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은 속삭인다
타티아나 드 로즈네 지음, 권윤진 옮김 / 비채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뭐 부동산에 드나들며 집을 구해본 적은 없지만, 소설이나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보면 '아니, 이렇게 괜찮은 집이 왜 이 가격에 나온거예요?'라는 상황에 종종 맞닥뜨린다.

  중개인은 우물쭈물 대답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조금 더 캐보면 그 집에 얽힌 사연이 등장한다. 전에 살던 사람이 자살했대요, 전에 살던 사람이 살인자였어요, 귀신 나온다는 소문이 있어요, 등등등.

  확실히 그런 곳은 피하게 되는 걸 보면 '공간'이라는 것은, 그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벽'은 실은 그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두 지켜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새로 싹 바뀌면 아무 상관없지 않을까,라는 생각보다는 왠지 모르게 기피하게 되니 말이다.

 

 

  타티아나 드 로즈네의 <벽은 속삭인다>는 바로 이를 모티브로 공간 그리고 심리를 파고드는 이야기이다.

 

 

 

새벽녘 나는 이 방에서 도저히 잠을 잘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집에서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었다. 프레데릭이 잘못 짚은 것이다. 

벽은 기억한다. 그리고 나는 상상한다._p.41

 

 

 

  파스칼린 말롱은 남편과의 이혼 후 새 집을 구하면서 다시 시작할 결심을 한다. 생각보다 조금 싼 가격에 나온 집이 조금은 의심스러웠지만, 자신의 마음에 꼭 들었고 이 집을 마음에 들어하는 다른 사람이 있다는 말에 재빨리 계약을 마친다.

  그러나 이사를 해 온 바로 그 날, 그녀는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러운 느낌이 든다. 이사를 하는 동안의 스트레스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지만, 집 밖에 있을 때는 멀쩡하더니 집에만 들어오면 같은 증세가 반복된다.

  이상하게 생각한 그녀는 전남편 프레데릭에게 연락을 했다가 자신이 살고 있는 집 근처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리고 바로 자신이 살고있던 그 집이 연쇄살인마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한 바로 그 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삶의 공간에 스며들어 있는 감정들이 두려웠다. 벽의 속삭임이 두려웠다._p.60

 

 

 

  처음에는 몸이 조금 나빠졌을 뿐이지만,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파스칼린은 벽이 기억하고 있는 당시의 상황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에 몸서리치고 두려워한다. 평소에는 빈틈없이 일하던 직장에서도 실수가 계속되고, 동료들의 걱정도 귀찮기만 하다. 새로운 인연을 만나면 조금은 나아질까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녀는 더더욱 어둠 속으로 침잠되어만간다.

  너무나도 생생하게 들려오는 벽의 속삭임은 연쇄살인마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여인들의 처절한 고통과 절규로만 가득차 있다. 파스칼린은 벽의 속삭임에 홀리기라도 한 듯, 연쇄살인마의 또 다른 범행 현장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그 곳에서 파스칼린은 무엇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째서 파스칼린은 그들에게 집착하는 것일까?

 

 

 

다들 경멸과 혐오가 담긴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어쩌면 여자 말이 옳은지도 몰랐다. 이곳에 왜 왔는가? 찾으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어째서 나와는 상관도 없는 과거를 들추려고 하는가?_p.115

 

 

 

  200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 얇은 분량 속에서 타티아나 드 로즈네는 '공간'을 중심으로 상당히 밀도있게 파스칼린의 심리를 묘사해 나가고 있다.

  민감은 커녕 둔한 편에 속하는 나로서는 처음 이 책을 넘기고 있는 동안에는 '공간'에 있어서 상당히 민감한 파스칼린이 신기했고, 그렇다한들 굳이 살인의 현장을 찾아가는 그녀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공간'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나 느낌을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녀의 날카로움과 예민함에 공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흘러가면서 파스칼린은 기묘한 행동과 더불어 그녀의 과거를 풀어놓기 시작한다. 왜 프레데릭과 행복한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는지, 유난히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여인들이 살해당한 이야기에 그토록 집착했는지. 그녀가 가지고 있던 아픔은 '공간'과 공명하는 그녀의 날카롭고 민감한 감수성에 부딪히며 서서히 그녀의 안에서 부서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 이상하게도 내 머릿속에 뚜렷이 의식되는 게 있었다. 고통스러운 깨달음이었다. 그건 내가 걱정하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나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여인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나도 딸을 빼앗긴 엄마였다._p.121 

 

 

 

  <사라의 열쇠>로 알려진 작가 타티아나 드 로즈네는 <벽은 속삭인다>가 바로 <사라의 열쇠>의 모태가 되었다고 한다. 공간에 대한 그녀의 치밀한 묘사가, 파리의 어떤 공간이 기억하고 있는 역사적인 아픔으로 발전해나간 것이다. 유태인 학살, 그리고 그 곳에 있던 어린 아이들의 고통을 기억하고 있는 공간으로.

  그래서인지 파스칼린 역시 유대인을 수용하고 있었던 벨디브를 방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그것을 이렇게 힘을 써야 했을까, 라는 생각에 분위기가 흐트러진 것 같아 상당히 아쉽기도 하다.

 

 

 

 

  그렇기에 <사라의 열쇠>의 모티브가 된 작품으로서, 보다는 '속삭이는 벽' 그 공간의 두려움과 그 공간에 둘러싸인 여자가 서서히 변해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처음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길때는 너무나도 담담한 문장과 쉬이 공감할 수 없는 파스칼린의 감수성 때문인지 조금은 지루했다. '속삭이는 벽'이 품고 있는 그 공간의 기억 역시 공감하기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책을 다 읽고 음미해보는 여운은 안타까움이 짙게 배어나온다. 상당히 짧고 담담한 문장들 속에서 서서히 파스칼린이 미쳐가는 과정은 적나라하고 또 안타깝다.

 

 

 

 

  공간 그리고 심리를 병치시켜 담담하고 깔끔하게 전개되어가는 이야기다. 공간이 주는 오싹함보다는, 그 공간과 함께 공명하는 한 여자의 슬픔이 돋보인다.

  읽고 난 뒤 곱씹어보는 여운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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