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보니 읽고 있는 일본 미스터리 중에서 '유괴'를 소재로 다룬 작품이 여러모로 기억에 꽤 많이 남는다.

 

  그것은 아마 최근 연달아 두 편의 '유괴 미스터리'를 읽었기에 작년에 읽었던 렌조 미키히코의 <조화의 꿀>의 잔상이 서서히 떠오른 것도 있을 테다. 그리고 연달아 읽은 건 아니지만 제목과는 반대로 여름이 시작될 즈음에 펼쳤던 아카이 미히로의 <저물어 가는 여름>도 있었다.

 

  요코야마 히데오가 오랜 침묵을 깨고 내놓은 작품 <64> 역시 유괴사건을 중심으로 하고 있단다. 이쯤에서 다른 작품들이 속속 소개되고 있는 누쿠이 도쿠로의 작품 중 떡하니 '유괴'를 달고 있어 <유괴 증후군>도 도서관에서 한 번 빌려와봤다. 음, 그러고 보니 젊은 작가 축에 속하는 누쿠이 도쿠로를 제외한 세 명의 작가들은 나이도 지긋하신 것이 각자의 개성과 연륜을 작품 속에 담아낸 것도 같다.

 

  그 중에서도 재미있게 읽었고 또 함께 읽기에 뚜렷한 매력이 있는 두 작품을 소개해 본다. (그렇습니다. 사실은 따로 리뷰 쓰자니 뭔가 막막해서....-_-;;)

 

 

 

 

조용히 가라앉아있던 사건이 수면 위로 다시 떠오를 때 : 64 & 저물어 가는 여름




# 요코야마 히데오, 64


 


  삼촌에게 세뱃돈을 받으러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선 어린 소녀 아마미야 쇼코는 곧 유괴범의 인질이 되었다 끝내 목숨을 잃었다. 1989년 1월, 단 7일간이었던 쇼와 64년의 일이었다.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수사관들은 그 해를 헤이세이의 시작이 아닌 쇼와가 남겨둔 과제로 기억하고 있다. '육사'라는 이름으로.

 

  '육사'의 공소시효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D현경은 경찰청장의 방문을 앞두고 분주해지기 시작한다. 특히 홍보담당관으로서 역할이 막중한 미카미는 이에 대한 준비를 하는 중에 형사부와 경무부의 일상적인 대립 속에서도 미심쩍은 움직임을 감지한다. 경찰청장의 의도는 무엇인가? 새삼스럽게 '고다 메모'와 함께 '육사'가 수면 위로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딸을 찾기 위해, 미카미는 철저히 홍보담당관으로서의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의 몸 속에는 형사로서의 피가 흐르고 있었고… 경찰이라는 거대한 조직의 일원으로서의 고뇌와, 일반적인 형사가 아닌 '홍보담당관'의 입장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지금까지와 다른 경찰의 또 다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폐쇄된 세계가 아닌, 바깥 세상으로서의 창은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다.



# 아카이 미히로, 저물어 가는 여름


 


  20년 전 범인의 죽음으로 유괴된 영아를 발견할 수 없었지만 더 이상의 수사 없이 막을 내렸던 유괴 사건.

 

  그러나 20년 뒤, 범인의 딸이 유명 신문사의 기자로 내정되었다는 소식이 경쟁 잡지에서 폭로되면서 신문사에서는 자체적으로 20년 전의 유괴 사건을 재조사하기로 한다. 신문사에서 한직으로 밀려나 있던 기자 가지는 20년 전 봉인되었던 사건의 원점에 점점 다가가기 시작한다.

 

  거기서 마주하게 되는 진실은, 어째서 그들이 이렇게 살아가야만 하는가에 대한 당혹감과 슬픔이다. 범죄라는 비극이 가져온 일상의 균열을 담담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 그 순간의 감정은, 여름을 싫어하는 나조차도 저물어 가는 여름에 대한 반가움이 아닌 쓸쓸함이었다.


# 공통점 : 유괴, 경찰, 기자, 보도협정, 부녀(父女)관계, 재수사(?)

 

- 유괴 : 유괴사건이 중심이니까.

- 경찰 : 경찰이 등장한다.

- 기자 : 기자도 등장한다.

- 보도협정 : 유괴 수사에 있어 보도협정은 필수.

- 부녀관계 : 두 작품 모두 안타까운 부녀관계가 녹아 있다.

- 재수사 : 재수사라고 하기엔 좀 그렇고, 오래 전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다.

 

 

# 차이점 : 경찰, 기자, 부녀관계, 조직 내 위치, 작품 특색, 작가

 

- 경찰 : 64의 주인공은 '경찰'이다. 그리고 그는 기자들을 상대해야만 한다.

- 기자 : 저물어 가는 여름의 '탐정역'은 기자인 가지가 맡았다. 과거에 묻혀있던 사건을 재조사하기 위해서라도 경찰을 만나야 한다.

