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5
우타노 쇼고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아는 것이 힘일까, 모르는 게 약일까. 결국 상치하는 두 속담이 함께 공존한다는 것은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이분하며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일거다. 누군가의 행복이 누군가에게는 지독한 불행일 수 있다. 반대로 누군가의 불행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다른 이에게 행복으로 다가갈지도 모르겠다. 모두에게 해피엔딩이란 그저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나 가능할지도. 하지만 세상은 행복과 불행의 균형을 맞추려는 듯 기쁜 소식과 슬픈 소식을 함께 전해오기만 한다. 그렇게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이 되고 또 다시 봄은 찾아오겠지. 혹은, 가을을 느낄 틈새도 없이 순식간에 추운 겨울 속으로 들어가거나.



  우타노 쇼고의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 역시 지독한 겨울을 지내고 있는 두 사람을 그려내고 있다. 두 사람은 추운 겨울 슈퍼마켓의 보안요원과 좀도둑으로 만났다. 혼자 남은 슬픔과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는 미안함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중년 남자와, 자신 스스로가 지금 처한 현실에서 벗어날 용기와 의지가 없다는 것이 답답한 여자. 남자는 자신의 딸을 생각나게 하는 여자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거기서부터 그들을 연결하는 실은 한 번 비틀려 구원과 절망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지기 시작했다. 남자의 절망은 여자의 구원으로, 그리고 여자가 다시 돌려주려는 헌신의 손길은 남자의…….

 

 

  그들은 겨울을 지나 봄을 맞이할 수 있을까? 오로지 겨울 속에서만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남자는 여자로부터 봄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자신이 봄의 한가운데로 들어가진 못하더라도, 마지막으로 따뜻한 봄 햇살의 눈부심을 잠깐 눈에 비추어본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멀리서 보이는 봄의 풍경은, 따스함은 없는 먼 곳에 있는 그 풍경은.

 

 

 

 

  진실이 언제나 밝은 빛을 안겨다주지는 않는다. 버먼 할아버지가 존시를 위해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 담벼락에 새겨놓은 마지막 걸작은 존시에게 다시 살아갈 힘을 주었지만, 아마 그만큼 수와 존시는 버먼 할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을까? 오 헨리는 마지막 반전으로 여운을 남긴 채 이야기를 끝내버렸지만, 존시는 또 다른 죄책감 속에서 살아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나는 거짓을 꾸며내는 것만이 진실을 왜곡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진실을 두고 침묵하는 것, 드러내지 않고 뒤로 숨겨두는 것 역시 왜곡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렇게 숨겨진 이야기를 모른 채 살고 있는 것은 비단 나에게만 한정된 일이 아닐 테니까. 불편하고 슬프고 힘들고 절망스러울지라도, 그 진실을 마주한 다음 그것을 극복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시 세상은 그렇게 한 방향으로만 나아가지는 않는다. 아는 것이 힘일 수도 있지만,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는 법이다. 우타노 쇼고의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작가의 스타일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가족을 떠나보내고 혼자 남아 자신의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는 중년 남자의 쓸쓸한 감정을 지독하게 생생하게 담아내면서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인간사는 결국 모순에 가득차 있다고. 과연 그에게는 둘 중 무엇을 필요로 하겠느냐고. 그래도 역시 진실을 맞닥뜨리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똑바로 바라보라고 다그쳐야 할까. 비록 또 다른 절망에 맞닥뜨릴지라도, 그것이 진실이니까. 아니면 단 하나, 그 어둠을 잠시 감춰둘 수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그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최선의 해피엔딩일 수 있다면, 그렇다면 조금은 따뜻한 겨울이 될 수 있을까.

 

 

 

 

  히라타가 머물고 있는 겨울 속에서, 나는 어떤 엔딩을 선택해야 할까. 그것은 봄이 될 수 있을까. 아득하기만 하다.

 

 

 

 

 

─재킷 속의 깃털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_p.15

 

 

시간은 사정없다. 사정없이 흘러가고 사정없이 슬픔을 지워낸다. 언젠가는 사랑하는 딸의 죽음을 신문에 실린 생판 모르는 타인의 부음과 마찬가지로 무덤덤한 사실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미치도록 무서워졌다._p.53

 

 

마음의 정리가 아직? 안 되겠죠. 그건 알지만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고, 그렇다면 되도록 빨리 새출발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요. 인생은 한 번뿐이지만, 그 인생에 무대가 하나뿐인 건 아니에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다른 무대에 오를 수도 있다고요._p.157

 

 

악순환이다. 또 한 바퀴 돌아왔을 때는 후회가 두 배로 세 배로 커졌다. 공포와 절망과 후회가 차례대로, 때로는 하나가 되어 덮쳐와서 히라타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_p.182

 

 

인간사란 애초에 모순으로 차 있다. 히라타 마코토와 스에나가 마스미에 한하지 않고, 모든 사람의 인생이 마찬가지다._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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