리고 역시 책은 사 두는 게 제맛이라는 증거가 되어줄 빛나는 책이 아닐까 싶다!


  소설의 주인공 '콜린'은 지금까지 열 아홉 번, 열 아홉 명의 캐서린과 사귀고 차이기를 반복해왔다. 과거의 그는 신동이었고, 수많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은 똥만 가득 찬 인간이 되어버렸다며 실연의 아픔에 바닥에 들러붙어 거의 동화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런 그의 엉덩이를 일으켜세운 이는 다름아닌 (거의) 유일한 친구 하산. 하산은 콜린에게 자동차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한다. 그렇게 그들은 도로 위로 올랐다.

 

 

  도로 위를 달리는 두 남자의 청춘일까, 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콜린과 하산의 행선지는 즉흥적이고 빠르게 이루어진다. 제1차 세계대전을 촉발했던 사라예보에서의 암살, 그 주인공인 프란츠 페르디난드 대공의 시체를 보러 오라는 광고에 홀린듯이 이끌리게 된 것.

 

  그리고 그 곳에서 그들은 '린지'를 만난다. '캐서린'이 아니니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천만에, 린지는 '콜린'이라는 남자친구가 있다! 여기서 느껴지는 어마무시한 복선은 제쳐두기로 하자.

 

  콜린은 문득 생각한다. 지금까지 스쳐간 캐서린과의 연애를 되돌아보며, 이 사랑의 패턴을 그래프로 나타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콜린은 자신의 연애 그래프에 꼭 들어맞을 변수들로 이루어진 공식을 만들어 내기로 결심한다.

 

 

  린지와 하산과 열 아홉 명의 캐서린과 공식과 함께 콜린의 여름은 흘러간다. 과거 '신동'이자 '사회성은 조금 떨어지는' 신동이었던 콜린답게, 그리고 그런 콜린을 구제해 줬던 하산답게, 말이다. 그리고 그 여행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연애 그래프의 오차를 줄이기 직전의 '치명적인 오류' 그리고 '과거'다.

 

  콜린은 늘 어린 시절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라왔다. 신동은 '남이 이루어놓은 것을 빨리 배울'뿐이고 천재는 '남이 아무도 하지 못하는 것을 발견'한다나. 콜린은 이미 주어진 단어들의 철자를 뒤바꾸어 새로운 단어 혹은 문장을 찾아내는 애너그램에 능했다. 하지만 그는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자신의 씁쓸한 현재를 곱씹는다. 캐서린 역시 '과거'다. 과거의 캐서린으로부터의 수많은 실연을 곱씹으며 그는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과거의 학문이 이루어놓은 성과를 공부했으며, 과거에는 신동이었고 과거의 연애를 그래프로 만든다. 과거에는 이러이러했는데, 현재는 머리에 똥만 찬 인간이 되었다는 콜린의 절규는 이내 미래에 대한 기대로 뒤바뀐다. 그 결정적 장면, 그것이야말로 지금까지 보편적으로 알려져왔으나 누군가에게는 인생이 뒤바뀌는 한 순간이다. 이야기의 힘을 빌어, 그토록 사랑스럽게!

 

 

  깨알같은 콜린의 수기를 살펴보며 그의 과거를 되짚어보는 것은 다만 의미가 없지는 않다. 그저 콜린이 미래를 더 기대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니까. 나는 콜린의 과거가 하나 둘 쌓여 그것이 미래를 기대하게 만드는 것의 가치를 만나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그래프가 하는 일이다. 과거의 자료를 토대로, 미래를 예측하는 것.

 

 

 

난 한물갔어, 과거가 되어버렸다고. 과거에는 열아홉 번째 캐서린의 남자 친구였고. 과거에는 신동이었고. 과거에는 수많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똥만 가득 찬 인간이 되어버렸어._p.17

 

하지만 하산의 그런 무관심한 태도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뭔가 특별한 일을 해보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삶의 의미가 대체 뭐란 말인가? 신이 삶을 주셨다고 믿으면서 삶에는 TV를 보는 것 이상의 다른 뭔가가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다니, 이 얼마나 기이한 일인가?_p.50

 

사랑은 그래프로 나타낼 수 있어!_p.65

 

그러니까 넌 원래 있는 단어로 다른 단어를 만들어내는 데 천재구나. 하지만 완전 무의 상태에서 새로운 단어를 만들 수는 없고._p.139

 

그는 로맨틱한 행동은 근본적으로 단조롭고 예측 가능하며, 그래서 누가 됐건 두 사람의 충돌 과정에 대해 상당히 간단한 공식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공식과 실제 로맨틱한 관게들을 연관 지을 수 있을 만한 천재가 아닐까 봐 걱정되었다._p.150

 

하지만 그에겐 항상 책이 있었다. 책이야말로 항상 차이는 쪽이다. 읽다가 내려놓으면 책은 당신을 영원히 기다릴 것이다. 관심을 기울이면 항상 받은만큼 애정을 돌려줄 것이고._p.163

 

 

 

_2015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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