- 부녀관계 : 안타까운 부녀관계. 딸이 아버지를 너무 닮아버리면 아버지가 고생하는구나. 물론, 두 작품 모두 딸도 고생을 많이 했고 또 할 것 같다.(진담이 섞인 농담입니다;;)

- 조직 내 위치 : 상사와 부하가 있다는 것은 내 마음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거기에서 시작된 갈등이 <64>를 이끌어나가는 원동력이다. 사회생활하기 참 힘들다. 이로 인해 <64>는 사회파 미스터리의 지위를 획득했다. <저물어 가는 여름>은 조직이 눌러오는 중압감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게 <64>에 비해 마음이 조금 편하다면 편하달까. 대신 그는 20년 전 사건의 퍼즐을 하나하나 끼워맞춰나가면서 '본격 미스터리'의 매력을 지니게 된다.

- 작품 특색 : <64>는 상당히 남성적이고, 격정적이다. 그들에게 '육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직으로 밀려난 기자가 새삼스럽게 끝난 사건을 다시 조사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경찰이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지만, 경찰 청장 방문은 다르다. 반면 <저물어 가는 여름>은 마치 호수 위의 백조 같다. 수면 위의 백조는 우아하고 고요하지만, 그는 쉼없이 물 아래에서 헤엄치고 있는 것이다.

- 작가 : 작가가 다르다...는 건 당연한 소리고. 두 작가 모두 기자 생활을 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 쪽은 신문 기자 생활을, 다른 한 쪽은 방송 쪽에서 일을 해 왔다. 한 쪽은 오랜 공백기를 깨고 10년동안 집필한 작품을 내놓았고, 다른 한 쪽은 그의 처녀작이다. 그렇다고 두 작품의 무게가 달라지는 건 없지만. (물론 책 자체의 무게는 다릅니다.)



  명절 연휴에는 늘 어디 갈 데도 없고 쭈구리돋는지라 책을 펼치곤 하는데, 그 때는 정말 책 읽는 것 말고는 할 게 없기 때문에 지난 설 연휴에는 <7년의 밤>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책에 매달려 있었던 셈이지만, 이 <64>는 그야말로 타의로, 순전히 작품 그 자체로 책에 매달려 있어야만 했다. 올해 들어 읽은 책 중 유일하다. 카페가서 공부하기 전에 피곤하니까(는 무슨, 사실 당장 공부를 하기는 싫었다.) 책 좀 읽어야지 하고 펼쳤는데 4시간 동안 약 400페이지를 넘기고 있다니, 이게 무슨 일이람.

  딸의 실종과 흔들리는 부부관계, 경찰청장의 방문, 형사부와 경무부 사이에서 이도 저도 못한 채 기자들에게 질질 끌려갈 위기에 놓인 자신의 위치. <64>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미카미다. 그리고 독자는 그의 외로움과 좌절을 생생하게 전해받는다. 그것이 <64>가 가지고 있는 힘이다.

 

 

 

 

  <저물어 가는 여름>을 저물어 가는 여름에 읽어볼까 생각했지만, '부산은 이제 덥죠?'라는 메모는 좀 더 더워지기전에 이 책을 펼치게 만들었다.(리뷰는 너무 더울 때. 이런!) 그리고 여름의 길목에서, 앞으로 다가올 여름의 습기와 더위가 저물어가는 여름을 상상하니 뭔가 흐뭇하기도 했다. 그것은 아마 아사쿠라 히로코의 미래를 함께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지는 20년 전의 유괴사건을 재조사하면서 '유괴'에 휘말려 비틀린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피해자들을 만난다. <저물어 가는 여름>은 다름아닌 '유괴'가 불러오는 비극을 무엇보다도 생생하게 전해준다.

 

 

 

 

  '묻지마 범죄'라는 것도 있지만, 유괴야말로 무고한 사람들을 갑자기 사건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세워두고 그 소용돌이가 점점 커져 자신의 일상을 깨뜨리는 것을 빠짐없이 지켜보게 만드는 잔인함을 가진 범죄다. '보이스피싱'의 수법에 자주 쓰이는 것 역시 사람을 순간적으로 가장 괴롭고 슬픔으로 빠뜨리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일테다. 그러면서도 몸값을 받아내는 범인의 입장에서, 혹은 범인의 지시를 따르면서도 범인을 검거해야하는 경찰의 입장에서 극적인 묘사를 하기에 아주 적합한 소재이기도 하다. 그러니 '유괴'를 소재로 하는 미스터리 역시 꾸준히 만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측면에서 <64>와 <저물어 가는 여름>은 상당히 차이가 있으면서도 비슷한 작품이다. 작품 내 요소도 그렇지만, '유괴'가 가져온 비극을 생생하게 그려낸다는 점에서, 유괴 사건의 본질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은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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